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2)
적막이 흐르는 컨테이너 사무실.
그 안에는 오저당 식구들 모두가 모여서 앉아 있었다. 공간에 비해 사람의 숫자가 많아서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말이 많던 호세조차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적막한 그 분위기를 지켜보던 나는 참다 못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상난 것도 아니고 다들 왜 이래?”
“너는 긴장도 안 되냐.”
“이제 막 판매를 시작했는데 곧장 엄청난 반응이라도 나올 거라 여겼던 거야?”
오늘은 벽향주를 공개하는 날이다.
몇 개월에 거쳐 준비해서 내놓은 제품이라 다들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때 쌍둥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 리뉴얼 영상 올렸··· 분위기가 왜 이래요? 혹시 며칠 전에 출고한 벽향주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반응은 어때?”
“이제 막 올려서 아직 댓글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쁜 반응이나 악플은 없는데요.”
유성이 대답을 하자,
다들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과연 어떤 내용의 댓글이 영상에 달린 건지 확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니는 조금 달랐다.
녀석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양옆을 기웃거렸다. 녀석의 한국어 실력은 나날이 늘고 있으나 댓글을 읽을 수준은 아니었다.
“이쪽으로 와. 내가 읽어줄게.”
내가 라니를 향해 손짓하며 부르자, 녀석은 쪼르르 달려와 곁에 앉았다.
그때부터 읽은 댓글의 반응은 유성이 말한 것처럼 그리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
### : 와! 3천 원이나 가격을 내렸네.
ㄴ### : 술값이 올라가는 것은 봤어도 오히려 내려가는 것은 처음 보는 듯.
ㄴ### : 나는 리뉴얼 한다고 해서 은근슬쩍 가격을 올리려는 꼼수인 줄 알았는데 반대였어. 갓저당 칭찬해!
### : 생산 방식의 변경 때문이라고 하던데 술맛만 그대로였으면 좋겠네요.
ㄴ### : 어제 단골 가게에 있길래 마셔봤는데 기존이랑 거의 똑같아요.
ㄴ### : 오늘 공개했는데 어제요?
ㄴ### : 리뉴얼 공개 전에 유통 업체에 뿌려놨겠죠. 그래야 우리도 곧장 구해서 마실 수 있으니까요.
### : 저도 어제 아는 분 통해서 운 좋게 구해서 마셨는데 병이 예뻐져서 그런지 오히려 더 맛있어진 것 같았어요.
ㄴ### : 생산량도 기존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니 이제 좀 구하기 쉬우려나.
ㄴ### : 요즘에도 품절 대란이었나요?
ㄴ### :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 : 오··· 예전에 공개한 디자인 파일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뻐.
### : 다른 거는 안 바란다. 제발 대형 마트에도 입점 좀 해주라!
ㄴ### : 맞아. 오저당 정도면 이제 그런 곳도 좀 뚫어야 하는 거 아닌가?
### : 오히려 서울 북부와 고양시 쪽은 작은 마트에도 보이던데요.
ㄴ### : 영상 마지막 부분에 새롭게 공급하는 지역 나오던데 어지간한 도시는 거의 깔린 것 같아요.
리뉴얼과 동시에 새롭게 계약 맺은 주류 상사에도 제품이 공급된 덕분에 중소 규모의 도시까지 우리 제품이 보내졌다.
아직 전국적인 공급이 이뤄진 것은 아니나 어지간한 곳에서는 벽향주와 오풍주 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댓글을 읽어줬더니,
그제야 라니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인 것이 이번에 리뉴얼을 하면서 가장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이 바로 라니였다.
거대 기업에서 자신만의 제품을 디자인한 경력은 있었으나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이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압박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리뉴얼하느라 수고했어. 확실히 디자인이 좋다는 말이 많이 있네.”
“영귀주도 잘 끝내야지.”
“물론이지.”
영귀주는 천천히 해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옆에 조택훈 공장장도 있기에 차마 그 말은 할 수는 없었다.
내 예상으로는 영귀주의 판매는 적어도 가을쯤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류 상사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리뉴얼된 벽향주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소량 주문한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벽향주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만 쉬고 다들 일 시작하죠. 여기 앉아 있어봤자 달라질 게 없어요.”
“자자! 다들 움직입시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은 예정대로 회식을 할까 하는데 언제나처럼 참석하고 싶은 사람만 오시면 됩니다.”
이런 날에 술과 음식이 빠질 수는 없지.
진짜 필요한 보상이 성과금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건 연말에 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빠져도 괜찮다고 했으나 회식을 싫어하는 직원은 아직 없었다.
치킨과 피자 그리고 족발까지.
온갖 음식과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다.
평소에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다들 회식만을 기다렸다.
당연히 술을 좋아하는 이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렇게 한 번 회식을 할 때마다.
다양한 술을 맛보여주고 있었다.
막걸리부터 시작해서 맥주 그리고 위스키와 와인까지 주종을 넘나들었다.
그 대신 폭음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고 테이스팅 노트를 쓰는 것이 조건이었다.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 보면 되었다.
다른 곳에서 만드는 술의 특징과 왜 그런 맛이 나오는 건지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당연히 모든 시음 과정을 거친 뒤에는 마음껏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은 네가 사들인 막걸리 드디어 마셔보는 거냐?”
직원들이 하나둘 일을 하러 나가자 수호가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요즘 오저당에는 수십 종의 막걸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구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주류 상사를 통해 어렵게 구한 것들도 제법 많았다.
“아니, 그러려고 산 거 아니야.”
“처음에 온 것들은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오늘은 비싼 술 사 와서 마셔도 되니 막걸리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해.”
“오케이!”
수호는 쿨하게 돌아섰다.
눈치 보지 않고 술을 사도 된다니 막걸리에는 미련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번에 모으고 있는 막걸리는 향이가 요청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내에 있는 800여 곳의 양조장.
그곳에서 만드는 1,500종류의 막걸리.
향이는 그중에서 최소 300종 이상의 막걸리를 요정들에게 주길 원했다.
소설 속의 퀘스트처럼 그 숫자를 채우면 뿅 하고 보상을 주는 개념은 아니었다.
요정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품질 좋은 술을 다양하게 접할수록 요정들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일반 요정에서 하급 요정으로, 하급 요정은 중급 요정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급 요정이 되면 특별한 능력 하나씩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중의 하나가 숙성의 속도를 잠시 멈추는 능력이었는데 문제는 복불복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중급 요정으로 바뀔 때 어떤 능력을 얻게 될지는 향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정도 투자는 당연히 해줄 수 있지.’
막걸리 300종으로는 부족해서 국내에 있는 1,500종 모두 다 사준다고 하더라도 천만 원은 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요정들 덕분에 얻은 것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 비용은 아깝지 않았다.
더구나 요정이 성장하면 양조장에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잖아.
일반 막걸리와 오풍주를 생산한 후부터 유통 기한 때문에 다시 회수해서 버리는 양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때 호세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화물차 들어오기 전에 마트 먼저 다녀오려고 하는데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지금 말씀해주세요.”
“고맙지만, 필요한 게 없네.”
“조금 전에 수호 실장님이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사라고 하시던데 그래도 되나요?”
“평소 마시고 싶었던 거나 먹고 싶었던 거 있으면 다 사도 돼.”
나는 웃으며 카드를 건넸다.
회사의 식구가 늘어나니 식자재를 한 번 살 때마다 수십만 원 단위가 넘어갔다.
조택훈과 함께 온 직원들까지 합치면 어느덧 오저당의 직원이 열네 명이나 되니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술까지 담으면 백만 원은 훌쩍 넘어가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돈 걱정 하지 말고 사라고 다시 강조했다.
호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사무실을 나가려다 잠시 멈춰 섰다.
“아! 저번에 시키신 대로 오늘 나가면서 LA로 벽향주 보낼게요.”
*
LA 코리아타운 북쪽.
호바트 대로에 있는 일반 가정집.
현재 그곳은 스캇 왈라스가 머무는 집이자 그가 운영하고 있는 스피릿 포인트의 사무실이기도 했다.
몇 년 전에 팬데믹이 돌던 때쯤.
기존의 사무실은 폐쇄하고 각자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시작했는데 그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재택 근무는 여러 장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비싼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컸다. 스피릿 포인트는 증류소의 광고를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최대한 자유롭게 평점을 내리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수익이 크진 않았다.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현관 앞에 박스가 몇 개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맞는 것 같았는데 이상한 게 하나 껴있었다.
그걸 본 스캇은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직원이자 아내인 엠마에게 물었다.
“이건 또 어디서 온 거야?”
“한국에서 왔더라.”
“한국?”
“자기가 리뷰한 OGD있잖아. 좋은 평점 줘서 고맙다고 뭔가 보낸 것 같아.”
“아··· 오저당.”
스캇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무게를 보니 안에 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증류소에서 이렇게 술을 보내오는 일은 꽤 흔한 편이었다.
자기들의 술을 평가해달라는 의미였고 때로는 뇌물의 성향을 가진 고가의 술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은 다시 되돌려 보내는데 이번에는 한국에서 온 거라 그러는 것도 조금 애매했다.
“이거 어쩌지?”
“그거 되돌려 보낼 생각은 하지도 마. 지금 그런데 돈을 쓸 여유 없어.”
“그러면 그냥 받아?”
“리뷰를 하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해.”
술을 버리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엠마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스캇은 잠시 고민하다가 상자를 개봉했다.
그러자 두툼한 에어캡으로 꼼꼼하게 포장한 여섯 병의 술이 나왔다.
절반은 오풍주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에서도 마셔본 벽향주였다.
당시에는 리뉴얼 예정이라 평점을 내리지 않았는데 보틀이 달라진 것을 보니 리뉴얼을 마친 것 같았다.
일단 첫인상은 기대 이상으로 좋은 편이었다. 그건 그의 아내인 엠마도 마찬가지였는지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오! 예쁘네.”
“한국적인 이미지랑 딱 들어맞아.”
“오늘 저녁에 킴도 식사하러 오기로 했는데 그때 뭐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테이스팅하는 건 어때?”
스캇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사는 지역은 코리아타운 바로 옆이라 한국인 친구가 제법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통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킴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웃이자 친구였다.
이번에 한국에 갔던 것부터.
스피릿 포인트가 증류주 외에 다른 술을 리뷰하는 것도 모두 킴에게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되었다.
그가 미국 외에 다른 세상에 대해 알려준 덕분에 스캇은 위스키나 와인 외에도 수많은 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늦은 저녁.
킴은 아내와 함께 왔다.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일상에 가까웠다. 매주 한 번 이상은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캇이 한 달 가까이 해외에 나갔다 왔기에 정말 모처럼 모이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식사는 즐거웠다.
킴 부부는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자 스캇은 오늘 한국에서 온 술이라며 벽향주와 오풍주를 한 병씩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한국 술이라니 더 반갑군.”
킴은 무척 반기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온 술을 곁들여가며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식탁을 정리한 뒤에 스캇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킴도 양손에 시가와 오풍주가 담긴 잔을 들고 따라나섰다.
“이거 얼마 전에 너희 사이트에서 평점 줬던 그 술 맞지?”
“맞아. 모처럼 고점이 나온 술이지.”
“4.5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늘 마셨던 다른 술은 몇 점 줄 거야?”
“내 돈으로 산 게 아니라 벽향주는 리뷰할 생각이 아예 없는데.”
“오피셜 말고 개인적인 점수가 궁금해.”
스캇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금방 대답하진 못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가 내린 결론은 4.2점이었다. 공개하진 않았으나 기존에 한국에서 내렸던 점수와 같았다.
“예상외네 무슨 술인지 궁금해서 조금 전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는 벽향주가 더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았거든.”
“오풍주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맛이라 약간 쇼킹한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벽향주는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지?”
스캇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벽향주만의 장점도 있기는 했지만, 장기간 숙성한 증류주와 견줄 정도는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다만, 오래 숙성한 벽향주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이내 부탁할 게 하나 있다고 했다.
“무슨 부탁?”
“오풍주랑 벽향주 조금 남았던데 한 병씩 가져가도 될까? 내가 빚진 게 있으면 나중에 몇 배로 갚는 거 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술을 빼앗아갈 정도로 마음에 든 거야?”
킴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벽향주와 오풍주라는 술을 스캇 덕분에 오늘 처음 알았으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임팩트가 좋았다.
“이거 돈이 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