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GD USA (3)
같은 날 출발하는 일정이지만,
홍진구와 같은 비행기는 아니었다.
그가 나보다 3시간 정도 일찍 루이빌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같이 이동하자는 핑계로 나와 다미안을 기다려줬다.
“공항 출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다미안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카톡으로 홍진구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마침 나오고 있던 캐리어를 집었다.
평소보다 무게가 상당했다.
일주일 정도씩 다녀오던 기존의 출장과는 캐리어의 크기부터 달랐다.
이번 일정이 그만큼 길다는 의미였다.
내 예상으로는 적어도 두 달 이상 렉싱턴에 머물며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시간도 들이지 않고 버번의 맛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나마 향이가 있어서 그 정도였다.
일반 증류소였다면 새로운 제품 출시 전에 들어가는 준비하는 시간이 몇 배 이상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여깁니다.”
출구 밖으로 나오자 선글라스를 낀 홍진구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가 그리 신난 건지 입가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도착해서 식사하고 책 좀 읽다 보니까 3시간은 금방 가던데요.”
“위스키 책이네요?”
슬쩍 왼손에 들고 있는 책 쪽으로 시선을 내려다보니 위스키에 관련된 표지가 보였다.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세팅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표지도 다소 지저분해졌고 옆면에는 포스트잇 같은 것을 잔뜩 붙여 놓은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티가 났다.
주류 유통과 생산은 완전히 다른 분야니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만 했다.
“증류소를 책임지는 자리인데 적어도 위스키가 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읽어보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열정적이시네요.”
“뭔가 의욕 과다인 것 싶어서 적당하게 조절하려고 하는데도 쉽지 않네요.”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심양에 있을 당시의 일을 슈미트를 통해서 자세하게 들었는데 생각보다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았다.
일에 치여서 살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일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상사들 상대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썼던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그게 습관처럼 굳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장거리를 뛰는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는데 몸을 너무 많이 풀어놓으면 막판에 힘을 못 쓰게 된다.
완급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국이나 멕시코에서도 생산량에 치여서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기에 그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야기를 해주자 홍진구는 금방 이해했다.
“진짜 달려야 할 때를 위한 에너지 정도는 항상 남겨 놓겠습니다.”
“슬슬 가보실까요?”
“그런데 여기서 증류소까지 어떻게 가실 건가요? 루이빌에서 렉싱턴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 것 같은데요.”
나와 함께 가겠다고 할 때.
홍진구에게 따로 이동하는 방법을 알아볼 필요는 없다고 미리 말해줬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미 다미안은 우버를 불렀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서 우버를 타고 루이빌 시내까지만 나가면 됩니다.”
홍진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가든지 우리 뒤만 쫓아오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잠시 뒤에 우버를 탄 우리는 루이빌 시내의 자동차 대리점에서 내렸다.
“설마, 차를 사시려고요?”
“사긴 할 건데 제가 탈 거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오저당에서 사이닝 보너스로 사드릴 테니 홍진구 씨가 원하는 차를 고르시면 된다는 의미죠.”
내 말을 들은 홍진구는 꽤 놀랐는지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멈추어 섰다.
이런 이야기는 입사 전에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게 아니었다.
오저당은 올해 임직원급에 한해서 차량을 한 대씩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출국하기 전에 재무를 책임지고 있는 서준석 부장과 논의 끝에 결정한 사항이었다.
수호와 황 이사 그리고 올해 이사로 올라갈 조택훈 공장장이 여기 포함됐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슈미트와 홍진구만 자격이 되었다.
슈미트는 당연한 것이고 홍진구는 증류소를 책임지는 플랜트 매니저(Plant Manager)이기에 임원급 대우를 해줬다.
다만, 두 사람에게 지급될 차량의 등급에서는 차이가 조금 있었다.
“사이닝 보너스라고요?”
“법인 차로 뽑아드리려고 알아봤는데 출퇴근용은 인정도 안 되고 개인적으로 타고 다니면 탈세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어서 조금 그렇더군요.”
“미국이 탈세에 있어서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칼 같기는 하죠.”
홍진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했다.
미국은 기업 비리에 대한 처벌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제 사범을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나도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이나 미국의 처벌 수위가 맞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한국에서 1조를 사기 쳐도 15년 형에 불과한데 미국에서 다단계 범죄는 150년이고 보험 사기는 850년도 나온다.
이런 거를 보면 한국은 사기꾼들과 횡령하는 이들에 대해서 너무 관대한 것 같았다. 오죽하면 수십억을 빼돌리고 10년쯤 살다가 나오는 게 이득이라고 할까.
‘나름 억대 연봉자라고 봐야 하나···.’
더구나 이곳은 미국이다.
차 없이 사는 게 힘든 동네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일을 시키러 보냈으면 어느 정도 편의 사항을 봐줘야 했다.
하지만 홍진구는 선뜻 고르지 못했다.
딜러가 여러 차를 소개해주고 있었으나 막상 어느 수준으로 골라도 되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5만 달러 이내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더 좋은 거는 나중에 근속 연수가 차면 그때 사드릴게요.”
“어휴! 5만 달러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어서 고르시죠. 아마 증류소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제야 홍진구는 여러 차 중에 픽업 트럭을 골랐다. 깡통 차량은 2만 달러도 안 되었는데 옵션 때문에 거의 4만 달러까지 올라갈 정도였다.
그때부터는 일 처리가 빠르게 진행됐다.
LA에 있는 페레즈가 비용을 곧장 쏴줬고 딜러의 확인을 받은 후에 우리는 그 차를 곧장 인수 받아서 타고 나왔다.
한국에서는 차를 받으려면 거의 일 년 가까이 기다렸던 시기도 있었는데 여긴 그냥 타고 나가면 되니 꽤 편했다.
그 덕분에 파사데나까지 가는 차편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여기 머무는 동안에는 차를 종종 써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언제든지 말만 하십쇼. 아예 스페어 키를 드릴까요?”
나는 그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키를 받은 것은 다미안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파사데나 앞에 도착했다.
증류소 앞에 차를 멈춘 홍진구는 상당히 흥분된 표정으로 둘러보며 아직 공사 중인 증류소 곳곳을 눈에 담았다.
앞으로 일하게 될 새로운 직장이니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한 달 사이에 꽤 많이 지어졌네요.]
향이도 감회가 새로웠던 걸까.
한국에 들어갔다가 오는 사이에 어느덧 꽤 높아진 증류소 건물을 보며 신기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누볐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사무실에서 케이티와 직원들이 나와서 반겨줬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보스로 오게 된 홍진구를 맞이하러 나온 거겠지.
“파사데나의 디스틸러인 케이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케이티는 홍진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에 직원들을 간단하게 소개해줬다.
어차피 몇 명 되지 않는 터라 그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직 파사데나는 신제품 개발팀과 관리자까지 합쳐도 다섯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홍진구가 여길 맡게 됐으니 인력을 추가하는 일을 곧 시작할 것이다.
그 뒤부터는 사무실 옆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으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당연히 그 모든 일의 중심은 홍진구가 되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개발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하루쯤 기다려줄 인내심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케이티와 드디어 버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파사데나 매시빌 복원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그 과정을 요약하면 골동품 가게와 컬렉터분들이 가진 물건에서 파사데나와 관련된 문서를 찾아냈다는 거죠.”
“무슨 문서를 찾았다는 건가요?”
“파사데나에서 어떤 농장의 작물을 썼는지와 배합 비율에 대한 힌트가 될만한 거래 영수증이요.”
케이티는 자신이 어떻게 그걸 찾아낼 수 있었는지 나한테 설명해줬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됐다.
파사데나 증류소는 이곳 렉싱턴의 토박이이자 수십 년 이상 디스틸러로 일한 분들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역의 특성상 버번과 증류소에 대한 것을 모으는 컬렉터가 존재했는데 그분을 소개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컬렉터의 소장품을 확인하던 중에 그녀는 마침내 파사데나와 관련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추가로 당시 증류소 내부 사진도 찾았다고 했다.
“그런 노력까지 기울였을지는 상상도 못 했네요. 그 문서는 어디 있나요?”
“제가 개인적으로 사들이려고 했는데 저희 할아버지랑 친한 분이라 선물로 주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몇 장의 파사데나 증류소의 문서를 꺼내서 보여줬다.
그곳에는 우리가 풀지 못했던 몇 가지의 의문에 대한 힌트가 있었다.
“생각보다 보리의 비율이 그리 높진 않네요. 거의 안 들어간다고 봐도 될 것 같은 수준이에요.”
이 정도 비율이면 버번 삼 대장 중에 버팔로를 트레이드 마크로 쓰는 버번과 거의 흡사한 수준이라 보여졌다.
실제로 호밀의 비율도 기존에 우리가 발견한 매시빌에 비해 꽤 높았다.
“기존의 매시빌과 차이가 꽤 있네요.”
“네, 제게 전해주신 매시빌은 초창기 버전인 것 같고 이후에는 배합 비율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어떤 게 더 좋은지 확인해봤나요?”
“아직 못 해봤죠. 이걸 찾아내자마자 연락을 드린걸요.”
케이티는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직 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여기 온 이유가 같이 그 과정을 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날부터 케이티와 신제품 개발팀은 물론이고 나까지 포함되어 여러 배합 비율로 버번을 빚는 것을 시작했다.
이번에 만드는 버번의 종류는 무척 다양했다.
향이가 발견한 매시빌과 추가로 정보를 얻어 변형된 매시빌 그리고 그 수치의 중간쯤으로 배합을 변경한 것들까지.
거기에 재료가 되는 옥수수 등의 품종을 바꿔가며 빚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스무 개가 넘을 정도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버번은 미리 주문한 내부를 구워 놓은 오크통에 담겼다.
실제 숙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과정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 뒤로는 향이와 검이의 몫이었다.
다른 이들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세워지는 증류소이기에 할 일은 넘쳐났다.
버번을 숙성하는 사이에 슈미트는 드디어 OGD USA로 취임했고 그 자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LA도 다녀와야 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향이와 2박 3일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전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다닌 탓이었다. 그리고 향이에게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버번을 그냥 두고 다녀올 수 없다는 내 말에 수긍하며 남긴 했으나 삐져서 그걸 풀어주느라 상당히 고생했을 정도였다.
그때 빛을 발한 것이 300만 원 정도 하는 26년이나 숙성한 버번위스키였다.
[키아아··· 환상적이네요. 파사데나 버번도 이 정도 수준의 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저당 기준이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최소 3년만 숙성해도 얼추 비벼볼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여긴 아직 요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숙성 중인 술이 있긴 했으나 테스트용 샘플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경험을 보면 적어도 버번을 빚는 양이 어느 정도까진 올라와야 했다.
어차피 그건 매시빌이 완성되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 여겼기에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꾸준하게 팔 수 있는 버번의 매시빌 확보가 중요했다.
그러는 사이에 두 달이란 시간이 모두 흘렀고 마침내 케이티와 나는 지금까지 빚은 버번의 결과물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결과를 봐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