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2화 (22/254)

비장의 무기 (1)

그래서 그게 누구냐고?

이장님의 딸인 황서연이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아이가 맞았다.

그런데 얘가 원래 이렇게··· 예뻤나?

대학생이 된 탓일까.

아니면 화장을 해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내 안목이 문제일까.

어찌 되었든 내가 알던 꼬마 황서연은 완전히 환골탈태한 수준이 되었다.

몇 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참고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이 녀석이 집에 잘 오는 편은 아니다.

여름에는 친구랑 해외로 꽤 오래 여행을 다녀왔고 얼마 전에 추석을 맞아 내려왔으나 그때는 내가 서울에 있었다.

“뭡니까? 저 알아요?”

그때 황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가득했다.

하긴 낯선 남자가 옆에 서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오해할만했다.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느그 아부지 오풍리 살제?!

내가 인마, 느그 아부지랑 인마.

사우나도 같이 가고, 어! 할 거 다 해쓰.

“서운하네, 나는 한 번에 알아보겠는데.”

“뉘신 지 저어언혀 모르겠는데요.”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를 겁니다.”

아놔, 스토커 취급하는 거냐.

어릴 적에 온종일 나만 따라다니며 스토커 짓을 하던 게 누구였더라.

그때 확 경찰을 부를 걸 그랬네.

하지만 정색하고 있던 서연의 표정은 갑자기 급변하더니 입을 가리며 소리죽여 웃었다.

“푸흡!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 당한 거 맞지?

이게 어릴 때는 곰 같더니,

이제는 여우짓도 할 줄 아네.

부끄럼 많고 순수했던 산골 소녀가 서울에 오더니 깍쟁이가 다 됐어.

“처음부터 알아본 거였어?”

“아니, 3년 전에 봤잖아요. 그 사이에 역변해봤자 얼마나 역변했겠어요.”

“그거 설마 나 군대 다녀오더니 역변했다고 돌려서 까는 거는 아니지?”

“큭큭, 절대 아니에요.”

웃으면서 대답하지 마.

오히려 그게 더 기분 나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대화를 하던 우리는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되지 않게 잠시 밖에 있는 자판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그게 가장 궁금했다.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 인연이면··· 아니다 말을 말자.

훠이훠이 마귀야 물러가라.

“초대받아서 왔죠.”

“지철이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

“오빠보단 윤아 언니랑 친하죠.”

“내가 아는 그 유나 누나?”

“맞아요. 예전에 아저씨랑 같이 덕월 계곡에 놀러 왔을 때 친해져서 제가 서울에 온 이후부터 종종 만나고 있어요.”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이 친하다고 해도 형의 사진전과는 연결이 안 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뜻밖이었다.

남자친구 전시회에 사람이 적을까 봐 자신에게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며 유리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남자친구라니 무슨 말이야?”

“윤아 언니랑 지철 오빠, 올봄부터 둘이 사귀잖아요.”

“역시 내 짐작이 맞긴 했네.”

“설마요, 눈빛 흔들리는 거 보니 전혀 모르던 눈치였는데요.”

의심은 되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둘이 잘 되길 항상 응원했으나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일이다.

옆에서 떠들어봤자 될 일도 안 된다.

그래서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지.

“집에 좀 자주 내려와. 이장님이랑 이모님이 엄청 서운해하시더라.”

품에서 떠나보낸 자식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들, 딸들이 그렇듯 자유를 찾은 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새장 밖의 세상은 드넓었다.

나도 이미 경험해본 일이다.

하지만 그 기분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지금은 자유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얼마 못 가서 외로움으로 바뀔 때가 온다.

물론, 나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자유분방한 우리 부모님은 나를 방목해서 키우는 염소처럼 키우셨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은 정말 쉽게 육아를 하셨단 말이지.

어릴 때부터 뭐든 알아서 해야 했다.

입대를 할 때도 혼자 했던 나였다.

그나마 제대 전에 면회를 와주셨는데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강원도 산골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강하게 키워주신 덕분인가.

“안 그래도 조만간 갈 생각이에요.”

“잘 생각했어.”

“엄마 이야기 들어보니 요즘 오저당 장난 아니게 잘나가던데요. 할 만해요?”

“이모님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계셔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거지.”

“우리 엄마 너무 부려먹지 마요.”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직원 뽑았어.”

대화는 오저당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처럼 만난 우리 사이에서 할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생각보다 서연이는 오저당에 많은 애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종 들리던 나와는 조금 달랐다.

녀석은 20년 가까이 오풍리에 살며 오저당의 역사를 바라보며 자랐다.

어쩌면 나보다 오저당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 아닐까. 그래서인지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었다.

“나중에 세금 두들겨 맞고 울지 말고 지금부터 잘 챙겨요. 막걸리는 몰라도 벽향주는 주세율이 생각보다 엄청 세요.”

아··· 맞다.

얘 전공이 회계였지.

나도 나름 경영학도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회계원리와 재무관리 모두 2학년에 배우는 전공 기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나는 당연히 배우지 못했다.

“그래봤자 맥주나 증류주의 절반도 안 되잖아. 세금 관련해서는 태백에 있는 회계사무소에 맡기기로 했어.”

더구나 벽향주는 전통주다.

일반 주류 면허를 가진 다른 술과 달리 50% 세금 감면도 받고 있었다.

대신 삼척과 태백 등에서 생산되는 쌀로만 빚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서연은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봤다.

“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요.”

“모처럼 봐서 반가웠어.”

“그냥 이렇게 가요? 설마 연락처도 안 줄 생각이에요?”

“그게 필요해?”

“급한 일이 있을 때 집에 연락이 안 되면 연락할 곳이 있으면 좋잖아요.”

핑계도 참 좋다.

내가 가진 명함은 두 가지다.

그중에서 뭘 꺼내야 할까.

[오저당 사장 주도찬]

[오저당 디스틸러 주도찬]

보통은 사장 명함을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동종 업계에 있는 이들을 만날 때는 디스틸러 명함을 사용했다.

다들 내 나이만 보고 술을 빚는 기술자는 따로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명함은 생각도 안 했다.

이것도 미루다가 얼마 전에 만들었다.

요즘 시청 공무원이나 다른 관계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자주 생기고 있었다.

한두 번은 그냥 넘겼지만,

그래도 명함은 반드시 필요했다.

요즘 누가 명함을 쓰냐고 생각했었는데 이쪽 동네에서는 사업하는 사람이 명함조차 없으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중에서 나는 사장 명함을 꺼냈다.

“오··· 사장님! 크크큭.”

“네가 입사하면 재무 관리 하는 CFO도 줄 수 있는데 관심 있어?”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꿈은 오저당이 품기에는 조금 더 크거든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

당연히 농담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서연이가 고향에 있는 오저당에 취업하면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딸바보인 우리 이장님과 이모님은 좋아하실 거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더 많이 배워야 하는 학생이다.

당장은 입사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가 거절이다. 지금은 경영 지원보다는 생산 쪽이 훨씬 더 시급했다.

그날의 만남은 거기서 끝났다.

전시회장을 나가는 서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이 모든 일은 향이의 일탈 때문에 생긴 일이라 정신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 어딘가로 사라지기만 해봐라.

“향이 너 나 좀 보자.”

*

삼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나는 아침 일찍 삼송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을 너무 일찍 잡을 것일까.

모처럼 겪은 출근길은 상당히 피곤했다.

그나마 서울을 벗어나는 방향이라 다행이지 반대 방향은 장난 아니었다.

아··· 적응하기 힘들어.

도시 생활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복작거리는 것은 별로였다.

군대를 다녀오고 겨우 몇 개월 삼척에 있었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 살 때도,

우리 집은 한적한 곳에 있었다.

부모님이 이민을 가기 전에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도 일산 변두리였다.

그러니 실제로 서울에서 산 것은 대학교 1학년 때가 전부였다.

“생각보다 그리 멀진 않네.”

삼송역 내려서 조금 걷자,

내가 찾는 ‘현송주류’가 보였다.

건물 앞에 제법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어서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주류 상사가 아니랄까 봐 심지어 술병과 와인잔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에 서울까지 올라온 진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와 약속한 미팅 때문이다.

담당자가 직접 오저당까지 오겠다고 했으나 그걸 거절한 것은 나였다.

어떤 회사인지 직접 보고 싶었다.

오늘 계약은 무척 중요하다.

공급 계약은 각 지역의 여러 주류 상사와 각각 맺을 수 있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강원도 지역 외에 술을 내보내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서울공화국이라 불리는 나라다.

인구 대부분이 밀집되어 있는 수도권 지역의 기대 매출은 상당히 컸다.

수도권에 있는 여러 주류 상사 중에 이곳과 약속을 잡은 것은 삼촌이 해준 말 때문이다.

불법 리베이트 없는 정직한 곳.

바를 운영하며 삼촌은 여러 주류 상사와 거래를 해봤지만, 가장 깔끔하고 정상적인 영업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지금은 주류 리베이트가 불법이 되었으나 예전에는 온갖 일이 있었단다.

“혹시 오저당에서 오신 주 사장님 맞으신가요?”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딱 봐도 현송 주류 직원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조끼 가슴팍에 현송이란 회사명이 박혀 있으니 가능한 확신이다.

손에 담배를 쥐고 있는 것이 흡연을 하려고 나왔다가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맞습니다. 혹시 저랑 통화하셨던···.”

“제가 권택경 대리입니다.”

“반갑습니다. 주도찬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악수를 한 뒤.

권택경 대리는 나를 안내하려고 했다.

그가 다급하게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끄려고 하자 손을 뻗어 만류했다.

아깝게 장초를 그렇게 버리면 쓰나.

“급하지 않으니 피우시던 담배 다 피우고 천천히 들어가셔도 됩니다.”

“하하. 매년 끊는다고 다짐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사장님은 담배 안 태우시나 봐요?”

“어릴 적에 호기심이 생겨서 몇 번 피워봤는데 몸에 잘 안 맞아서요.”

내가 어릴 적의 일을 운운하자,

권택경 대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과연 그 어린 시절이 언제일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충 내 나이를 아는 눈치였다.

“혹시 어반 스카이도 담당하시나요?”

“아니요. 매입을 담당해서 사장님 같은 생산 업체분들하고 일하는 게 업무의 대부분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하지만 어반의 주기혁 사장님을 모르는 거는 아니죠. 우리 사장님의 절친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만나시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도 자주 놀러 온다고 했다.

그래도 인기가 아예 없진 않았다.

삼촌이 오는 날은 여기 사장님도 조기 퇴근하고 둘이서 낮술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니 다들 반기는 거겠지.

“아!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네요. 오늘 미팅에 저희 사장님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자리에 사장님도 나오시는 편인가요?”

“아니요. 정말 드문 편이죠.”

아마 삼촌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 술을 맡길 업체의 대표와 미리 안면을 터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이곳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조건부터 봐야지.

권택경 대리는 급하게 담배를 마저 태우고 나를 안으로 안내해줬다.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창고는 이곳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했다.

내부를 소개해주던 그는 문자를 확인하더니 내게 양해를 구했다.

함께 참석하기로 했던 현송주류의 사장님이 조금 늦는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원래 미팅하기로 약속한 시간 내에 도착한다니 상관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실 것부터 준비해드릴 테니 저기 회의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권택경 대리가 탕비실을 간 사이.

그가 안내해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곧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여기가 정말 회의실이 맞나 의심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회의실 안쪽에 놓인 술병들 때문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선반 위에 전 세계에서 빚은 온갖 술이 다 모여 있었다.

국내 생산되는 소주와 전통주부터 시작해서 위스키 같은 양주도 있었다.

어지간한 술은 다 있는 것 같았다.

제법 많은 종류의 술을 파는 삼촌의 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수백만 원이 넘는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경매장에서 이천 만 원까지 가격이 오른 글렌피딕 40년도 보였다.

내가 모든 술을 다 알진 못하지만,

글렌피딕 이야기는 삼촌의 바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저게 40년이라 그 정도지 50년은 몇 배나 더 비싸다.

50년이 된 술이면 삼촌조차 아직 태어나지 않은 1970년 이전에 빚은 술이다.

향이도 미쳐 날뛰었다.

녀석은 술 앞에서 정신줄을 놓았다.

심지어 고가의 글렌피딕 병 앞에서 유리에 얼굴을 비비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 향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았다.

‘와··· 천국이 이곳에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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