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22화 (122/254)

아메리칸 드림 (1)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향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가장 먼저 뭐부터 물어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 향이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향이가 맞는 거는 확실하지?”

[당연하죠. 제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계속 향이라고 불러도 돼?”

[저게 붙여주신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드니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런데 저는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마땅한 게 없었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도찬 씨···도 조금 아니잖아. 그렇다고 주인님 같은 단어도 적절하진 않았기에 고민됐다.

그러자 향이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마스터는 어떤가요?]

“그게 나을 것 같긴 하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부를게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마스터께서 짐작하신 대로 술을 빚는 양이 얼마나 되냐에 따라 성장을 할 수 있는 한계치가 늘어난답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긴 했다.

하지만 무작정 늘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술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바오 양조장에 있던 요정도 그런 이유로 생겨났고 술에 문제가 생기자 쓰러졌던 거라고 향이가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한 가지씩 궁금했던 것을 풀던 중에 향이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왜 그런가 봤더니 직원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쯤에서 향이를 놓아주고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지금은 출근한 직원들이 우선이었다.

오늘 출고하는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자진해서 새벽 7시에 출근한 이들이었다.

일찍 출근한 만큼 오후에 빨리 퇴근시킬 생각이나 그렇다고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파티를 시작해볼까요?”

호세는 음악부터 크게 틀었다.

리듬감이 넘치는 라틴 음악이었다.

그러자 조택훈은 활기찬 느낌이 싫지 않았는지 웃으며 설비의 전원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할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저장고에 가득 찬 벽향주를 병입하고 박스에 담아서 주류 상사에서 보낸 화물차에 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일은 자동화된 설비에서 처리를 해주나 공병을 채워주고 완성된 벽향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최소한의 QC 작업도 없이 그냥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빼곡하게 나열된 병들이 움직였다.

줄지어 움직이는 그 모습은 호세가 틀은 음악 때문인지 꽤 경쾌하게 느껴졌다.

그걸 본 수호는 지금껏 수작업으로 일을 하던 게 떠올랐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허! 확실히 빠르기는 하다.”

“지금이라도 퍼플 라벨이 아니라 이쪽 화이트 라벨로 옮기고 싶어?”

“에이, 그건 아니지. 급이 다르잖아.”

수호는 퍼플 라벨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량 생산을 하는 화이트 라벨과 달리 진짜 벽향주는 자신이 만드는 퍼플 라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녀석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퍼플 라벨은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해도 될 정도로 가치 있게 만들어줄게.”

“기왕이면 그분들도 광고 모델로 좀···.”

수호가 바라는 광고 모델은 보라색을 상징처럼 쓰는 라니의 최애 아이돌이다.

예전에는 국민 여동생 배수인이었는데 그 사이에 눈이 더 높아진 것 같았다.

“광고 한 편 찍을 때마다 받는 돈이 얼마인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걸.”

“얼마인데?”

“라니가 최소 수십억이라고 하더라.”

국내는 물론이고 글로벌 기업들이 모델로 세우는 아이돌이라 한 해 동안 올리는 광고 수입만 거의 천억 단위다.

“허얼··· 우리 한 분기 매출을 그냥 가져다가 바쳐도 힘들 정도네.”

“걸어 다니는 기업 수준이지.”

“도찬아, 우리도 술을 빚지 말고 아이돌이나 하자. 내 외모 정도면···.”

“죽는 수가 있다. 어딜 갖다가 붙여.”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걸까.

라니는 살기 등등한 눈으로 수호에게 어디 한번 계속 말해보라며 재촉했다.

다른 거는 몰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농담도 통하지 않았기에 수호와 나는 서둘러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어휴··· 무서워.”

“당분간 조심하자. 쟤 내년 여름에 파리에서 열리는 콘서트 예약 실패했다고 완전히 독기가 올랐어.”

“무슨 콘서트 예약을 1년 전에 해?”

나도 조금 의아했던 일이었지만,

워낙 바쁜 그룹이라 1년 이상 스케줄이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해주자 수호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써서 이해하려고 하지 마.

우리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저 녀석 한국에 온 이유가 아토피도 있지만, 오빠들의 나라가 한국이란 이유도 분명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내년에 퍼플 라벨이 공개되면 팬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진 않을까.

만약에 그걸 보고 아티스트가 직접 마시는 거라도 SNS에 올려주면 홍보 효과 하나는 끝내줄 것 같았다.

뭐··· 그냥 나만의 망상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겠어?

잠시 소동이 벌어지는 중에도 설비는 계속 돌고 있었고 이내 완성된 벽향주 화이트 라벨은 박스에 담겨 옮겨졌다.

향이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끔씩 뭘 하고 있나 살펴 보니 요정들의 배치부터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 생긴 하급 요정은 셋이나 되었기에 비어 있는 오저당으로 둘을 보냈고 폭증한 요정도 나눠서 인솔하게 시켰다.

딱히 뭘 어떻게 하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 하나는 정말 편해진 것 같았다.

기존의 향이는 조금 산만했었는데 지금은 뭔가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키가 좀 큰 건가?

아니면 살이 좀 찐 건가?

와··· 내 생각도 이제 읽는 것 같아.

살찐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왜 돌아서서 째려보는 건데. 그건 차차 확인하기로 하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현송의 권택경 대리에게 전화했다.

“제가 너무 일찍 전화드렸나요?”

[아니요. 저도 이제 막 출근했습니다.]

“벽향주 병입 시작됐습니다. 차는 몇 대 보내셨나요?”

[오늘은 25톤 트럭 한 대가 갈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실을 수 있겠네요.”

보통 25톤 트럭 한 대에 일반 맥주 2만 병 이상을 실을 수 있다. 오늘 생산할 양이 2만 병이니 모두 실을 수 있겠지.

자리가 남으면 오풍주를 실으면 되니 아마 가득 채워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주류 상사는 언제 출고되나요?]

“내일부터 태백이랑 다른 주류 상사도 순서대로 나갈 예정입니다.”

[고생하셔서 리뉴얼을 하셨는데 부디 잘 나갔으면 좋겠네요. 저희 현송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홍보를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현송은 제가 믿고 있는 거 아시죠?”

빈말은 절대 아니었다.

현송이 있기에 리뉴얼을 한 것이다.

유통되는 벽향주의 절반 가까이 현송이 핸들링하고 있고 그들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난색했다면 아마 조금 더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시간 뒤.

현송에서 보낸 화물차가 들어왔다.

병입도 거의 마무리 단계였기에 적재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처음이라 조금 이르게 작업을 시작한 탓이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금방 끝나죠?”

“공장장님 말을 들을 걸 그랬네요.”

“시간 여유가 있으니 내일 나갈 것도 미리 작업을 해놓죠. 그러면 내일은 여유롭게 출근이 가능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조택훈의 조언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일찍 퇴근하고 내일도 새벽에 출근할 바에는 그게 여러모로 편했다.

그렇게 2시간을 더 일해서 오후 4시쯤 벽향주를 5천 병 정도를 병입해서 쌓아 놓자 확실히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정말 쫓기듯이 일을 했는데 앞으로는 스케줄만 잘 짜면 여유롭게 물건을 출고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하면 이제는 창고에 재고를 어느 정도 보유한 상태로 운영을 하고 싶었다.

“자! 오늘은 그만 다들 퇴근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서 일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그쯤에서 다들 퇴근시켰다.

직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참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향이를 불렀다.

다들 낮잠을 자러 가서 오늘따라 그 주변은 한적했다.

“오늘 요정들 배치하느라 고생했어.”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괜찮으니 물어보세요. 다만, 제가 모든 걸 다 아는 거는 아니랍니다.]

나는 그때부터 질문을 이어갔다.

가장 궁금한 것은 향이가 스스로 술의 요정이라 했는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그에 대한 향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요정이 있고 오저당에 있는 녀석들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분명히 이 세상에는 요정이 존재해요. 저와 여기의 요정들이 그 증명이기도 하죠.]

산과 바다 그리고 계곡.

어디든 요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환경이 파괴되면서 그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며 향이는 울먹였다.

그래도 덕월 계곡은 깊은 곳 어딘가에 요정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물이 다르니까요. 여기 물이 인근 지역과 다르다는 거는 마스터도 아시죠?]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이곳의 물은 연수에 속한다.

경수보다 미네랄이 적은 물이다.

그게 술맛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연수로 빚은 술은 부드럽고 순한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섬세한 맛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술이 연수를 쓰진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서는 경수를 쓰는 증류소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경수를 술 빚는 데 쓰면 그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우리 말고 다른 곳에도 술의 요정이 있는 걸까?”

[물론이죠. 바오 양조장에서 보셨잖아요.]

“거기 말고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어서.”

[아마 그런 양조장은 정말 드물 거예요. 그때도 보셨겠지만, 술의 요정은 양조장 상태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거든요.]

“우리도 조심해야겠네.”

향이는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술의 요정은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 외국에도 있다는 말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증류소.

그리고 와이너리 같은 곳에도 그 나라의 요정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테넌트가 일하는 글렌아워에는 요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요정이 남기는 특유의 향이 있는데 사람들은 절대 느낄 수 없어요.]

“신기하네.”

그 외에도 여러 질문을 했지만,

모든 것에 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았고 또 어떤 것들은 알면서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다며 내게 말해줬다.

[제가 성장한 만큼 마스터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어떤 도움?”

[예를 들면 벽향주의 맛을 약간이나마 개선한다거나 같은 양의 재료를 써도 더 많은 생산량을 뽑아낼 수도 있죠.]

“혹시 숙성 기간을 더 줄일 수도 있어?”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많은 요정을 붙여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란 말에 나는 곧장 수긍했다.

현재 우리 양조장은 다른 곳보다 열 배쯤 숙성 기간이 빠르다. 지금보다 더 빨라지는 걸 바라는 것이 무리긴 했다.

그리고 향이가 예시로 말해준 모든 것을 다 적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직 향이의 능력으로는 한 가지만 가능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오저당을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시켜야 가능하다고 했다.

“흐음··· 어떤 게 가장 도움이 될까?”

당장 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자 향이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손뼉을 치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더 날렵해진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아! 어쩌면 오저당이 빚는 술의 유통 기한을 더 늘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대신 마스터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굉장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요즘 내가 가장 고민하고 있던 거라 당연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벽향주에 이어 오풍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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