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킬라 웨이브 (2)
돈 레오넬을 따르는 순간.
카를로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아주 잠시에 불과하나 실망한 기색이 엿보였다. 아마 술잔을 채우고 있는 술의 색상 때문에 나온 반응 같았다.
테킬라도 위스키와 비슷하다.
숙성하며 오크통의 성분을 흡수하기에 색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같은 레포사도 등급이라도 2개월을 살짝 넘긴 것과 12개월을 가득 채운 것과는 색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돈 레오넬의 색은 연한 황금빛이었다.
한 마디로 그리 길게 숙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맛을 보기 전에 평가부터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슈미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둘은 잔을 들어 향부터 맡았다.
그러자 곧장 표정이 풀렸다.
“하아, 향이 상당히 좋네요.”
“제가 경험한 레포사도 등급의 테킬라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장담하건대 맛은 그보다 더 좋을 겁니다.”
나도 내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아까 몇 방울 마신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리 따라 놓지 않으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멕시코에서 보낸 돈 레오넬이 네 박스나 되지만, 왠지 오늘 중에 상당히 많은 양이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향이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돈 레오넬을 따른 잔 앞에서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에 둘은 맛을 보았다.
손등에 소금을 올리고 레몬을 베어무는 슈터 방식으로 돈 레오넬을 마신 둘은 곧장 반응을 보였다.
“크아아, 이거 도대체 뭐지?”
“저번에 마셨던 아이레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네요. 이거 정말 레포사도 맞나요?”
“네, 멕시코에 있는 CRT에서 검증받은 레포사도 등급 맞습니다.”
멕시코에서 보내주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인정받지 않으면 테킬라라는 이름조차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1년 이상 숙성한 아네호 등급으로 착각할 것 같네요.”
“나도 슈미트 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레포사도에서 이런 맛을 내는 것은 완전 반칙 아닙니까?”
얼마나 숙성한 건지 궁금해했지만, 그것에 대한 것은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여기 들어가는 원액은 각각 8주와 13주 남짓 숙성한 것에 불과했다.
슈미트와 카를로스는 최소 10개월 이상 숙성한 거라 착각하고 있었는데 공개하면 오히려 제품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탄하며 다시 잔을 채우는 사이에 나도 천천히 맛을 봤다.
확실히 예전의 아이레스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요정의 효과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생산 과정도 손을 봤고 설비와 증류소에 꽤 투자했다.
내가 멕시코를 떠나기 전까지 들인 돈만 1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인수했을 때 들어간 돈까지 합치면 총투자비만 22만 달러였으니 그 정도면 나도 꽤 공격적인 투자를 한 편이었다.
지금 나의 목표는 OGD 멕시코를 최대한 빨리 흑자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곧장 뉴욕으로 달려온 것이기에 아직 돈 레오넬에 흠뻑 빠져 있는 카를로스에게 내기를 언급했다.
미국 시장에 빠르게 파고들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수준의 테킬라면 저번 박람회 때 했던 내기에서 제가 이긴 것 맞습니까?”
“돈 레오넬의 2년간 독점을 따내기 위해서라도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데 이거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되는군요.”
카를로스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유쾌하게 두 손을 치켜들며 고개를 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슈미트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하! 축하드립니다.”
“내기에서 내가 지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는데 어떤 걸 해주면 됩니까?”
“우선은 바크모를 통해서 미국에서 런칭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좋은 술을 가장 먼저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만 한 영광은 없지요.”
카를로스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필요한 마케팅도 전폭 지원해주기로 했다.
현재 그가 소유한 테킬라 브랜드에는 관련된 인적 자원이 풍부했는데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쯤에서 카를로스는 잔을 내려놨다.
“이거 나도 모르게 계속 마시게 되네요. 취하기 전에 일 이야기부터 마무리하죠.”
“그러시죠.”
“가격은 얼마로 할 건지 정해졌나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35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5달러의 테킬라.
저렴하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비싸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조금 애매한 금액이나 돈 레오넬을 맛본 두 사람은 너무 저렴하다고 여겼다.
“더 비싸게 팔아도 살 것 같아요.”
“저도 슈미트 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 정도의 퀄리티면 45달러도 가능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저희 술을 접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높은 금액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테킬라 브랜드도 그러하듯,
돈 레오넬도 여러 제품을 생각 중이다.
1년 이상 숙성하는 아네호 등급을 만들 수도 있고 수백만 원 이상의 프리미엄 등급도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지도가 필요하다.
조금 비싼 금액이라도 믿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고 말하자 카를로스도 내 의견에 동의해줬다.
대신 그는 그러기 위해서 생산량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매달 사천 박스(10만 병)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당분간 오백 박스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안 되죠. 턱없이 부족합니다.”
“바크모가 주문을 넣으신다면 언제든 생산을 늘릴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알겠으니 최대한 많이 늘려주세요.”
카를로스는 이미 돈 레오넬의 성공을 장담하고 있었다. 아네호 등급이 보통 60달러에서 80달러 정도 하기 때문이다.
고작 35달러로 아네호 등급과 겨룰 정도의 테킬라를 마실 수 있다면 그만한 가성비가 없었다.
“바크모에 납품하는 것은 예전에 박람회 때도 가능하다고 말했었는데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후회 말고 지금 말하세요.”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그럼, 한국에서 생산되는 소주와 전통주를 바크모에서 판매할 수 있게 도와주십쇼.”
전혀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던 탓인지 카를로스는 조금 당황했다. 오저당의 술도 아닌데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스패닉이신 카를로스가 테킬라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처럼 저도 한국의 술이 잘 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요.”
“더구나 오저당에서 5월쯤에 새롭게 소주 제품을 런칭할 예정이기도 하고요.”
카를로스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만큼 많은 관심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오저당에서 빚은 벽향주부터 시작해서 돈 레오넬까지 모든 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퀄리티를 선보였다.
당연히 신제품도 그에 못지않을 거란 기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꼭 한번 마셔보고 싶군요.”
“그러실 것 같아서 이번에 미국에 올 때 신제품 샘플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쯤에서 소담을 꺼냈다.
돈 레오넬과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라벨에 소주라고 적힌 것을 본 그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저번에 박람회 때는 보지 못한 건데 그사이에 또 신제품을 개발한 겁니까?”
“지난해부터 준비하던 것인데 현재 공장을 건축 중이라 4월 말 이후에 런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단 맛부터 보고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아까 카를로스가 잔을 꺼내온 곳에서 잔을 더 꺼내와서 소담을 따랐다.
카를로스의 반응은 테킬라를 마셨던 때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그게 소담이 별로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저마다 취향이란 게 있다.
테킬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그에게 소주는 굉장히 낯선 종류의 술이다.
반면에 한국의 술을 주로 다루기에 자주 접해본 슈미트의 반응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거 제가 알던 소주 맞습니까?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한국의 소주를 마셔봤는데 차원이 다릅니다.”
“이 술과 함께 한국의 술을 바크모에서 받으면 계산은 끝나는 겁니까?”
“그 대신 저는 돈 레오넬의 미국 내 독점 판매를 1년 동안 드리겠습니다.”
나도 받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OGD USA를 만들 게 아니라면 돈 레오넬이 초반에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그전까지는 바크모가 보유한 백여 개의 주류 매장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미국 전역에 제품을 넣고 반응을 보며 마케팅까지 하려면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니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여야죠. 담당 실무자에게 말해서 가능한 좋은 조건으로 진행하라고 말해 놓겠습니다.”
카를로스가 슈미트를 바라보며 대답하자 그는 기쁨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이번 일로 인해 뉴욕 지사의 매출이 다시 한번 뛰어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소담도 거기 포함되어 있기에 나도 카를로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내기에서 진 것은 나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군요.”
“보통 이럴 때 Win-Win이라고 하죠.”
“여기에 슈미트 씨도 같이 오신 걸 보면 유통은 벽향주와 동일하게 심양의 뉴욕 지사에서 진행하는 걸로 알면 되나요?”
“네, 그렇게 진행될 겁니다.”
내가 대답을 하자 카를로스는 유심히 슈미트를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가장 행운아는 슈미트 씨인 것 같군요. 장담컨대 돈 레오넬은 1년 이내에 크게 성공할 겁니다.”
“미스터 주가 좋게 봐준 덕분입니다.”
“제가 슈미트 씨와 나이 차이는 크게 안 나지만, 살다 보니 행운이라는 게 그냥 찾아오는 거는 아니더군요.”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긴···.
내가 알기로는 카를로스가 슈미트보다 열다섯 살 정도는 많고 할아버지와 아저씨의 경계선도 이미 넘어섰다.
어쨌든 일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부터는 편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는 카를로스도 사업가로서의 모습을 내려놨다.
그와 동시에 말투도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정중한 느낌의 단어를 주로 선택했으나 이제는 허허거리며 술을 마시는 것이 동네 술친구 같았다.
“우리 집에 젊은 친구가 놀러 온 것이 오랜만이라 나까지 젊어지는 기분이야.”
“그런가요? 자주 놀러 와야겠네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래 걸리잖아.”
“저라도 괜찮으시면 자주 오겠습니다.”
슈미트가 한마디 거들자 카를로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돈 레오넬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카를로스는 목이 마르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비밀 공간이 나왔다.
접객실과 이어지는 그곳에는 온갖 술과 술잔 그리고 냉장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바를 그대로 집에 옮겨 놓은 모습이었다.
나는 카를로스를 뒤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와··· 여기는 뭐죠?”
“종종 집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칵테일 파티를 할 때가 있거든.”
“저희 오저당의 벽향주도 있네요.”
“당연하지. 요즘 바크모에서 가장 빠르게 매출이 성장하는 술이잖아. 내 지인 중에도 벽향주 마니아가 제법 많아.”
“칵테일 좋아하시면 제가 한 잔 만들어 드릴까요?”
카를로스는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나는 일단 벽향주부터 꺼낸 뒤에 코블러 셰이커(Cobbler Shaker)와 여러 물품을 찾아서 바 위에 올려놓었다. 그쯤 되자 슈미트도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칵테일도 만드실 줄 아세요?”
“삼촌이 서울에서 바를 하셔서 한때 바텐더 일을 배웠거든요.”
“그런데 벽향주 베이스로 만드는 칵테일을 만드시는 건가?”
카를로스의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해줬다. 지금 내가 만들려는 것은 유나 누나의 레시피인 글래시어 칵테일이었다.
다행히 필요한 리큐르 같은 재료는 모두 냉장고 안에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흥미롭게 나를 바라봤다.
그 정도의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업장에서 셰이커를 흔들면 꽤 많은 손님들의 시선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페셔널한 바텐더는 아니기에 화려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 두 사람은 나보다 칵테일에 관심이 많았다.
“벽향주로 만든 칵테일이라니. 무슨 맛일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지금 제가 만드는 벽향주 베이스 칵테일 레시피는 칵테일 세계 대회에서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나는 유나 누나 이야기를 해줬다.
기다리는 손님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것도 바텐더의 임무이자 서비스다.
다행히 모처럼 만든 글래시어 칵테일은 두 사람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돈 레오넬을 가지고 테킬라 베이스의 칵테일도 만들었다.
나도 이렇게 마시는 것은 처음이라 어떤 맛인지 조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글래시어 칵테일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블루 마가리타부터 시작해서 일출의 느낌을 담은 테킬라 선라이즈와 라임 주스와 섞어 마시는 마타도르까지.
내가 아는 모든 레시피를 동원했다.
다행히 돈 레오넬은 칵테일의 베이스로 사용해도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향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칵테일 잔에 걸터앉아 칵테일을 즐겼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카를로스는 내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마시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손바닥을 들어 바를 두어 차례 두드렸다.
찰진 마찰음이 상당히 커서 슈미트와 나는 깜짝 놀라 바라보자 카를로스는 웃으며 이번 출장 일정을 물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일주일 후에 LA에서 열리는 파티에 유나라는 그 바텐더와 자네를 초대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