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추측한 것을 말하자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화이트 라벨 10%에 소담 15% 그리고 사과주스와 탄산수가 들어갔지.”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네요.”
“여기서 어떤 사과주스가 사용됐냐에 따라서 맛이 꽤 달라지더라. 그리고 오렌지나 레몬도 상당히 잘 어울려.”
“이거 정말 맛있어요.”
쌍둥이도 뒤늦게 마지막 칵테일을 맛보고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거 팔면 사서 마실 것 같아?”
“가격이 얼마쯤이냐에 따라 다르죠. 그래도 일단 한 번 맛보면 계속 떠오를 것 같아요.”
“다른 RTD처럼 300mL 정도에 적어도 3천 원은 넘어가지 않게 만들어야지.”
그 이상은 너무 비싸다.
RTD의 경쟁자는 맥주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개당 3천 원 이하로 끊어야지.
내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그 가격대가 가능하겠냐며 물었다.
“말씀해주신 대로 만들면 한 병당 들어가는 술이 75mL 정도라 괜찮을 것 같아요.”
원가 계산은 다시 해봐야 하겠지만,
나머지 3/4 정도가 주스와 탄산수다.
오히려 어떤 주스와 첨가물을 쓰냐에 따라 순수익이 크게 바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누나에게 맡길 수는 없다.
상품을 하나 만들려면 원가 계산과 여러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당연히 그중에는 생산 공정과 재료 수급 같은 것도 고려 요소 중에 하나다.
“고생하셨어요. 여기부터는 저희가 조금 더 다듬어서 상품화시켜 볼게요.”
보라해
그날 저녁 무렵.
나는 화상 회의를 열었다.
임원진과 실장급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RTD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이는 없었다.
이미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언제 시작하냐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RTD 만들기 위해 창고 2층은 비워 놓은 상태였고 레시피에 따라 필요한 설비를 들여놓으면 될 뿐이었다.
[수호 : 화이트 라벨과 소담 소주를 블랜딩해서 칵테일을 만들 줄은 몰랐네.]
“나도 예상 못했어. 그런데 정말 맛 좋더라. 시간 될 때 만들어서 마셔봐.”
[수호 : 나는 똥손이라 어렵지.]
[라니 : 그러면 신상품 보틀이랑 라벨 디자인도 해야 하는 거지?]
“당연하지.”
라니는 RTD도 스프라이트 컬렉션으로 만드는 건지 내게 물어봤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였다.
황동선 이사가 브랜드 컨설팅을 해줬을 때 말했던 대로 각 국가당 하나씩 진행할 생각이라 RTD는 해당하지 않았다.
[라니 : 그러면 아예 새롭게 구상해야 하네. 역시 날먹은 어렵구나.]
“이번에 만드는 RTD는 약간 트로피컬 같은 분위기가 났으면 좋겠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 이사 : 음료의 꽃은 역시 여름이죠. 시원한 느낌으로 이미지를 잡으면 판매량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역시 황 이사는 마케팅 전문가답게 내가 바라는 포인트를 금방 잡아냈다.
이번에는 그의 역할이 꽤 중요했다.
지금까지는 오저당이 빚는 술로 승부를 봤으나 이제는 마케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사님이 라니 실장이 작업 진행하는 동안 옆에서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황 이사 :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라인업은 한 가지 맛으로 가는 건가요?]
“아니요. 일단은 사과 맛이랑 레몬 그리고 오렌지까지 테스트해보고 결정하죠.”
한 가지만 내놓기는 조금 애매했다.
설비가 복잡해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여러 맛을 내놓고 그중에서 살아남는 것을 위주로 판매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택훈 공장장 : 조합 비율이 각각 다른 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행이네요. 레시피가 확정되면 필요한 설비 정리해서 들여놓죠.”
[조택훈 공장장 : 이미 어느 정도 준비는 해놨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회의는 생각보다 꽤 길게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양한 주스와 원액을 준비해주길 부탁했다. 재료에 따라 맛의 차이가 상당히 심하다면 최적의 재료를 찾아야 한다.
아마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국은 미국보다 주스 종류가 그리 다양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마트에 가면 수많은 종류의 주스가 넓게 펼쳐져 있을 정도다.
Original, Homestyle, Low Acid.
같은 브랜드라도 스타일의 차이가 있기에 종류가 더 다양해진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라니는 격하게 공감했다.
한국에 있으면서 제대로 된 오렌지 주스를 찾는 것이 꽤 어려웠다고 했다.
[수호 :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거는 최대한 다 구해놓을게.]
“어차피 원액을 대량으로 사들여야 하는 거니 관련 업체 쪽도 잘 살펴봐.”
[수호 :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그럼 다들 수고하세요.”
나는 거기서 회의를 끝내려 했다.
대부분이 로그아웃했으나 라니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나를 붙잡았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뫼리스와 통화 중에 프랑스에 갈 거라고 했더니 끌루소의 사장인 아르노 오다르가 우릴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
“하루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으니 알겠다고 전해줘. 그리고 이번에 출국할 때 1년 숙성한 소담도 가지고 가보자.”
기왕에 만나는 거라면 우리 술을 어필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드는 게 좋겠지.
내 예상으로는 퍼플 라벨의 추가 주문을 위한 자리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과연 얼마나 주문할까.
뫼리스가 해준 말에 의하면 이제 막 마트에 깔리기 시작한 퍼플 라벨의 초반 반응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라 들었다.
아직은 기존에 화이트 라벨을 마셔본 이들의 구매하는 케이스가 많은 편이나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벽향주처럼 숙성된 소담을 선주문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오케이! 그렇게 준비해서 갈께.]
*
그로부터 며칠 뒤.
프랑스의 샤를 드골 공항.
그곳은 오늘따라 꽤 북적거렸다.
입국하는 이들이 나오는 통로에는 천여 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들은 동시에 비명 같은 함성을 질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보디가드와 다수의 공항 직원에게 보호받으며 걸어 나오는 일곱 명의 남자들에게 향해 있었다.
“꺄아악! 여기 좀 봐주세요.”
“사랑해요. 오빠!”
“우윳빛깔 RJ!”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반응이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팬들은 한국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남자들이 누군지 안다면 다들 비슷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데뷔 12년 차.
글로벌 스타가 된 한국의 아이돌.
그들이 지금껏 쌓은 이력은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래미와 빌보드 수상 경력.
그리고 탑 아티스트와의 협업.
어느 것을 보아도 글로벌 스타라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지금과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다.
파리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위해 입국한 그들은 곧장 차에 올라타 호텔로 향했다.
당장 30분 뒤에 현지 방송국과 인터뷰도 있었기에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형, 오늘 스케줄은 인터뷰가 끝이지?”
멤버 중에 가장 맏이인 RJ가 묻자 매니저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차 때문에 생기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이동한 첫날은 빡빡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와인이나 마시고 일찍 자야겠다.”
“어떤 와인으로 사다 줄까?”
“됐어. 그냥 내가 가서 고를래.”
“괜히 팬들 눈에 띄면 곤란해질 수 있어.”
그를 알아보는 순간.
모든 사람이 몰려들 것이다.
인파에 갇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RJ도 잘 알고 있으나 모처럼 오는 파리였고 와인 애호가인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 변장 만렙인 거 잊었어?”
“그러면 보디가드 두 명이랑 나까지 같이 움직이자. 그래야 안심될 것 같아.”
“그게 더 눈에 띄지.”
“보디가드 형들 덩치는 숨길 수 없어요. 저번에 오히려 그래서 들켰잖아.”
옆에 앉은 막내도 RJ의 편을 들어줬다.
이번에 신곡을 발표할 때까지 어떤 누구보다 리더인 RJ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걸 잘 알기에 잠시나마 자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소소한 행복이랄까.
이미 같이한 세월이 10년이 넘어가니 각각의 성향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매니저도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RJ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았으니 일정 끝내고 가장 가까운 마트에 잠시 들리자.”
일정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데뷔 12년 차인 아이돌답게 인터뷰어가 하는 질문 정도는 대부분 예상 가능했다.
당연히 대답도 술술 나왔기에 지체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콘서트의 이슈는 완전체였다.
3개월 전에 막내가 제대하면서 6인조로 공연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일곱 명의 멤버가 2년 5개월 만에 모두 뭉쳤다.
당연히 멤버들도 들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축 파티를 하자며 술을 사러 가겠다는 RJ에게 사다 달라는 것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이렇게 즐기는 여유는 오늘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는 무척 바빠진다.
무대 리허설도 맞춰야 하고 안무도 최종 점검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여러 곳에서 요청한 인터뷰도 거의 20분 단위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준비 끝나면 연락해.”
호텔에서 마련한 공간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에 각자의 방으로 흩어질 무렵에 매니저는 RJ에게 신신당부했다.
혹시라도 몰래 혼자 나가지 말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