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밤 (3)
라니는 요즘 꽤 바쁘게 지냈다.
현재 맡은 신제품 디자인은 굿밤 하나만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RJ의 감저도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수준은 아니었다.
예전에 제안했던 것을 받아들여서 마이크로 양조장의 신제품은 모두 외주 업체에 맡겨서 디자인을 뽑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이 없진 않다.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것을 체크해서 보고하는 것도 라니의 몫이었다.
어쨌든 수호와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따로 임원 회의를 잡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이전에 먼저 보고 싶었다.
라니는 우리 둘이 동시에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역시 예상을 안 벗어나네. 너네도 성격 참 급해.”
“지금까지 네가 꼭꼭 숨겨 놓고 한 번도 안 보여줬으니 그렇지.”
“무슨 컨셉으로 진행하는 거야?”
“보여줄 테니 기다려봐. 대신 첫인상이 어떤지 3초 이내에 대답해야 해.”
소비자의 시선으로 보라는 의미다.
상점에 진열된 제품을 훑는 속도는 대부분 1초 미만인 경우가 많다.
평범한 제품은 인지하기도 전에 그냥 한 번 스치듯 시선이 지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고르는 것은 평소 자주 사는 제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없진 않다.
독특한 디자인이거나 호기심을 끄는 제품은 경쟁을 뚫을 가능성이 있다.
오저당의 제품 특성상 차근차근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크지만, 초반 매출은 디자인에 의해 결정된다.
최대한 빠르게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이 순간이 무척 중요했다.
“하나···둘···셋!”
라니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순간.
모니터에 한 장의 그림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보라빛이 살짝 감도는 밤바다 위에 떠 있는 보름달과 잔물결의 윤슬까지 몽환적인 분위기로 표현해놨다.
그리고 하늘에는 별도 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 들었는데 불과 한 달 전쯤에 직원들과 바닷가로 회식을 갔다가 밤에 본 풍경과 매우 닮아 있었다.
“좋다. 굿밤이란 제품명이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하지만 너무 톤이 어두워서 스타우트 맥주인 줄 착각할 것 같아.”
나는 첫인상에서 느껴졌던 것들을 필터 없이 그대로 라니에게 전달해주었다.
지금은 눈치를 보며 말을 빙빙 돌리고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했는데 밤이란 컨셉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더라.”
“그래도 은색으로 제품명이 들어가니 꽤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아. 확실히 지금까지 본 맥주와 많이 다르다.”
“나도 도찬이 말에 동의해. 그런데 라벨 단가가 제법 나올 것 같지 않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지. 라벨값이 나와봐야 얼마나 나오겠어?”
수호의 걱정은 이해되지만,
라벨이 비싸 봐야 라벨에 불과했다.
더구나 오저당은 이미 다른 부분에서 상당한 비용 절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요정들의 효과만 받으면 맥주도 다른 브루어리보다 생산량이 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정도의 비용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우선 단가부터 뽑아보고···.”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지.”
라니는 곧장 출력해 놓은 서류 몇 장을 꺼내서 우리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라벨의 예상 금액이 정리되어 있었다.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한 거야?”
“분명히 단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혜성에 견적 요청해놨지.”
혜성은 오저당의 라벨을 맡기는 업체다.
과거에 작은할아버지가 운영할 때부터 거래하던 곳인데 성장세가 상당했다.
오저당이 맡기는 라벨을 거의 독점하며 납품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매년 그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오저당의 라벨만 6천만 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게 국내 생산량을 의미하진 않는다.
국내 외에도 멕시코에서 빚는 돈 레오넬 라벨도 거기서 만든다. 현지에서 만들어 보려고 했으나 퀄리티가 문제였다.
거기에 운송료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돈 레오넬의 순수익을 생각하면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차피 부피도 그렇고 무게도 그리 크게 차지하지 않았기에 멕시코로 수출되는 소담과 벽향주에 끼워서 가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기존의 라벨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 되는 금액이네.”
“다운 그레이드를 시킬까? 몇 가지 옵션만 조절해도 많이 줄어들 거래.”
“됐어. 라니 네가 봤을 때 지금 이 상태가 최선이면 그대로 가자.”
마음에 쏙 든 라벨이다.
굳이 여기서 바꿀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정을 지을 수는 없기에 스마트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마침 내일 오전에 전체 직원 회의가 있으니 그 자리에서 직원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하자.”
“임원 회의에서 정하는 거 아니었어?”
“기왕에 하는 거 다른 사람들 의견도 물어보려고.”
우리가 빚을 예정인 굿밤의 타겟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층이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직접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이사님들이랑 직원들 단톡방에 미리 공지해놓을게. 아! 이것도 판촉물 만들 거지?”
수호의 질문을 받은 라니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곧장 그렇다며 대답했다.
“예전에 만들었던 벽향주와 소담 참고해서 진행해야지. 물론, 판촉용 잔의 사이즈는 맥주잔으로 바꿔야하겠지만.”
“기왕에 만드는 거 폭탄주 전용 잔도 만들어 보자.”
내 제안을 들은 라니와 수호는 뜬금없이 무슨 폭탄주 잔이냐며 나를 바라봤다.
이미 그런 잔은 시중에 매우 많았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조금 달랐다.
“오저당에서 빚는 술이 많잖아. 모두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나 이왕에 섞을 거면 제대로 하란 의미지.”
“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소담과 벽향주 그리고 굿밤 조합의 비율을 알려주자는 말이잖아?”
“맞아. 그렇게 되면 굿밤과 함께 다른 술의 매출도 소폭이나마 올라가겠지.”
핵심은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굿밤에 다른 소주를 섞으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소담이나 벽향주가 들어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섞어서 마신다는 것은 그만큼 가격의 부담이 낮아질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예를 들어 40도짜리 소담으로 과연 몇 잔의 폭탄주가 만들어질까.
애초에 알코올 도수가 상당히 높기에 일반적인 소맥을 만들면 최소 열 다섯 잔 이상은 나올 거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그 정도면 한 병을 시키더라도 몇 명이서 충분히 마실 수 있을 정도다.
“예전에 굿밤이랑 소담을 말았을 때 기억나네. 그때 완전히 꽂혀서 한 달 가까이 그렇게만 마셨잖아.”
“벽향주보단 소담이 잘 어울리긴 했지.”
“그러면 소담만 넣는 건 어때?”
라니는 표시하는 게 많아질수록 조잡해 보일 것이라 우려했다.
“20도 아니면 40도?”
“두 가지 모두 넣어야지. 그 정도까진 괜찮을 거야.”
“그건 라니 네가 알아서 정해.”
판촉물 디자인은 전적으로 라니의 몫이었고 그만큼 성과를 내기도 했다.
라니가 만들어서 증정 및 판매를 하고 있는 물건들의 인기는 상당했다.
라니와 판초 캐릭터 덕분이었다.
작년부터 판매하고 있는 이모티콘은 지속적인 인기를 끌며 여전히 상위권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오죽하면 캐릭터 산업 쪽으로 확장을 하자는 말도 주변에서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봉제 회사에서 향이와 판초의 라이센스를 사서 인형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도 있었다.
그 제안 중에 몇 개는 받아들였다.
누구보다 향이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요정의 모습을 가진 인형이 아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줄 거라 믿었다.
“아··· 조금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거야?”
“다음 달에 썸 페스티벌이 열리잖아. 거기에서 굿밤이 등장해줘야 했는데.”
수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여름 축제에서 맥주는 핵심이다.
우리가 맥주를 빚기로 결정했던 계기도 썸 페스티벌이었다. 하지만 라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어차피 맥주는 내년 축제 생각하고 시작한 거잖아. 이제 막 맥주 공장을 짓기 시작했는데 방법이 없으니 포기해.”
굿밤 브루어리를 인수했으나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공장을 짓고 맥주를 빚어서 상품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거는 아니지.”
“맥주를 빚을 공장도 없는데 무슨 재주로 만들어?”
“그걸 꼭 여기서 만들 필요는 없잖아.”
“굿밤 브루어리! 아직 거기 법무법인 해국에서 안 팔고 가지고 있다고 했지?”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수호는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아직 공주에 있는 브루어리에 모든 설비가 남아 있었다.
법무법인 해국에서 사들인 뒤에 팔 생각이었으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헐값에 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쉽게 팔릴 매물이 아니잖아.”
“그러면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거기서 계속 만들면 되겠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공주에서 맥주를 계속 빚을 거였다면 아예 모든 것을 사들인 후에 반년쯤 돌렸다가 다시 팔아치웠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관리도 어려웠다.
하지만 단기 임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한 달만 임대할 거야. 그 정도면 맥주 빚는 한 사이클 정도는 되잖아.”
“거기 생산량이 많지 않아서 축제에서 소비되는 게 전부일 것 같은데?”
“오히려 꽤 많이 남을걸.”
썸 페스티벌이 엄청 유명한 전국 단위의 축제라고 보긴 어려웠다. 아직은 여름 휴양객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 봐야 했다.
심지어 동해안에 있는 다른 지자체의 축제와 비교해봐도 작은 편에 불과했다.
보도 자료에서는 전년도 축제에 3만 명이 찾았다고 하는데 믿음이 안 갔다.
통계를 내는 방식이 주먹구구였다.
나도 여기 삼척에 살면서 두 번이나 축제에 가봤는데 체감상으로는 2만 명은 절대 안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려도 썸 페스티벌에서 굿밤이 폭발적인 판매량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라니는 궁금한 게 있는지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러면 굿밤 라벨이랑 보틀도 바로 적용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하는 거야?”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지금 준비하는 거는 개량 작업을 모두 끝낸 맥주에 사용할 거니 걱정하지 마.”
기존의 굿밤도 꽤 좋은 맥주였으나 완성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괜히 어중간한 상태의 맥주에 새로운 라벨을 사용해서 이미지를 소비할 생각은 없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라벨은 남아 있고 보틀은 주문만 하면 된다니까 예전 거 그대로 사용할 생각이야.”
“혹시나 곧장 적용하자고 할까 봐 깜놀했잖아.”
“그러니 굿밤에서 넘어온 이선우 과장이랑 생산직 네 명 정도 뽑아서 그쪽으로 출근하게 준비 좀 해줘.”
그 일은 수호의 몫이었다.
생산직의 관리는 녀석의 업무였고 한 달이란 기간 동안 출장 가야 하는 직원을 뽑는 것도 녀석이 감당해야 했다.
“당연히 출장 수당은 따로 줄 거지?”
“물론이지. 하지만 다시 브루어리를 돌리려면 할 일이 꽤 많을 거야.”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미 수호는 생산직 중에 누굴 보낼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한 곳에서 왕창 뽑긴 어렵고 각각의 술을 담당하는 파트에서 균일하게 빼야 했다.
인력의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조만간 공사가 끝날 마이크로 양조장과 맥주 공장에서 일할 이들을 미리 뽑아서 교육 중인 덕분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향이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단기간이나마 굿밤을 빚는다는 말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굿밤 브루어리에서 데려온 요정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날이 더 많았고 활동량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요즘 향이는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빚는 맥주의 양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여겨졌다. 부랴부랴 홈 브루어리까지 동원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떻게든 소멸하는 것은 막고 있으나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오죽하면 다른 브루어리에 잠시 데려다가 놓을까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나는 그 해결책으로 굿밤을 잠시 생산해서 숙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빚는 양이면 적어도 연말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다.
‘이걸로 급한 불은 껐다고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