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y 테킬라 (2)
멕시코 특유의 모자 솜브레로.
멋들어지게 자라난 콧수염과 판초까지.
모든 것이 멕시코다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허리춤에는 작은 총을 차고 있었고 파이프 담배도 입에 물고 있었다.
전형적인 마초 같았다.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운 모습을 하고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시니컬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게 있었다.
주변에 다른 요정이 전혀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도 없는 증류소에서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은 상당히 외로워 보였다.
“다른 요정은 왜 안 보이는 거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이곳에 다른 요정이 있다면 제가 느꼈을 거예요.]
“내가 말을 걸면 대화가 가능할까?”
[아니요. 성장하기 전인 것 같아요.]
과거 향이가 말을 못 하던 시절.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대화가 불가능할 뿐이지 요정끼리는 소통이 가능하다며 곧장 판초 요정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녀석은 총부터 꺼냈다.
혹시라도 향이가 맞는 거는 아닌가 걱정되는 마음에 다가서려 했으나 이내 자신과 같은 요정인 것을 알아보았다.
둘의 모습은 워낙 다른 탓에 이질감이 장난 아니었다.
조선시대 곤룡포와 멕시코의 판초.
시대와 대륙을 뛰어넘는 패션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판초 요정에게서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곧 두 요정은 손짓과 발짓까지 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금방 끝날 대화는 아닌 것 같네.”
나는 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 앞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은 내가 봐도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이다.
잠시 둘만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들어가니 향이가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곳을 운영하던 할아버지가 아픈 뒤로 술을 거의 빚지 않아서 생긴 일이랍니다.]
“그럼 우리 오저당도 술을 빚는 양이 줄어들면 요정의 숫자가 줄어드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향이는 소멸이란 단어까지 사용했다.
계속해서 술을 빚지 않으면 이미 사라진 다른 술의 요정처럼 판초 요정도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데리고 가자.”
[불가능한 건 아닌데 절대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이네요. 그리고 저 친구를 데리고 가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무슨 문제가 있는데?”
[테킬라 중독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다른 술도 좋아하나 전통주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거와 같아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하긴 오저당을 길게 벗어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지난번에 미국에 있을 때는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너는 괜찮은 거야?”
[한두 달 정도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거는 아예 이주했을 때의 문제니까요.]
“주기적으로 테킬라를 사주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거지?”
[술을 빚고 숙성하는 단계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하긴 그런 식이면 대량으로 술을 사들여서 요정을 키울 수도 있었겠지.
결국에는 테킬라를 빚어야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건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술이라면 어떻게 해볼 텐데 한국에서 테킬라를 빚을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는 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향이는 평소에 부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녀석이 원하는 게 뭐든지 들어줄 생각이었다. 요정들 덕분에 오저당이 지금까지 성장한 것이다.
오저당이 휘청거릴 정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뭐든 들어줘야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해보라고 하자 향이는 어렵게 입을 뗐다.
[저 녀석을 살려주세요.]
향이의 간절함은 충분히 느껴졌다.
녀석과 술의 요정들 입장에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향이는 해결책을 내놨다.
[여기를 정상화시켜 주시기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그거면 되는 거야?”
[지속적으로 술을 빚기만 하더라도 일반 요정이 다시 생겨날 거예요.]
다른 요정이 모두 사라진 이유가 숙성 중인 술이 없는 탓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증류소의 저장고는 모두 비어있는 상태였다. 테킬라의 특성 때문에 더 심각해진 것 같았다.
애초에 술을 자주 빚지 못하는 상태인데 대부분의 테킬라는 오래 숙성한 것보다 몇 개월쯤 숙성한 등급이 많이 팔린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흐음··· 어쩌면 괜찮을지도.’
여길 인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원할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오래된 증류소인데다가 상태가 썩 좋지 않기에 많은 돈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것은 이곳이 지닌 150년의 전통이었다.
이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다.
무수하게 많은 테킬라 증류소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역사다.
사실 여부만 확실하게 인증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마케팅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서자,
처음 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보였다.
호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호르헤가 다가와서 그분이 레오넬 할아버지라고 알려줬다.
“아까 듣기로는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예전부터 심장이 자주 말썽이셨어요.”
“이런···.”
“가능하면 수술을 받게 해드리고 싶은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쉽지 않네요.”
심장이라 수술비가 상당한 편이라고 했다. 어지간히 잘 사는 이가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을 금액이었다.
“다른 가족은 없으신가요?”
“안타깝게도 다들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럼 혼자 사시겠네요?”
“지금은 딱히 돌봐드릴 사람이 없어서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살피고 있죠.”
물려줄 후계자는 없으신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이곳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운명이란 의미였다.
그쯤에서 나는 레오넬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당연히 통역이 필요했기에 호세도 함께 들어왔다.
처음에는 간단한 이야기만 했다.
대부분은 테킬라에 관련된 내용이었고 아가베도 대화 주제 중의 하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리자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세뇨르. 앞으로 이곳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물려줄 사람을 찾아봤으나 쉽진 않네. 마음 같아서는 호세나 호르헤 중의 하나였으면 좋겠는데···.”
“저는 힘들 것 같아요.”
호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지금 한국에서 받는 월급을 생각하면 그런 결정은 쉽지 않겠지.
“그렇다면 저에게 이곳을 파시죠.”
나는 그쯤에서 이곳을 인수하려는 계획을 밝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레오넬보다 더 놀란 것은 호세였다.
“사장님. 여길 사서 뭘 어쩌시려고요?”
“증류소를 사서 뭘 하겠어. 당연히 아이레스 테킬라를 빚어야지.”
“사장님이 직접 하실 것은 아닐 테니 설마 제가 여기 남아야 하는 건가요?”
남고 싶다고 해도 말릴 생각이었다.
대신 나는 이곳을 맡길 사람으로 호르헤를 염두에 두고 있는 중이었다.
레오넬과 함께 테킬라를 빚은 경험도 있고 이곳에서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 이야기를 하자 호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형한테 여길 맡긴다고요?”
“싫으면 네가 여기 남아.”
“자꾸 왜 그러세요. 저는 다시 오저당으로 갈래요. 아직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그러면 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
레오넬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호르헤에게 운영을 맡길 거라고 하자 상당히 관심을 보였다.
본인 스스로 아까 말했듯이 호르헤에게 물려줄까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넘길 거라면 돈을 받고 넘기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지 않냐며 설득을 하자 마음이 동한 것 같았다.
“어르신 가문이 쌓은 전통은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멋지게 키워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이게 전부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내용이라 그 이상 약속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레오넬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남은 문제는 이제 두 가지였다.
얼마에 이곳을 팔 거냐는 것과 과연 호르헤가 맡아줄 것이냐의 문제였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레오넬은 증류소와 아이레스 테킬라 모두를 12만 달러에 넘기기로 했다.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내심 25만 달러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설비라고 할 것이 거의 없었고 땅값도 싸서 가능한 금액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금액 중에 거의 대부분이 이곳의 역사와 레시피 가격이라고 봐도 되었다.
한화로 약 1억 5천만 원.
오저당의 열흘 치 순수익이다.
부담을 느낄 수준의 금액은 아니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모아 놓은 돈만 10억쯤 되는 터라 거기서 빼서 쓰면 된다.
“이제 호르헤만 설득하면 되겠네.”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저당 기준으로 월급을 주시면 거부할 수 없거든요. 멕시코의 현실이 그래요.”
아하··· 그렇구나.
단번에 설득이 가능한 대답이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한 달에 40만 원도 벌지 못한다고 들었다.
반면에 오저당에서는 막내도 실수령액이 최소 230만 원 이상은 되었다.
실제로 호르헤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한국 기준으로 월급을 준다고 하자 다른 조건은 듣지도 않고 곧장 오케이를 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한 가지 있었다.
그 말을 꺼내자 호세와 호르헤 모두가 긴장했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아이레스를 인수하면 호세 가족이 키우는 최상급의 피냐를 공급해줘.”
“어휴! 그건 당연하죠.”
“원래부터 이곳에 공급하던 것들은 최상급이었어요.”
“그럼 오늘 당장 계약서를 쓸까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라니는 서둘러서 계약하자며 나섰다.
녀석이 보기에도 12만 달러에 이곳을 인수하는 것은 남는 장사로 보인 걸까.
그게 아니면 배고파서 그런 걸까.
하여튼 변호사를 구해서 계약을 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계약 내용은 간단했으나 스페인어로 작성된 터라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라니도 곁에서 도와주었다.
당연히 영문 계약서도 작성을 했는데 입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단순하게 계좌 이체로 처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OGD 멕시코 설립은 호세 네가 남아서 처리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왕에 멕시코의 증류소를 샀으니,
나는 이곳에 OGD 멕시코라는 이름으로 지사를 설립할 생각이었다. 단순하게 술만 빚는 것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해외 생산인 터라 무역도 겸해야 했다.
여기서 빚은 술은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 같은 곳으로 수출해야지 멕시코 내에서 소비될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오저당이 빚은 술을 멕시코로 들여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많이 팔릴 거라 생각되진 않았으나 가능성을 열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아이레스의 생산이 정상화가 된 이후에 차근차근 진행을 할 생각이다.
그전까지는 직원도 뽑고 노후화된 설비도 새롭게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요. 여기는 한국과 달리 서류 처리가 늦거든요.”
“그동안은 내가 대신 오풍주를 빚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뭐··· 잠자는 시간을 조금 더 줄이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시면 더 조급해지잖아요.”
나는 그럴 필요 없다며 웃었다.
확실하게 일 처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호세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적어도 녀석이라면 차일피일 일 처리를 미루며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호르헤도 호세처럼 한국의 핏줄인 탓인지 일 처리가 느린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빚는 데킬라는 어디로 가져가실 건가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현재 아이레스가 몇 병이나 남아 있지?”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소매점으로 넘겨서 남은 수량은 거의 없을 거예요.”
“아네호까지는 필요 없고 레포사도 등급으로 열 박스 정도만 구하고 싶은데.”
“최대한 맞춰볼게요.”
나도 계획이란 게 있었다.
무턱대고 계약을 진행한 것은 아니다.
요정을 살리자는 향이와의 약속과는 별개로 이걸 가지고 할 게 있었다.
어디다 쓸 거냐는 호세의 질문에 나는 브루클린 주류 박람회를 언급했다.
테킬라의 최대 소비국인 미국에 소개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일단 거기만 뚫으면 투자한 돈 정도는 금방 회수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 아이레스도 오저당의 술이니 당연히 주류 박람회에 가지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