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GD USA (4)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50일 정도까지.
버번을 숙성한 시기는 조금씩 달랐다.
모든 술을 한 번에 빚을 수 없기에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인위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맞출 수는 있었다.
향이와 검이 덕분이었다.
가장 늦게 술을 빚은 순서부터 조금 더 많은 시간 동안 관리를 해주면 된다.
그렇게 완성된 버번은 모두 이십여 종에 달했고 옥석을 가리기 위한 준비도 모두 끝냈다.
향이가 발견한 매시빌이 A 라인.
옛 문서로 유추해서 만들어낸 B 라인.
그리고 두 매시빌을 믹스해서 조율했거나 완전히 다른 매시빌로 만든 C 라인까지 크게 보면 셋으로 나뉘었다.
“한 번에 진행하실 건가요?”
케이티의 질문에 나는 고개 저었다.
그걸 한 번에 했다가는 끝나기 전에 취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테이스팅을 하며 마시는 양도 작진 않았다.
한두 모금씩만 마셔도 최소 반병 이상을 마시게 될 텐데 취하지 않더라도 과연 마지막쯤 되면 제대로 맛이 느껴질까.
이번에 버번의 매시빌을 픽스하면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니 신중해야 한다.
술이라는 게 한 번 내놓게 되면 최소 몇 년에서 수십 년 동안 판매하게 된다.
더구나 파사데나의 부활이자 시작인 이 시점에서 첫인상을 좋게 남겨야 한다.
이곳도 분명히 오저당의 현지 법인이니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터라 내가 직접 와서 신경 쓰는 것이기도 했다.
브랜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테이스팅해야 할 술이 너무 많으니 오전과 오후에 한 개의 라인씩 진행하고 내일 마무리하는 걸로 하시죠.”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확정 짓겠네요.”
“그건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죠.”
만약에 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지금까지 2개월 넘게 파사데나에서 했던 작업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기존의 매시빌은 기억에서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마 1년 이상 걸리겠지.
나와 향이가 언제까지 여기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한국에서 진행되는 일을 체크하기도 바빴다.
맥주 공장과 인수를 끝마친 마이크로 양조장의 설계도 픽스부터 업체를 선정해서 곧 준공도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RJ와 내가 살 집도 지어야 하는데 우리 둘 다 바빠서 설계조차 아직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우선은 A라인의 버번 6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A-1부터 시음한 뒤에 각자 느낀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테이스팅의 진행은 케이티가 맡았다.
OGD USA에 들어오기 전부터 학생 신분인데도 유명 증류소의 테이스터로 일한 경력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테이스팅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술의 맛을 보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번 테이스팅에 제품 개발팀과 홍진구의 의견도 듣기 위해 함께하고 있었으나 미세한 차이까지 알아채지는 못했다.
“A-3는 너무 씁쓸한 맛이 많이 나오는 것 같고 A-5는 깊이가 없어요.”
“저도 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미각이 상당히 좋으신 것 같아요.”
“칭찬 감사합니다.”
케이티를 제외하면 그나마 내가 미각이 발달한 편이었는데 지금껏 다양한 술에 천만 원 넘게 투자를 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은 없네요.”
이곳에서 발견한 매시빌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아직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예전 매시빌 그대로 술을 빚어서 성공할 거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음식과 술은 그 시대에 맞춰서 바뀌기 마련이다.
100년 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식문화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현지에서 자라나는 것만 먹었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온갖 것들이 수입된다.
다양한 경험이 가져다주는 미각의 확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현대적인 해석이 가미된 C 라인이 변수가 될 것 같았다.
“오전 테이스팅은 여기까지 하죠. 나머지 B 라인은 식사 후에 다시 할게요.”
케이티는 테이스팅의 종료를 알렸다.
그녀와 제품 개발팀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쉬기 위해서 홍진구와 함께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그의 사무실에는 제법 안락한 소파가 있었는데 요즘은 쉐어 오피스처럼 홍진구와 함께 썼다.
따로 일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낭비였고 술에 대한 오저당의 DNA를 심어 놓는 것도 하나의 목표였다.
같은 목표로 끊임없이 달려갈 필요가 있다. 엄청난 규모로 커지고 있는 OGD 멕시코를 호르헤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주류 유통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술 하나가 빚어지는 게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유수호 이사와 함께 오풍주를 만들 당시에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때는 오저당이 막 시작할 시기였는데 어떻게 그런 시도를 하신 겁니까?”
“당시 상황상 양으로는 승부를 보기 어려웠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결정이 옳았다.
자리를 잡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최근 오풍주는 미국 외에도 일본과 동남아까지 수출하고 있었다.
벽향주와 ASAP 덕분이었다.
오저당의 술은 믿고 마실만하다는 인식이 준 결과였는데 대부분 고급 주점 같은 곳에서 소비되고 있다고 들었다.
“버번도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건 케이티의 몫이니 그녀만 믿고 가시면 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의 미각에 대한 재능은 최고니까요.”
“확실히 다르긴 하더군요.”
보통 사람이 놓칠 정도의 미세한 맛도 케이티는 절대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더구나 맛을 표현하는 것도 상당히 다채로워서 시를 읊는 느낌마저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빚은 버번 중에 적합한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매시빌을 짜서 빚어야죠. 완성될 때까지 무한 반복이 될 겁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무섭네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냐고?
이게 다 향이가 해준 말 덕분이었다.
녀석은 파사데나에서 빚은 술 중에 만족할 수준의 것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른다.
일부러 미리 알려주지 말라고 했다.
기왕에 진행하는 테이스팅이니 케이티의 실력과 나의 직감을 테스트하고 싶었다.
길게 보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요정의 도움은 매우 중요하지만,
계속 거기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향이와 멕시코에 있는 판초 같은 존재가 파사데나 증류소에 나타날 거라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 문제는 꽤 중요했다.
관리해주는 요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술의 상태를 보고 요정을 컨트롤할 수 있으려면 중급 요정은 되어야 한다.
하급 요정도 지시를 내리고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는 있으나 자체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웠다.
그러니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케이티가 실력을 발휘해줘야 했다.
어쨌든 그날 오후에도 B 라인의 버번을 테이스팅했으나 마땅한 소득 없이 끝내야 했고 다음 날에 C 라인을 시작했다.
이제 범위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8종에 달하는 버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테이스팅할 버번은 두 종의 매시빌을 믹싱한 것과 배럴의 토스팅과 차링 방식을 바꾼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케이티는 시음 시작하기 전에 설명부터 해주었고 진행을 도와주고 있는 데브라라는 직원이 잔을 나눠줬다.
여기서 그녀가 말한 토스팅과 차링은 술을 숙성하는 배럴의 내부를 굽고 태우는 과정을 의미했다.
참고로 토스팅은 10분 가까이 낮은 온도로 천천히 굽는 방식이고 차링은 고온으로 1분 이내에 태우는 방식이다.
당연히 어떤 방식을 취하냐에 따라 버번의 풍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긴 했다.
“C-1부터 마셔보죠.”
그때부터 다시 테이스팅의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나도 위스키 잔을 들어서 여러 항목에 대해서 평가를 했다.
다만, 아주 짧게 숙성한 터라 술의 색에 대한 것은 평가하긴 어려웠다.
그다음은 술을 마시며 동시에 향을 느껴보는 것인데 버번이 강한 편이라 향만 맡아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데 역시 핵심은 맛이었다.
버번을 살짝 머금은 뒤에 입안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며 맛을 봤는데 그걸 여기서는 켄터키 허그라고 부른다.
혀는 각각의 부위에 따라 맛을 느끼는 것이 다르기에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다.
처음 느껴지는 맛과 마지막에 술을 넘긴 뒤에 식도에서 느껴지는 맛은 또 다르다.
그걸 피니시 또는 여운이라 표현하는데 대부분의 술은 여기서 판가름이 난다.
연애할 때 처음 만난 순간보다 헤어지며 어떤 끝맺음을 했냐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과 비슷하달까.
아무리 첫 인상이 좋다고 하더라도 여운이 나쁜 편이면 판매가 어려워진다.
“으윽···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네요.”
실제로 그런 술도 나왔다.
홍진구는 한입 맛을 보더니 이내 생수로 입을 헹궈냈다. 나도 비슷한 느낌이라 더 맛볼 생각도 않고 잔을 내려놨다.
숙성하는 오크통인 배럴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배럴 주문하는 업체에 대한 관리를 잘해야 할 것 같네요.”
“신경 쓰겠습니다.”
“다음 버번 진행하시죠.”
케이티에게 신호를 주자 C-6 번호가 붙여진 잔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
이걸 제외하면 이제 겨우 두 종류의 버번 샘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못 알아채고 놓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는데 C-6의 잔을 쥐고 들어 올리는 순간에 그런 의구심은 사라졌다.
뭐랄까··· 느낌이 왔다고 해야 할까.
지금껏 다양하게 빚어낸 여러 버번을 테이스팅하고 있었으나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어느 날.
장작을 태우며 그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짧은 시간 숙성했는데도 깊게 우러난 느낌이랄까.
과연 맛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곧장 한 모금 마시자 이제야 향이가 뭘 말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버번 특유의 묵직한 돌직구가 입 안으로 꽂혔다.
‘바로 이게 버번이지!’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아직 숙성이 완벽하게 된 것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이 없진 않으나 가능성은 충분히 보였다.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이게 맞냐며 향이를 바라보자 녀석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게 제가 말했던 그 술 맞아요.]
“입에 들어오기 전에 느껴지는 무화과 향이나 살짝 스파이시한 맛까지 모든 것이 다른 술보다 확실히 좋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테이스팅할 때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될까 싶어서 마지막에 말하던 케이티마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C-6의 차이점이 뭐죠?”
“잠시만요. 블라인드 테스트라 저도 확인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데브라 이게 어떤 배럴에 담겨 있던 거죠?”
“여기 있습니다.”
케이티는 시음 진행을 보조해주고 있는 데브라에게 물었고 그녀는 곧 C-6이라 적힌 서류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줬다.
거기에 적힌 여러 단어와 내용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쿼터 캐스크’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배럴의 1/4 크기 정도인 캐스크를 이용했다는 뜻이었다.
종종 쿼터 캐스크로 빚어서 파는 제품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버번 증류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캐스크였다.
50리터 불과한 크기라 작아서 관리가 쉬우나 증발하는 양이 꽤 많은 탓이다.
“그래서 다른 술보다 숙성이 훨씬 더 빨랐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이건 차링한 캐스크라 오히려 부드러워지는 게 정상이잖아요.”
“사용된 재료의 차이도 있네요. 이건 다른 버번과 다르게 와프시 밸리 종과 마치종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요.”
제품 개발팀은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다.
확실히 조금 독특한 재료 배합이긴 했다.
와프시 밸리 종은 오늘날까지 재배 중인 몇 안 되는 공개 품종이나 생산량이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는 품종이기도 했다.
‘어쩌면 와프시 밸리가 키 포인트였던 건지도 모르겠네.’
재료 수급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 문제는 제품 개발이 아닌 경영과 관리를 맡은 홍진구가 풀어야 할 문제였다.
거기에 슈미트와 페레즈의 지원이 있을 테니 그다지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아직 남은 샘플이 있으나 그쯤에서 이틀 동안 진행된 테이스팅을 마치기로 했다.
이미 다들 C-6에 완전히 꽂혀 있기에 더 이상 진행할 의미가 없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 것 같으니 이거로 결정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