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99화 (99/254)

더는 우연이 아니다 (3)

심사가 몇 시간씩 이어지자,

이언 테넌트도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덧 술기운도 살짝 돌기 시작했다.

그나마 점심을 먹은 후에 잠시 산책해서 다행이지 정해진 일정을 마치기 전에 뻗을뻔했다.

그만큼 올해 심사는 힘들었다.

작년보다 탁주의 양이 부쩍 늘었다.

다양한 술을 맛보고 심사하는 것은 좋으나 주량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드물게 마음에 드는 술을 발견해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심사고 뭐고 계속 그것만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수준의 술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힘드시면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옆에서 카메라를 쥐고 지켜보고 있던 나태영이 제안을 했지만, 테넌트는 남은 탁주의 숫자를 체크하고는 거절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려면 빠듯했다.

다행히 그런 그의 생각에 다른 심사 위원도 동의했다.

나태영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테넌트는 그가 말했던 술이 언제쯤 나올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게 그를 버티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지금으로서는 더 취해서 혀가 둔해지기 전에 나오길 바랐다.

품평회의 처음과 끝.

그 순서에서 생기는 차이가 있다.

가장 처음은 평점의 기준이 되기에 아주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고 반대로 마지막은 혀가 둔해져서 손해를 본다.

불공평한 일이라 여길 수도 있는 일이다.

품평회 순서는 추첨제라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순서는 E21 탁주입니다.”

진행 요원이 탁주를 앞에 내려놓자 심사 위원들은 기계처럼 잔을 들었다.

향을 한번 맡고 살짝 머금을 수 있을 정도로 약간의 술을 마셨는데 거기까지는 테넌트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크게 당황했다.

분명 입에 술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꿀꺽 삼킨 것이었다.

더구나 그 목 넘김이 너무나 부드러워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풍미와 감미로움이 느껴지는 탁주였다. 그제야 테넌트는 미스터 나가 해줬던 말이 뭔지 알아챘다.

특별한 탁주가 있을 거라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Oh! My gosh. 이건 도대체 뭐지.”

저절로 터진 감탄사였다.

그런 그의 반응은 나태영의 카메라에도 그대로 담겼다. 이미 그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회에서 품평 순서와 넘버링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의 하나가 그였다.

나머지 심사 위원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확실하게 다른 탁주가 나오자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태영은 왜 그들이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허어··· 이건 도대체 뭐지.”

“탁도가 안 좋다고 하기에는 목 넘김이 깔끔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느낌인데 이걸 어떻게 평가하죠.”

“도대체 이건 어디 술도가의 것일까요.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하네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이런 게···.”

외국인 심사 위원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드라이한 와인과 비교하며 주어진 잔에 채워진 오풍주를 홀짝였다.

일부 위원들은 벌써 잔을 모두 비운 뒤에 아쉽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그 순간에 테넌트는 잠시 고민했다.

남은 술이 있으면 챙겨달라고 할까.

아니면 이 미친 양조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서 지금 당장 달려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술을 만드는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말이 안 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걸 마시는 순간에 적어도 1년 이상 숙성한 술이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여러 술도가를 다녀봤으나 탁주를 그렇게 숙성하는 게 가능하단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흠흠! 위원님들?”

오죽하면 고석 과장이 지연되고 있는 채점을 해달라고 상기시킬 정도였다.

서둘러 점수를 매긴 테넌트는 다른 위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과연 어떤 점수를 냈을지 궁금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점수가 공개되자 발칵 뒤집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높은 수치가 전광판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최저점이 89점이고 최고점은 무려 98점이었는데 평균은 92점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가장 높은 점수는 78점이니 무려 14점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그 점수는 고쳐지지 않았다.

“미쳤다. 평균이 92점이라고?”

“82점도 아니고 92점이 말이 되나. 숫자를 잘못 적은 거는 아니겠지.”

“화면 좌측에 숫자들 안 보여? 위원들이 적은 점수들 평균 내면 계산 나오잖아.”

“도대체 어디에서 빚은 술이야?”

품평회가 시작된 이후로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 대부분 몇 점 차이로 대상이 정해질 정도로 박빙이었다.

보통 75점만 넘어도 다섯 점까지 선정되는 최우수상이나 최소한 우수상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규격 외의 술이 나타났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품평회에 내놓지 않았던 술일 가능성이 컸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도대체 어느 양조장의 술인지 나름대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설마, 우리 술인가?”

수호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녀석도 사람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새롭게 출품한 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당연히 오풍주를 떠올렸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몇 명은 벌써 오저당을 후보로 올려놓고 있었다.

여러 조건에 들어맞기는 했다.

하지만 수호에게 진실을 알리진 않았다.

미리 알려줘서 수호의 기쁨을 뺏긴 싫었고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막판에 제품명이 공개되며 느끼는 짜릿한 기분은 나 대신 너라도 느껴라.

“그건 모르지.”

“제발 우리 술이었으면 좋겠다.”

“결과 발표 전까지 일단은 기다려보자.”

이미 수상은 확정되었다.

그 점수를 넘는 게 있기나 하겠어.

하지만 뒤집힐 가능성이 있기에 대상을 우리가 가져갈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미리 김칫국을 마시진 말자고.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떨렸다.

술을 빚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언제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삼촌에게 첫 벽향주를 가져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최소한의 기준만 통과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적당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국내 최고의 술을 가리는 장소다.

여기서 수상한다는 것은 탁주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다는 의미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어.’

기대를 전혀 안 하고 오진 않았다.

품평회에서 정한 룰이 있기 때문이다.

제1회부터 제3회까지 이곳에서 대상을 수상한 탁주는 심사에서 제외된다.

대상을 수상하면 최소 4년까지는 다시 주류 품평회에 출품할 수 없었다.

뛰어난 술이 있더라도 연속으로 수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강력한 경쟁 제품과 겨루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확률의 문제였다.

“배고프지 않냐?”

이제 볼 거는 다 봤다.

결과만 기다리면 될 뿐이다.

그쯤 되자 슬슬 허기가 밀려왔다.

생각해 보니 계속 굶고 있는 중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잠시 들린 휴게소에서 핫바 하나씩 먹은 게 전부였다.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아까부터 배에서 계속 아우성 중이다.”

“그 정도였으면 말을 하지.”

“조금 전까지 너 화장실도 안 갔잖아. 절대 그 자리에서 안 움직일 기세였거든.”

“일단 나가서 뭐라도 먹자.”

행사가 진행 중인 강당을 나서자,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대낮부터 각지에서 생산된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협회에서 진행 중인 테이스터 메뉴였다.

지난해 수상한 여섯 종류의 탁주.

그걸 하나의 메뉴로 묶어서 팔고 있었다.

각각의 양은 종이컵 반 잔 정도이나 어떤 맛인지 살펴보기는 좋았다.

무엇보다 향이의 호기심이 강했다.

좋아! 오늘은 내가 쏜다.

아까 향이에게 부탁한 일도 있었기에 수호와 함께 두 개의 세트를 주문했다.

하지만 정작 술은 안 마시고 앞에 놓은 채로 마른안주만 먹고 있으니 수호가 이상하게 봤다.

“뭐하냐?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제발 수상하게 해달라고 치성드리고 있는 중이야.”

“나도 같이 빌어줄까?”

“필요 없어. 너는 그냥 술이나 마셔.”

우리 향이도 많이 마셔.

이런 복덩이가 또 어디 있을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현송 주류의 사장님처럼 컬렉션을 만들어줄게.

열심히 일하는 만큼 이 세상 모든 술을 마셔 보는 Flex도 필요하지.

“여기서 3시간 정도 더 버텨야겠지?”

“그 정도는 걸릴 것 같아. 아직 심사할 양이 꽤 많이 남아 있었잖아.”

“그럼 일단 마시자.”

시간도 넉넉하겠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마냥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양한 술을 모아 놓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지역 탁주 상당수는 온라인 판매도 하지 않고 있다.

이걸 마시겠다고 찾아다니며 전국을 돌아다니면 보름 이상은 걸릴 것이다.

간만에 여유를 느끼며 우리는 지난해 수상한 탁주 중에 가장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마신 대대포가 가장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벌꿀이 들어가서 그런지 달곰함도 조금 다른 것 같아.”

“그것도 좋지. 내 원픽은 언제나처럼 당진의 백련. 목 넘김이 순두부처럼 확실히 부드럽고 깔끔해서 좋아.”

“하긴 너 그거 엄청 좋아했지.”

“그래도 우리 것에 비하면··· 알지?”

뒷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관계자가 있을지 모른다.

당연히 수호도 나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가 빚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소비자라도 우리 술을 사서 마실 것 같았다.

한동안 시간을 때운 뒤.

5시 무렵이 되자 다시 돌아갔다.

그맘때가 되니 심사도 거의 막바지였다.

혹시나 오풍주를 뛰어넘은 것이 있지 않을까 살펴보았으나 역시나 없었다.

여전히 우리의 술이 최고점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1위와 2위의 차이가 엄청나네.”

“그래도 83점이잖아. 작년이면 저 점수로 대상까지 받았을 거야.”

“설마 우리가 83점인 거는 아닐까. 제발 92점이 우리 오풍주여야 하는데.”

“최종 발표 시작하려나 보다.”

모든 심사를 마친 뒤.

행사 진행 요원이 주변을 정리했다.

올해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심사위원장을 대신해서 협회장이 했다.

배가 볼록 튀어나온 중년의 남성은 마이크 앞에서 우수상 5점부터 하나씩 발표를 시작했다.

그 순간의 분위기는 상반되었다.

너무 일찍 불렸다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기쁨에 못 이겨 환호하며 방방 뛰는 술도가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우리도 곧 저러겠지?

그렇게 우수상을 시작으로 최우수상 5점까지 호명했는데 여전히 오풍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수호는 다리를 떨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제발···.”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상.

대박이냐 쪽박이냐의 갈림길이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데도 쫄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향이가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됐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최종 심사 결과 평균 92점으로 올해의 탁주 부문 대상은··· 오저당의 오풍주가 차지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협회장의 발표가 끝나는 순간.

수호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와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는데 그 순간만큼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와씨, 우리가 해냈어!”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고 이 순간에 느껴지는 기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벽향주에 이어서 오풍주도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판매되는 탁주에서 전국으로 한 발자국 내디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 결심했다. 복학이고 뭐고 이제 그딴 거 안 할 거야. 이제는 오저당에 내 뼈를 묻을 생각이니 말리지 마.”

“누구 마음대로 뼈를 묻어?”

“이미 되돌리긴 늦었어.”

수호의 결심은 확고했다.

하긴 우리 손으로 빚어낸 오풍주다.

충분히 계기가 될만한 사유였다.

하지만 그 기쁨을 우리끼리 누리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던데. 오늘 출품한 오풍주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겁니까?”

“혹시 지금 발주 가능한가요?”

“부산의 거성 주류입니다. 조만간 한 번 찾아뵐 테니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울산 면허를 가진 기린 주류입니다. 저희한테도 시간을···.”

온갖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 중에는 주류 상사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상을 받은 우리에게 일단 명함부터 내밀었다.

당연히 그 명함은 다 받아놨다.

1, 2 순위인 태백과 현송의 공급이 우선이나 적어도 광역시에 있는 주류 상사와 연이 닿아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다.

진짜 대박은 며칠 뒤에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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