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98화 (98/254)

더는 우연이 아니다 (2)

다음 날 이른 새벽.

나태영은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달리는 내내 그는 어제 마셨던 오풍주라는 술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새벽부터 술이 땡기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상이 강렬했었다.

그것도 오저당의 술이다.

어제 잠들기 전에 찾아보니 오풍주도 이제 막 시중에 내놓은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벽향주 못지않게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되었다.

개인적인 관심이 생겼다.

도대체 오저당에 무슨 일이 있었지?

얼핏 들은 소문에 의하면 친척이 물려받았다는데 젊은 사장이라고 한다.

현재 아는 것은 그것뿐이나 주식을 살 수 있다면 전 재산을 올인했을 것이다.

“문제는 가격인데···.”

막걸리라는 인식 때문일까.

가격이 조금 높은 느낌이 들었다.

만삼천 원이면 다른 양조장의 막걸리를 여섯 병이나 살 수 있으니 내적 갈등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시는 술은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제 그 막걸리를 마신 후에 다른 양조장의 것은 도저히 못 마시겠더라.

잠들기 전에 다른 양조장의 막걸리도 마셔봤는데 마치 페라리를 타다가 20년쯤 된 올드카를 타는 느낌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한적한 도로를 달리자 인천 공항이 멀리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간 게 언제였더라.

이번에 휴가를 받으면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전에 일부터 끝내야겠지.

나태영은 차를 주차하고 서둘러서 공항 안으로 향했다. 슬슬 마스터가 탄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늦었다고 기다리실 분이 아니라 길이 엇갈리기 전에 가야 했다.

마스터 디스틸러 이언 테넌트.

그는 신이 내려준 미각을 가지고 있다.

술을 빚는 능력도 대단하나 그보다 테이스팅에 더 특화된 사람이다.

그러니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매년 품평회에 초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올해는 사고 좀 안 쳤으면 좋겠는데···.”

테넌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졌을 뿐이다. 작년에도 심사를 끝내자마자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중에 그를 발견한 곳은 무려 안동의 양조장이었다.

심사 중에 발견한 술을 어떻게 빚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년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열정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러니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서 거대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까지 오른 것이겠지.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글래스고에서 출발해서 두바이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온 항공편의 승객들이 하나둘 게이트를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언 테넌트의 모습도 보였다.

거대한 체구와 풍성한 하얀 턱수염.

빨간 옷만 입히면 산타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은 상당히 푸근한 분이셨다. 나태영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그에게 다가갔다.

“테넌트 씨.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 년 만에 이렇게 다시 뵙는군요.”

“오오! 미스터 나. 올해도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매년 이날만 기다린다니까요.”

“숙소까지 모실 테니 짐은 저한테 주시죠.”

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자신의 짐은 스스로 챙기겠다는 말에 나태영은 알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테넌트를 몇 번 겪어본 터라 그냥 예의상 해본 말에 불과했다.

매번 같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의 남아로서 한 번은 물어봐야 했다. 둘은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던 중에 테넌트는 심사에 대해 물어봤다.

“올해 저희가 심사할 술이 작년보다 상당히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참가하는 양조장이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좋은 일입니다. 전혀 변함없는 똑같은 술을 매년마다 심사하는 것은 꽤 고달픈 일이거든요. 올해는 어떤 술을 맛볼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그 부분은 나태영도 동의했다.

한해에 새로운 술이 얼마나 나올까.

기껏해야 십여 종 미만이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나마 수제 맥주는 왕성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품평회에서 맥주는 심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맥주 브루어리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는데 방법이 없었다.

품평회의 주관은 엄연히 문체부였고 협회는 그저 진행을 맡았을 뿐이다.

협회에서 마음대로 부문을 추가할 수는 없었고 공무원들은 변화를 싫어했다.

명분이 확실히 있기는 했다.

애초에 전통주의 발전을 위해 계획된 품평회였다. 그때 문득 어제 마셨던 오저당의 오풍주가 떠올랐다.

올해 열리는 품평회는 벽향주와 함께 오풍주가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올해는 특별한 술이 나올 테니 조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평소 하지 않던 호언장담이었다.

나태영의 마음속의 탁주 부문 원픽은 오풍주가 차지한 지 꽤 오래되었다.

아마 수상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테넌트에 비해 미각이 섬세한 것은 아니나 한때 소믈리에를 꿈꿨던 그였다.

더구나 수차례 품평회를 진행하다 보니 오는 감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테넌트는 꽤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아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여기서 제가 말하면 심사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일단은 참겠습니다.”

“심사하는 날만 기다려야겠군요. 작은 힌트라도 줄 수 없을까?”

“그중의 하나는 마스터가 좋아하는 탁주입니다.”

위스키를 빚는 장인이지만,

테넌트는 막걸리를 꽤 좋아했다.

하긴 그가 싫어하는 술이 있기는 할까.

그래도 한국에 올 때마다 막걸리를 빚는 법까지 배웠고 스코틀랜드의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마실 정도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테넌트는 크게 웃었다.

“오호! 기대되는군요.”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품평회가 드디어 시작됐다.

서울 시내의 강당 한 곳을 대관해서 5일 동안 펼쳐지는 긴 여정이었다.

무려 5개 부문의 술을 심사해야 하기 더 이상 일정을 줄일 수는 없었다.

심사 대상이 술이라는 게 문제다.

부문별로 제출된 제품이 많은데 심사 위원들이 심사하기 위해서 조금씩 마셔도 결국에는 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잠시 쉬다 오실 수 있도록 숙소도 대관한 장소 근처에 잡아놨을 정도다.

당연히 나태영은 물론이고,

협회 직원도 모두 총출동을 했다.

시작 전에 준비할 게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행사 전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할 준비는 미리 해와서 다행이었다.

“거기 전광판 다시 한번 테스트할게요.”

“심사 중인 자리에 외부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 여기 선은 절대 넘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넘버별로 제품 진열한 거 맞는지 다시 확인해주세요. 작년처럼 중간에 잘못 섞이면 큰일 납니다.”

고석 과장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나마 나태영 대리는 조금 여유로웠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5일 동안 진행되는 모든 내용을 찍어서 나중에 너튜브에 올릴 예정이다.

하지만 비공개 행사는 아니었다.

사전에 신청한 이들은 품평회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와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품평회에 참가한 업체 관계자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행사의 중심은 품평회지만,

일종의 작은 축제라고 봐도 된다.

야외 주차장에는 술과 안주를 파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각지에서 온 양조장에서 제품을 홍보할 기회였다.

“1시쯤에 구청장님이랑 문체부 고위급이 오신다고 하니까 놓치지 말고 잘 찍어.”

“과장님.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말씀 하신 거 알아요?”

“그랬나? 정신없어 죽을 것 같다.”

“이제 적응하실 때도 됐잖아요.”

“나 대리야, 심사 위원님들 오셨다.”

나태영이 고개를 돌리자,

열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에 다섯은 해외에서 섭외한 유명 디스틸러와 소믈리에였고 나머지 다섯은 국내 전통주 명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전통주 심사를 하는 데 외국인이 왜 필요하냐고 따지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국내의 좁은 시장에서는 한 다리 건너면 어떻게든 얽히게 되어 있다.

오로지 술의 맛으로만 판단할 사람이 필요했고 최근에 K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해외 진출에 청신호가 켜졌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술을 발굴하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실제로 제2회 수상 제품 중의 일부는 해외 수출 계약도 소량이나마 따냈다.

그 업체가 유독 해외 주류 박람회 같은 곳에도 자주 나가기는 했으나 모범 사례로 여길만한 성과였다.

그때 마이크가 켜졌다.

[지금부터 제4회 대한민국 주류 품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첫날인 오늘은 탁주 부문을 심사할 예정이니 참고 바랍니다.]

*

품평회가 시작될 무렵.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이번에 제품을 출품한 양조장에게는 초대장이 왔다. 양조장을 하루 닫아야 했으나 직접 와보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행사 첫날에 온 이유는 오늘 오풍주가 심사받기 때문이었다.

심사 순서는 매년 같았다.

무조건 첫날은 탁주로 시작했다.

다른 술보다 유통 기한이 훨씬 짧으니 하루라도 빨리 시음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제품이 출품되어 제일 치열한 부문이기도 했다.

“우리도 저기 저 사람들처럼 오풍주 가져와서 팔 걸 그랬나?”

행사장 부근에 들어선 수호는 주차장을 채운 여러 양조장의 매대를 부러워했다.

안 그래도 홍보가 절실한 상태인 오풍주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니라고 했다.

“막상 내가 하자고 제안했으면 귀찮다고 투덜거렸을 거면서. 그리고 저거 다 협회에 돈 내고 자리 잡은 거야.”

“품평회에 술을 안 보냈으면 그냥 여기 돌아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싶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만큼 다양한 술이 보였다.

처음 보는 술도 생각보다 많았다.

최근 들어 소규모 양조장이 많이 늘기는 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술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하지만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우리 차례 지나가겠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어차피 블라인드라 지금 무슨 술을 마시고 있는지 알 수 없잖아.”

다 아는 방법이 있어.

우리에게는 향이가 있잖아.

오풍주가 나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녀석이라면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품평회가 시작된 강당으로 들어가니 이미 꽤 많은 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 업계 관계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우리는 술만 빚었지 다른 양조장과 교류를 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이쪽 업계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날이라고 봐도 되겠지.

실제로 관심을 적지 않게 받았다.

목에 건 관계자 임을 밝히는 출입증에 오저당이라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전통주 시장을 뒤흔든 벽향주를 빚은 새로운 오저당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고는 이야기 듣긴 했는데 저렇게 젊은 친구들인 줄은 몰랐네.”

“우리 아들보다 어려 보이잖아. 그런데 둘 중의 누가 돌아가신 주 사장님 손자야?”

“딱 봐도 호리호리한 쪽이잖아.”

하지만 그 관심이 오래가진 않았다.

본격적인 심사가 시작되면서 관계자들의 관심은 모두 심사 위원 쪽으로 쏠렸다.

품평회 진행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순서대로 준비된 술이 제공되면 거기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데 그게 곧장 전광판에 표시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느 양조장의 술인지는 극소수의 행사 계획자밖에 알지 못했다.

심지어 심사하는 이들도 몰랐다.

그저 관능적인 미각과 후각을 이용해 오로지 술에 대한 평가만 할 뿐이었다.

양조장의 규모와 명성 그딴 거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모든 것은 심사가 끝난 후에 공개되는데 그때가 품평회의 하이라이트였다.

그전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집중력 있게 바라보던 수호는 하품을 길게 하며 지루함을 표현했다.

“하아아암, 발표는 언제 나오는 거야?”

“몰라, 오늘 중에 한다고 하더라.”

“작년에는 저녁 늦게 끝났다고 하던데 꼼짝없이 여기 묶여 있어야겠네.”

“차라리 오늘은 서울에서 자고 내일 새벽 일찍 내려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장시간 운전하는 것보다 그게 조금 더 편할 것 같았다.

수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여기서 6시 이전에 끝나도 서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막힐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호세 그 녀석 새벽잠이 많아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

“너도 처음에는 그랬어. 이모님에게 전화드려서 깨워달라고 부탁드리면 돼.”

“그러면 안심이지. 그런데 점수가 왜 이렇게 짠 느낌이지?”

수호는 전광판을 보며 말했다.

거기에 나오는 숫자는 높지 않았다.

심사 위원 한 사람당 100점까지 줄 수 있는데 대부분 평균 70점을 넘지 못했다.

아무리 높아야 75점 언저리였다.

80점을 넘는 탁주는 아직 없었다.

제품에 문제 있었는지 심지어 40점을 넘지 못한 탁주도 나올 정도였다.

저걸 내놓은 양조장은 나중에 평점 상위 제품만 제품명이 공개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오후 3시가 살짝 넘어 나른해질 때.

향이가 다급하게 날아와서 내 손을 살포시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심사 위원 쪽으로 술잔이 옮겨지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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