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11화 (211/254)

굿밤 (4)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햇살.

그리고 끊임없이 울리는 파도 소리.

해안가에 줄지어 세워진 파라솔 그리고 물놀이와 스노클링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드디어 여름이 찾아왔다.

본격적인 휴가철에 돌입한 탓에 전국의 해안가는 물론이고 계곡에도 수많은 이들이 찾아가고 있었다.

삼척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호항과 인근의 해수욕장은 발을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어린아이들과 놀러 온 가족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가를 떠나온 커플들.

그리고 우정을 쌓기 위해 온 친구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삼척을 찾아왔다.

그중에는 황서연도 있었다.

오풍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삼척에 있는 해변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며 만난 친구들인데 이제는 하루라도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낯설 정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들이 처음으로 다 함께 떠난 3박 4일 여행이기도 했다.

“서연아. 여기 정말 한국 맞지?”

“완전 좋다. 어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가서 스노클링 하자.”

“나 수영 못하니까 서연이랑 너희들끼리 들어가.”

“여기 앞쪽은 얕아서 괜찮아. 그리고 구명조끼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

친구들은 다들 장호항의 모습을 보고 신기한 듯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정작 서연이는 그리 흥이 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유명한 여행지도 아니고 태어나고 자란 삼척이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감흥이 별로 없달까.

원래 아무리 유명한 여행지라도 거기서 살면 일상이 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장호항과 이 인근의 해수욕장은 어릴 때부터 자주 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어릴 때 보았던 장호항은 한적하고 좋았는데 휴가철이라 그런지 아주 시끄럽고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보니 바뀐 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엄마는 뜬금없이 회사 생활을 시작하더니 오저당의 실장님이 됐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잘된 일이었다.

보통의 커리어 우먼과는 다른 일을 하시지만, 그래도 연봉이 상당한 건지 요즘 들어 용돈도 듬뿍듬뿍 주셨다.

“까아하! 서연아 너도 어서 들어와.”

“여기 완전 시원하다.”

“발밑에 잘 봐. 성게에 발바닥 찔리면 엄청 아프다.”

“엇! 정말 여기 성게 많긴 하다.”

“읔··· 나 성게알 좋아하는 데 저건 좀 징그럽다. 바늘보다 더 날카로운 것 같아.”

투명한 푸른빛 바닷물 아래로 검은 것들이 지뢰처럼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서연의 친구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다들 서울과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 자란 터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연이는 수영 꽤 잘하네. 역시 삼척 출신이라 그런가?”

“나는 산골 소녀에 더 가까워. 우리 집은 태백이랑 가까워서 바다는 제법 멀거든.”

“맞아. 나 1학년 때 서연이네 집에 놀러 갔잖아. 거기 계곡이 정말 죽여줘.”

“우와! 기대된다.”

그녀들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이곳 장호항이 아니었다. 해안가에서 이틀 머물고 덕월 계곡을 가기로 했다.

예전에 같이 왔다던 친구가 하도 그곳이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덕분에 오게 된 여행이라 빼놓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 물놀이를 하던 그녀들은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 것인지 정신 차려 보니 어느덧 몇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너희들 배고프지 않아?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이 근처에서 먹을까?”

“여기서 먹으면 비쌀 거야. 차라리 삼척 시청 쪽에 가서 숙소에 체크인부터 하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먹자.”

서연의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샤워는 할 수 있었으나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씻을 수 있진 않았다.

다소 찜찜한 느낌인데다가 화장도 다 지워져서 숙소부터 들리기로 했다.

삼척에 있는 루나비치 리조트.

그곳은 서연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집이 코앞에 있는 삼척 시민이기에 그곳에서 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진아 아버님이 예약해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노숙할뻔했어. 어떻게 빈방이 하나도 없는 거야?”

“정말 운이 좋았어. 이 시기에는 쉽게 자리가 안 나온다고 하더라.”

“고맙다고 꼭 말씀드려줘.”

“그런데 오늘 축제하는 것 같은데?”

진아라는 친구가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본 것은 썸 페스티벌이란 축제를 홍보하는 현수막이었다.

“엇! 그것도 숙소 바로 앞에서 하네. 우리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

“그런데 썸 페스티벌이 뭐야? 썸 타는 남자랑 와야 하는 거 아냐?”

“하핫, 그럼 연애 따위는 전혀 생각도 못 하는 우리는 자격 없네.”

“그러게 다들 노력 좀 하자.”

서연은 물론이고 다들 자조 섞인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넷 다 최근에 솔로가 되었다.

“썸은 우리에게 사치야. 그럴 시간에 1년이라도 빨리 시험을 통과해야지.”

“아··· 우울하다. 선배들이 하는 말 들어보니 몇 년쯤 걸린다고 하더라.”

“늦게라도 되면 다행이지. 중간에 포기하는 선배들도 엄청 많았잖아.”

“공인회계사나 세무사가 되기 쉬웠으면 대우도 그만큼 받지 못했겠지.”

그녀들은 회계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이었고 내년이면 어느덧 졸업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언제쯤 붙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이번 여름에 다 함께 놀러 온 이유도 스트레스 해소라는 이유보다 앞으로 기회가 없을 거란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네 명 모두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편이고 재학 중에 보험용으로 딴 국가 공인 민간 자격증도 몇 가지나 되었다.

“어서 씻고 나오자. 오늘만큼은 내일이 없는 듯이 즐겨보자고.”

평소 분위기 메이커라 불리는 진아의 재촉을 받으며 루나비치에 들어간 그녀들은 정성껏 꾸민 뒤에 다시 나왔다.

한참 꾸미기 좋아하는 나이인 탓에 다시 나왔을 때는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리고 그쯤 되자 축제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클럽에 온 것 같은 신나는 음악.

코에 맴도는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생각보다 썸 페스티벌은 풍성했고 한껏 분위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저기 자리 있다.”

진아는 서연의 손목을 잡고 후다닥 달려가서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 테이블은 모두 차서 앉을 곳이 없어 서성이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운이 좋았다.

“럭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진아 덕분에 안 기다리고 좋네.”

“어··· 여기 오저당이 운영하는 부스잖아. 너희 어머니가 일하시는 곳이지?”

서연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서연의 어머니가 그곳에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기에 슬쩍 물어봤다.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해줬다.

“오저당의 자회사인 F&B 외식 부문 컨설팅해주시는 실장님이셔.”

“와! 대단하시네.”

“서연이 너는 나중에 오저당에 취직해도 되겠다. 고향 집 바로 앞에 있는 데다가 요즘 성장세가 엄청난 곳이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 큰오빠가 변호사잖아. 최근에 로펌에 입사했는데 거기 고객사 중의 하나가 오저당이라고 하더라.”

솔직히 말하면 서연은 오저당에서 일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오저당이 기준 미달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고향에 내려오기 싫었다.

가능하면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나날이 오풍리가 발전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서울과 비교하긴 어려웠다.

뭘 하나 하려고 하더라도 왕복 1시간 이상이 걸리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더구나 주도찬에게 한 말이 있다.

예전에 오저당을 맡았다고 했을 때.

나중에 졸업하면 와서 일해도 좋다고 했으나 곧바로 거절했던 게 자신이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누가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데? 내 꿈은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고.”

“오저당이 얼마나 더 커져야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될까?”

그때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귀에 익숙한 목소리라 서연은 아차 싶어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아.

그곳에는 앞치마를 두른 주도찬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안녕, 오빠.”

*

원래는 모른 척을 하려고 했지만,

주변에 듣는 귀가 제법 많이 있었다.

이번 썸 페스티벌은 오저당이 후원사가 되었기에 많은 직원이 참가 중이다.

방학 때마다 오풍리에 오는 서연이기에 얼굴을 아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괜히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 구설에 오르면 이모만 난감해질 수 있었다.

“오오빠? 이분은 누구셔?”

“너 무남독녀라고 했잖아.”

“안녕하세요. 저희는 서연이 학교 친구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일까.

다들 나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오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지금 내 모습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서빙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따로 알바를 구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급하게 추가로 몇 명이 더 투입되어야 했는데 쉬는 직원들을 불러서 보내기 애매했기에 나도 함께 왔다.

“그냥··· 아는 오빠야.”

서연은 대충 얼버무리며 내가 어서 떠나주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살짝 장난을 쳐줄까 고민하다가 일단 주문부터 받기로 했다.

“아직 주문 전이시죠?”

“네, 혹시 메뉴판 있나요.”

“여깄습니다. 여기 이.모.님이 아주 솜씨가 좋으시니 뭘 시키든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나는 이모님을 강조해서 말했다.

당연히 내가 말하는 이모가 누군지 서연은 곧장 알아들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근처에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는 사이에 메뉴판을 훑어보던 서연의 친구는 메뉴에 적혀 있는 굿밤 맥주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어멋! 굿밤이 있네요? 요즘 단종된 건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궁금했는데 여기서 보다니 신기해요.”

“굿밤을 즐겨 마셨나 봅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맛이 있는데 그게 제 마음에 쏙 들었거든요.”

나는 일단 굿밤이 단종된 게 맞다고 말해줬다. 지금은 아무리 찾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오저당에서 굿밤 브루어리를 인수한 뒤에 리뉴얼 중입니다. 몇 개월 후부터 다시 맛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와! 정말이에요?”

“그럼요. 현재 짓고 있는 맥주 공장이 굿밤 맥주를 빚기 위한 용도랍니다.”

그와 관련된 설명을 해주자,

다들 그걸 어떻게 아냐며 궁금해했다.

“저도 오저당 직원이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그러면 서연이 어머니도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금방 술이랑 안주 준비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을 받은 것을 메모해서 돌아서자, 그때부터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캐묻기 시작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야뭐야.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 옛날에 썸타던 사이였던 거 아니야?”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서연은 절대 아니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주문 받은 굿밤 맥주와 소담 소주부터 챙겼다.

굿밤 맥주에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 담긴 내용은 내년에 리뉴얼해서 다시 판매가 시작될 거란 안내였다.

일종의 예고라고 봐도 되었다.

거기에 새로 만든 잔도 꺼냈다.

오저당의 주당들이 고민하여 만든 황금 비율이 표시된 폭탄주 전용 잔이었다.

아직 진짜 굿밤이 나오기 전이라 몇 개 안 만들어서 레어템이라 봐도 된다.

더구나 소담과 굿밤의 조합은 상당히 좋은 편이라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은근히 잔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어쨌든 그렇게 준비한 술을 가져가며 슬쩍 그 위에 명함을 한 장 올려놨다.

“맛있게 드십쇼. 혹시라도 여행 중에 필요한 게 있거나 오저당에 관심이 있으시면 언제든 여기 있는 명함으로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서연이 다니는 학교는 명문이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라니 회계를 전공일 테고 내년이면 졸업할 거다.

그런 인재들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안 그래도 재무를 책임지는 서준석 부장이 새로운 직원을 찾고 있었다.

맥주 공장을 짓고 해외 법인과의 거래도 활발해지니 일손이 부족해진 탓이었다.

그 말을 남긴 뒤에 나는 곧장 돌아섰다.

서연은 누구보다 먼저 명함을 낚아채려 했으나 친구들이 그보다 더 빨랐다.

머지않아 그녀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아니 저분이 오저당의 사장님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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