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 to Drink (1)
계약은 문제없이 진행됐다.
오스카는 뚝딱 견적을 뽑아냈다.
설계해야 하는 면적과 건물의 숫자 그리고 층수에 따라 산출이 가능한 터라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비용은 조금 더 증가한 30만 달러.
기존의 금액보다 5만 달러가 늘었다.
스케치 그대로 구현하자면 건물 외에도 조경 디자인까지 진행해야만 했기에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 생각되었다.
대신 우리가 내건 조건은 6개월 이내에 설계도를 납품하는 것이었다. 오스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 했다.
도니가 남들보다 설계 속도도 빠르고 이미 이 작업에 푹 빠져있는 덕분이었다.
“이제부터는 페레즈가 맡아서 일을 진행해주세요.”
실무는 내 몫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거의 다 결정되었다.
이제는 OGD USA에서 알아서 진행을 해줘야만 했다. 만약에 본사가 아닌 지사에서 감당할 규모의 투자였다면 내가 직접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진행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매주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아! 가운데 있는 나무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나중에 시공하는 회사에도 반드시 전달해주세요.”
“잊지 않고 체크하겠습니다.”
페레즈가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비행기 창밖으로 LA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는 멕시코가 아니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LA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페레즈의 차가 공항 주차장에 있었기에 그는 다음 목적지인 오렌지 파크 에이커스까지 우리를 태워줬다.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네비에 찍은 주소 앞에 멈추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유나 누나였다.
4개월 만에 본 누나의 모습은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바뀌었다.
일단 화장이 무척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철이 형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줬는데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페레즈는 캐리어를 내려줬다.
나는 두 사람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페레즈에게 되돌아갔다.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 언제 또 오시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출장도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언제 다시 이렇게 갑자기 일정이 잡힐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올해 내에는 돌아올 거란 것이다.
특별히 예정되어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멕시코와 미국 지사는 일 년 중에 한두 번은 반드시 들릴 생각이었다.
가끔 얼굴이라도 비추고 보너스를 쥐어줘야 멀리 있어도 같은 오저당 소속이라 느낄 거라 생각되었다.
“사무실은 LA에 얻으실 거죠?”
“아무래도 여럿이 함께 일하려면 그래야겠죠. 혹시 염두에 두시고 계신 지역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 부분은 슈미트와 이야기해서 편한 쪽으로 정하시면 됩니다.”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 문제는 따로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대신 이건 알아뒀으면 했다.
“지금 당장 일하는 인원만 고려하지 말고 앞으로 성장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넓은 사무실을 구하셔야 할 겁니다.”
이건 본사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해주는 충고였다. 페레즈도 이미 어느 정도 경험을 해봐서인지 수긍했다.
그가 고용되었던 시점에 미국 법인이 설립되었는데 어느덧 매달 25만 달러씩 수익이 찍히고 있는 중이다.
페레즈가 떠난다고 알려주자.
쌍둥이들은 후다닥 달려와서 인사했다.
법인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둘보다 훨씬 직급이 높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종종 미국에 와야 한다.
둘은 증류소가 변해가는 과정을 촬영해야 하기에 페레즈에게 잘 보여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은 일정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페레즈는 쿨하게 인사를 한 뒤.
차를 끌고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그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나는 돌아서서 누나가 머무는 집을 살펴봤다.
생각보다 너무 집이 컸다.
LA에 머물 집을 구할 때 돈을 보태줄 거라 말을 했지만, 정작 누나가 이곳을 구할 때 내 도움은 전혀 받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집의 월세가 장난 아닐 거란 사실이었다.
내가 알던 형과 누나는 이런 곳에 과소비를 할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어찌 된 일이 물어봤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카를로스가 출장오면 머물던 집이래. 우리한테 1년간 무료로 빌려줬어.”
“카를로스가요?”
“자기가 초대해서 왔다고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시더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카를로스와 자주 통화하는 편인데 그런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누나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을 했다.
2층 주택의 내부는 꽤 깔끔했다.
어지간히 잘 사는 중산층이 사는 집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확실히 카를로스의 취향이긴 했다.
그가 사는 저택처럼 이곳도 거실에 미니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카를로스처럼 술에 진심인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 동네는 차 없으면 들어오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움직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중고차를 한 대 샀지.”
“꽤 돈이 들어갔을 텐데요.”
“나갈 때 다시 팔면 되잖아. 유나가 출퇴근하려면 꼭 필요해서 어쩔 수 없어.”
하긴 미국에서 차 없이 사는 삶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철이 형은 가장 먼저 우리가 쉴 수 있게 방부터 안내를 해줬다.
“여기는 도찬이가 쓰면 되고 저쪽 방은 트윈 베드가 있으니 쌍둥이가 쓰면 돼.”
“설마 우리 때문에 침대까지 준비한 거예요?”
“그럴 리가. 종종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어서 준비한 거지.”
그다지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일단 방에 캐리어부터 올려놓고 씻었다.
그런 뒤에 거실로 내려가니 유나 누나가 손짓을 하며 바가 설치된 거실로 불렀다.
“저번에 나한테 제안했었던 RTD 진행하는 거 아직 유효한 거지?”
예전에 할리우드 파티를 갔을 때.
누나와 함께 RTD 이야기를 나눴고 개발 단계의 베이스 부분을 맡기기로 했었다.
아직 오저당에 신제품 개발을 위한 부서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RTD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누나에게 섭섭하지 않은 수준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물론이죠. 페레즈 통해서 소담을 보내라고 했는데 받으셨죠?”
“며칠 전에 왔는데 생각보다 많아서 깜놀했다.”
페레즈가 이곳에 보낸 소담 소주만 열 박스가 넘어갔다. RTD 개발을 위한 거라 말했더니 넉넉히 챙긴 탓이었다.
“이제 베이스가 되는 소담도 출시됐으니 슬슬 RTD를 진행해야죠.”
오저당의 하반기 계획 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소담을 이용해서 RTD 제품을 개발하고 출시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주류 시장에서는 별도의 제조 과정 없이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많이 보내준 덕분에 몇 가지 레시피도 만들 수 있었어.”
“벌써 레시피가 나왔다고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했는데 충분히 예상 가능한 맛이라 그런지 그리 어렵지 않더라. 지금 만들어 줄까?”
“부탁드릴게요.”
누나는 곧장 20도짜리 소담을 이용해 몇 가지의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40도짜리 소담은 사용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저는 그걸로 만드실 줄 알았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네요.”
“그건 너무 독해서 맛을 잡기 어렵더라.”
“하긴 RTD 대부분이 거의 청량음료 느낌이 날 정도로 가볍긴 하죠.”
스미노프 아이스랑 와인 크루저만 하더라도 5%였고 거기서 더 높아지면 RTD라고 말하기 조금 애매했다.
“돈 레오넬로 만든 칵테일도 상당히 인기가 좋은데 그걸 베이스로 삼아서 RTD를 만들 생각은 없는 거야?”
“생산량이 소비되는 양보다 작아서 아직은 그쪽으로 물량을 뺄 수 없어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누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쌍둥이도 다 씻었는지 거실로 내려왔다.
두 녀석은 누나가 칵테일을 만드는 것을 보고 우선 카메라부터 거치했다.
예전에 누나와 쌍둥이는 너튜브에 올릴 여러 촬영을 함께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지철이 형도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형은 뭘 찍는 거예요?”
“유나 찍지 누굴 찍겠어. 나는 저 녀석이 일할 때가 가장 섹시하더라.”
“깨가 쏟아지는 게 신혼부부 보는 거 같네요.”
“안 그래도 여기 계약 끝나고 한국 돌아가면 곧장 결혼할 생각이야.”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언젠가 둘이 결혼을 할 거라 생각은 했으나 직접 들으니 조금 놀라웠다.
생각해보니 두 사람이 사귄 것도 꽤 되었고 동거까지 하고 있으니 슬슬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기는 했다.
“축하드려요!”
“쉬잇. 유나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고 했어. 그러니 너만 알고 있어.”
“물론이죠. 이거 결혼 선물로 뭘 해드려야 하나 고민되네요.”
“우리 사이에 선물은 무슨··· 그냥 축하만 해줘도 돼.”
누나가 여기 올 때.
카를로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그 이후에 연장하는 것은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아직 8개월 이상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천천히 고민해도 되는 문제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철이 형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누나는 몇 가지의 칵테일을 만들어냈다.
잠시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뭘 섞은 건지 놓친 것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비슷하게 보이는 칵테일은 전혀 없었다.
저마다 특징이 한 가지 이상은 있었다.
어떤 것은 탄산이 있었고 색만 봐도 각각의 맛이 다 다른 것으로 보였다.
“쌍둥이가 내려올 줄은 몰라서 한 잔씩 만들었는데 더 만들어줄까?”
“아니요. 양도 충분한데 나눠서 마시면 돼요. 잔만 더 챙겨주세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누나는 곧장 테이스팅 잔을 꺼냈다.
세 개의 잔에 동일하게 나눠서 따라준 뒤에 우리 앞쪽으로 그걸 밀어줬다.
그때부터는 시음의 연속이었다.
대부분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는 맛이었는데 은근히 탄산과 잘 어울리는 것이 두 개나 있었다.
“이거 좋네요. 여름에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맛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어.”
“뭔데 그래요?”
“우연히 만든 건데 일단 맛부터 봐봐.”
누나는 마지막까지 미뤄뒀던 잔에 담긴 술을 세 개의 잔에 나눠서 따라줬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대신 사과 향이 진하게 나서 그런지 몰라도 식감을 꽤 자극했다.
잔을 들어 맛을 보는 순간.
나는 이게 정말 소담을 베이스로 만든 건지 의심됐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지금까지 마신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누나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 좋네. 이거는 소담만 들어간 게 아니거든. 일종의 블렌딩이랄까.”
그제야 나는 뭔지 알아챘다.
벽향주 화이트 라벨 느낌이 있었다.
블렌딩이라 했으니 아마도 소담과 벽향주를 섞어서 만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