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97화 (197/254)

주류 특화 단지 (4)

굿밤 브루어리는 어중간했다.

규모가 크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편의점 유통을 위한 20만 캔의 초도 물량을 맞출 정도는 되었다.

그들의 계약 조건을 알 수는 없으나 오저당의 경우에는 지난겨울에 ASAP를 납품하는 조건이 그 정도의 양이었다.

전국 단위로 술이 풀어야 하기에 소량 생산으로 입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은 캔을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최소 7만 리터 이상을 빚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마 미리 만들어서 준비했던 거겠지.’

내부 설비를 보니 한 번에 생산 가능한 맥주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이제 어느 정도 경력이 되니 맥주를 보관하는 용도인 알루미늄 케그(Keg)만 봐도 대충 감이 왔다.

“많이 누추하지만, 여기 앉으시죠.”

굿밤 브루어리의 이선우 사장.

그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외모만 보면 기껏해야 30대 초반쯤 되는 것 같았다. 굿밤을 시중에 내놓은 시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이른 나이에 브루어리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이선우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이미 그의 얼굴에서는 우리를 향한 경계심 따위는 없었다.

아까는 우리를 은행 직원이나 빚쟁이 같은 이들로 착각했던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이곳에 있는 설비 위에 빨간색의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날짜를 보니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내가 잠시 그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이선우는 크게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요즘 수제 맥주 브루어리 대부분이 적자라고 하더니 심각한 것 같네요.”

“종종 오저당의 기사를 볼 때마다 우리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희망이 있었는데 현실은 냉혹하더군요.”

이선우는 오저당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술을 빚는 일을 하다 보니 업계 뉴스는 챙겨봤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 창업하는 브루어리와 양조장에서는 오저당을 롤모델로 삼는 이들도 제법 많다고 했다.

“저희는 솔직히 운이 좋았던 편이라 부끄럽네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게 운만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오저당 술맛만 봐도 술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꽤 많아요.”

“굿밤에서 같이 일하시던 다른 직원분들은 어떻게 되셨나요?”

“월급은 최대한 밀리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 지난달에 다들 그만뒀습니다.”

하긴 부도 위기인데 어쩔 수 없지.

이선우는 그래도 퇴직금은 정산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며 안도했다.

그가 하는 말만 들어보면 좋은 사람 같았는데 100% 믿을 수는 없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세 치의 혀로 사람을 현혹하려 드는 이들이 세상에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굿밤 브루어리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요정들의 숫자가 제법 있었다.

향이가 괜히 여기서 빚는 맥주를 높게 평가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요정들과는 조금 달랐다.

오저당에 있는 녀석들이 조선 시대의 복장을 하고 있다면 여기는 개화기였다.

중절모에 양복을 입은 모던 보이와 드레스를 입은 모던 걸에 가까웠다.

[여기 있는 요정의 숫자가 서른넷이라고 하네요. 원래는 더 많았는데 꽤 많이 소멸하고 말았데요. 마지막으로 맥주를 빚은 게 꽤 오래돼서 다들 위험해요.]

향이가 다급하게 내게 다가와서 그 사실을 알려줬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오래 끌수록 얼마나 더 많은 요정이 소멸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오저당으로 복귀할 때 여기 요정도 모조리 데리고 가면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다른 증류소나 양조장에 있는 요정은 손을 대지 않았으나 여긴 이미 망한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오저당에 맥주를 빚는 시설이 없다는 것인데 다행히 수호와 호세가 취미 삼아 만드는 수제 맥주가 있었다.

양은 그리 많지 않으나 잠시 요정의 생명줄이 되어줄 정도는 되었다.

“혹시 여길 매물로 내놨다는 소문을 듣고 오신 건가 했는데 아니신가요?”

한동안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자 이선우는 슬쩍 여길 왜 온 건지 물었다.

매물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에 나는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 아쉬운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당연히 옆에 앉아 있는 김영채 변호사도 마찬가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 중이었다.

“아니요. 매물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오늘은 지나가는 길에 즐겨 마시던 굿밤 브루어리가 있다길래 잠시 들린 겁니다.”

“하아··· 그런가요? 하긴 오저당은 양조장이니 브루어리를 원할 리가 없죠.”

“혹시 얼마에 매물로 내놓은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슬쩍 발을 빼자 타이밍 좋게 김영채 변호사가 무덤덤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냥 들어나 보겠다는 정도의 관심에 불과했다.

“땅이랑 설비 모두 합쳐서 35억에 내놨는데 두 달 동안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네요. 더 내려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줄곧 적자만 내다가 망한 브루어리를 인수하려는 이가 얼마나 되겠어.

대부분 술을 빚는 기술도 없을 테니 어지간하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술이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빚냐에 따라 설비도 달라지게 된다.

중복 투자의 위험성 때문에 당연히 나도 이곳의 설비나 땅 그리고 건물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런 거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쌓인 빚이 어느 정도인가요?”

내 질문을 들은 이선우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살짝 기대감을 내비치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급한 쪽만 해결한다면 8억 정도고 모든 채무를 다 합치면 32억 정도 됩니다.”

“혹시 사채를 쓰신 건가요?”

“아니요.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그걸 쓰는 순간에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굿밤 맥주를 제게 넘기시죠.”

그쯤에서 나는 슬슬 딜을 걸었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이선우는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처럼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더 큰 오해를 하기 전에 정확한 조건을 말해줘야 했다.

“제가 제시하는 금액은 10억입니다.”

“네? 그게 말이 됩니까?”

“끝까지 들으세요. 저는 여기 건물과 땅 그리고 설비까지 살 생각이 없습니다.”

공주에 땅을 사서 뭐 하겠어.

설비도 케그 정도나 필요하지 나머지는 우리가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생산 단위가 다르기에 새로 설비를 들여놓아야 하는데 짐만 될 뿐이고 이전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다른 양조장을 인수했던 것처럼 내가 바라는 것은 굿밤 맥주의 상표와 생산이 즉시 가능한 기술을 가진 브루마스터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선우 씨가 오저당에 입사하면 최소 10년 동안 일하는 조건으로 계약금 5억을 더 드리겠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재능은 없으나 이선우 사장의 술 빚는 솜씨는 나도 인정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갔으니 이곳에도 요정이 생겼겠지.

그러니 그를 맥주 생산을 책임지는 브루마스터(Brewmaster)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내가 말한 조건을 듣기만 하던 그는 열심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굿밤과 함께 제가 오저당에 들어가면 15억을 받는 거네요. 혹시 그 계약금에 제 연봉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제가 양조장 노예를 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연봉은 따로 협상하시면 됩니다.”

만약에 오저당에 입사할 경우.

생산 책임자급으로 대우할 테니 성과급까지 포함하면 기본적으로 억 단위로 돈을 받아 갈 가능성이 컸다.

참고로 소담의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윤가람 과장도 작년 실수령액을 합치면 억 단위를 가뿐하게 넘겼다.

그 외에도 우리 오저당에서 억 단위 연봉을 받는 이들은 제법 있었다.

실장급 이상이거나 술을 빚는 책임자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그 정도는 받았다.

오저당이 빚는 생산량에 비해 직원의 숫자가 많지 않기에 가능한 금액이다.

대충 오저당의 연봉 체계가 어떤지 알려주자 이선우의 표정은 밝아졌다.

내가 보기에는 여길 운영하며 직원들 월급을 주느라 정작 자신은 돈을 거의 벌지 못한 것 같았다.

“나머지 17억은 여길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갚으면 될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근처 땅값이 제법 되더군요.”

“아니면 땅과 건물 전체를 저한테 파셔도 됩니다.”

그때 김영채 변호사가 한 가지 제안을 다시 제안했다. 굿밤이 보유한 토지와 건물을 13억에 사겠다는 내용이었다.

브루어리 근처의 땅값보다 20% 정도 더 낮춘 금액이었다.

이미 이 부분은 나와 의논이 끝난 것인데 굿밤을 해체할 때 부동산 쪽은 법무법인 해국에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저렴하게 챙겨가서 나중에 다시 정상가에 판매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빚이 4억 정도 남겠네요.”

“오저당에서 몇 년 정도만 일하면 완전히 탕감할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이 지날 수록 이자만 늘어날 겁니다. 파산 신청하는 것도 방법이나 그렇게 되면 앞으로 뭘 하든 걸림돌이 되겠죠.”

나는 김영채 변호사와 함께 이선우를 설득했고 꽤 긴 고민 끝에 그는 우리가 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연체 중인 금액이 상당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빚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딱히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청춘이 그대로 담긴 굿밤을 오저당에서도 계속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끌렸던 것 같았다.

“그렇게 계약하시죠.”

*

굿밤 브루어리와의 계약은 순조로웠다.

김영채 변호사는 이틀도 되지 않아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왔고 나는 곧장 이선우에게 약속했던 15억을 쏴줬다.

하지만 그의 개인 계좌 쪽은 아니었다.

빚을 탕감하는 목적이기에 은행으로 보냈는데 부동산 계약을 마친 법무법인 해국이 나서서 그의 채무를 정리했다.

나머지 4억은 오저당에 입사하며 다른 대출로 대환하여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오저당의 차기 공장장 후보였고 우리 주거래 은행에서 진행한 거라 조건을 빡빡하게 붙일 이유가 없었다.

삼척에 소재한 여러 은행 중에 오저당을 탐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가 사내 보유금을 크게 두는 편은 아니나 매달 수십억에서 백억 단위 이상을 거래하는 곳이다.

‘그만큼 귀찮게 하는 은행도 많지만···.’

그리고 요정도 무사히 데려왔다.

굿밤 브루어리에서 데리고 온 요정은 오저당 한쪽 구석에 놓인 수제 맥주 키트와 홈브루를 통해 유지 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두 부류의 요정이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오저당의 상급 요정인 검이와 향이를 제외하면 뭘 시켜도 들은 척조차 안 했다.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달까.

그 문제는 어차피 맥주를 대량 생산하며 나타날 하급과 중급 요정이 있을 테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명석 삼척 시장은 어떻게 손을 쓴 건지 도지사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주류 특화 단지 계획을 공개했다.

입주 기업은 시에서 선정할 예정이나 오저당은 터줏대감이니 당연히 프리 패스였고 500억 가까운 자금을 저금리 대출까지 해준다고 선전 중이었다.

우리도 그쯤에서 새롭게 오풍리에 만 평 정도 되는 땅에 맥주 공장을 지을 거라는 내용을 밝히며 한 몫 거들어줬다.

삼척시의 행보에 힘을 보태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RTD에 이어 맥주 사업에 300억 투자 준비 중인 오저당]

[오저당 맥주 사업에 출사표, 삼척에 연간 3천만 리터 규모의 공장 설립]

[전통주를 빚는 양조장에서 종합 주류 기업으로 탈바꿈 중인 오저당]

당연히 관련 기사도 쏟아졌다.

이제는 우리가 기사 좀 올려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지역 신문 정도는 황 이사와 친한 기자 몇 명에서 슬쩍 흘리면 곧장 다음 날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그 기사는 전국 단위로 뉴스롤 보도하는 쪽으로 옮겨갔는데 상당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대부분은 오저당에서 내놓을 맥주를 꽤 기대했다.

지금껏 내놓은 술의 종류가 다양한데 대부분 평균을 가뿐하게 넘어서 상위권에 올라설 정도의 것들만 내놓은 덕분이다.

그렇게 한동안 바쁘게 지낼 무렵.

나는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대구로 내려가신 선생님의 아드님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이 어젯밤에 또 쓰러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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