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밤 (6)
맥주 공장 완공식을 하는 날.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공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매일 진척되는 상황을 봤지만, 드디어 끝이라고 하니 확실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일까?
해가 뜨기 전에 눈이 떠졌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나 너무 빨리 일어난 탓에 잠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산책이나 다녀오기로 했다.
어느덧 12월이 되었기에,
새벽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다행히 눈이 쌓이지 않아서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한옥을 나서자 당연히 향이도 뒤를 쫓아왔다.
[역시 산책은 새벽에 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나도 향이의 말에 동의했다.
산속 어디선가 다양한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오케스트라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곳에 살면서 처음 느낀 건데 새들마다 울음소리가 너무나 달랐다.
그런 자연환경 탓일까.
직원 중에 커다란 망원경을 들고 쉬는 시간마다 이 근방에 있는 새들을 탐조(探鳥)하는 이들이 제법 많아졌다.
고요한 새벽녘의 시간을 가로질러 도착한 마을 입구는 아직 한적했다.
봄부터 여러 공사 때문에 북적거렸던 것도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였다.
이미 공사는 모두 끝난 상태다.
가장 커다란 규모였던 오저당의 굿밤 맥주 공장의 완공이 가장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아직 단지의 1/3 정도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그 땅은 우리 몫이 될 거다.
기초 공사를 하는 비용을 굳힐 수 있는 기회이기에 미리 자리를 선점해 놓으면 우리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사전에 논의도 마친 상태였다.
삼척시는 빈 땅으로 놔둘 바에는 우리에게 넘기길 원했고 영세 규모의 양조장이 들어올 자리 정도만 남겨놨다.
“사장님?”
공장 입구를 지나가려고 하자,
경비실에 있던 남자가 다급하게 나왔다.
그는 50대 초반의 남기천이란 분인데 오풍리 인근 마을 출신으로 조기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분이었다.
“아직 야간 경비는 할 필요 없다니까요. 날도 추운데 여기서 주무신 겁니까?”
“마음이 안 놓여서요.”
“술을 빚은 재료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뭘 지키시려고요?”
“맥주를 빚는 설비가 있으니까요. 흉악한 놈들은 안 가리고 다 쓸어간다니까요.”
경찰 출신이라 그런가.
은근히 그런 쪽으로 경계심이 강했다.
참고로 남기천 경비실장은 계급 정년에 걸려 퇴직한 전직 경찰이다.
능력이 없던 것은 아니고 하도 들이받아서 위쪽에 찍힌 결과라고 했다.
그래도 썸 페스티벌 당시에 서장님이 추천해주신 것을 보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그런 형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무인 경비는 잘 작동되죠?”
“물론이죠. 감지 센서가 작동되면 곧장 경비실에 소속된 직원들 핸드폰이랑 집에 신호가 들어가게 해놨습니다.”
그것도 남기천 씨가 추천해서 만든 시스템이었다. 경비실에서 일하는 분들은 공장 바로 앞에 숙소를 잡아놨다.
뭔가 일이 있으면 곧장 달려와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이었다.
“곤히 자고 계신 다른 분들 깨우기 싫으니 잠시 꺼주시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기천은 곧장 시스템을 껐다.
그런 뒤에 나를 따라오려 하기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혼자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내부로 들어가 불을 켜자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아 반짝이는 설비가 시야 가득하게 들어왔다.
확실히 지금까지 오저당에서 쓰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크기에 압도당할 정도였다.
이제 이 공장이 본격적으로 돌아가면 연간 3천만 리터의 맥주가 만들어진다.
대충 8천만 캔이나 되는 양이다.
그걸 다 팔려면 매달 650만 캔쯤은 팔아야 하는데 현재 빚고 있는 벽향주의 6배쯤은 되는 엄청난 규모다.
당연히 시작부터 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다만, 생산량은 조금 높일 생각이다.
지난 7월에 공주에서 맥주를 빚어서 간신히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았으나 5개월쯤 지나니 다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러니 한방에 되살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제 그 녀석들도 생기를 되찾겠네요.]
“예정된 생산량에 비해 요정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조금 고민되네.”
[오저당에 있던 일반 요정은 맥주에 관심이 전혀 없으니 어쩔 수 없죠. 대신 중급 요정을 많이 배치할게요.]
“괜히 다른 술의 숙성에 문제가 생기는 거는 아니겠지?”
내 질문에 향이는 방긋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맥주의 숙성 기간은 열흘 남짓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저랑 검이가 오가면서 계속 확인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수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냐? 아직 일어날 시간 아니잖아?”
“그러는 너는 왜 여기있냐?”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서 산책하러 잠시 나왔다가 잠시 들렸지.”
“나도 마찬가지야. 소풍 가기 전날처럼 두근거려서 잠이 오지 않더라.”
수호도 나와 같은 증상을 보였다.
아무것도 없었던 오저당에서 함께 시작했던 녀석이니 감회가 새롭겠지.
그래도 엄청 흥분하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수호의 견문도 상당히 높아진 상태다.
이미 나와 함께 미국의 버번 증류소도 한 차례 돌아봤고 지난 가을쯤에 스코틀랜드 증류소도 잠시 다녀왔다.
이언 테넌트와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는 모처럼 다시 만난 우리를 무척 반갑게 맞아줬고 우리는 그곳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보낸 3주간의 시간은 보약과 같았다. 스코틀랜드에 다녀온 이후에 수호는 확실히 많이 성장한 느낌이었다.
미국에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에 불과했다면 스코틀랜드에서는 테넌트의 아래에서 모든 과정을 직접 경험해봤다.
그게 아주 큰 자양분이 되었다.
“굿밤 맥주에게 지지 않으려면 앞으로 벽향주와 RJ의 술도 열심히 빚어야겠어.”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일단 가격에서 차이가 크게 나잖아.”
“대신 퍼플 라벨은 1년이나 숙성하고 옐로우 라벨은 3년이나 해야 하잖아.”
“천천히 가도 돼.”
오저당의 핵심은 다른 곳보다 좋은 술맛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맥주가 맛있어도 스피릿에 비교할 수는 없지.
장소와 시기에 따라 어떤 종류의 술을 마시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수호가 빚는 퍼플 라벨은 내놓는 족족 순삭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봄에 이어서 9월쯤에 몇 배나 되는 양을 풀었음에도 곧장 품절이 됐다.
그러다 보니 카를로스와 뫼리스는 물론이고 다들 퍼플 라벨이 나오는 시기가 되면 치열하게 경쟁했다.
참고로 지난번의 승자는 상당히 통 큰 제안을 했던 뫼리스였다.
끌루소는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물량을 선점했고 그걸 가지고 온갖 이벤트에 활용하며 사이트 홍보에 이용했다.
하지만 수호에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았다.
“RJ와 함께 만든 감저로 대박 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수호는 꽤 자신 있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RJ와 함께 빚은 감저 술은 생각보다 상당히 맛이 훌륭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직 출시를 못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예정대로면 벌써 감저가 출시된 상태여야 하는데 아직 숙성 중이었다.
RJ의 일정이 상당히 바빠서 중간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우리가 만든 샘플을 확인해줘야 하는데 월드 투어 일정이 잡혀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술을 가지고 RJ의 일정을 쫓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냥 우리가 완성해서 술을 내놓아도 되는 일이었으나 RJ의 술이니 적어도 그의 취향에 최대한 맞춰야만 했다.
두어 달 정도 출시가 늦춰진다고 크게 손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1월 중에는 나오는 거지?”
“응, 이제는 숙성만 끝내면 곧장 출시해도 되니까 다른 변수는 없어.”
“이제 슬슬 나갈까?”
공장 내부는 꽤 쌀쌀했다.
아무래도 설비가 돌아가기 전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수호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고 창고 쪽으로 걸어 나왔다.
상당히 넓은 창고였지만,
그곳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맥주를 본격적으로 빚으려면 당장 그곳부터 보리와 홉으로 가득 채워야 했다.
“이제 여기도 채워야겠네.”
“주문하면 곧장 들어올 거야. 미리 말해 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준공 일정은 문제없어?”
맥주 공장이 완공됐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준공이 되어야 그제야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릴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공장설립 완료신고를 오늘 하면 3일 이내에 통보가 올 거야.”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네.”
“잘하면 하루 안에 연락 올 수도 있어.”
“하긴 삼척시에서도 공사하는 중에 종종 와봤으니 더 볼 것도 없지. 준공 떨어지기 전에 일단 주문부터 넣어야겠다.”
주문을 넣고 이곳에 들어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그게 바람직하긴 했다.
수호의 말에 의하면 오늘 오전 중에 주문 넣으면 내일 오전에 온다고 했다.
물량이 상당히 많은 탓에 화물차 배정을 1순위로 해주기로 약속받았다고 했다.
확실히 회사의 규모가 커지니 기존보다 더 저렴한 금액으로 주문하는데도 그런 혜택까지 받는 것 같았다.
맥주 공장 외에도 오저당에서 주문하는 양까지 합치면 이제는 어지간한 대형 회사와 견줄 수준은 되었다. 책에서나 보던 규모의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니 서둘러서 움직이자.”
*
준공은 무리 없이 떨어졌다.
그것도 하루도 안 돼서 소식이 왔다.
그 덕분에 우리는 완공을 기념하는 회식도 못 하고 간단하게 고사만 지낸 뒤에 곧장 술부터 빚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미 몇 개월 전에 맥주 공장의 책임자로 조택훈 이사를 내정해놨고 미리 직원을 뽑아서 교육까지 마친 상태였다.
거기에 요정들도 꽤 헌신적이었다.
다들 굿밤 브루어리에서 데리고 온 요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상당히 애썼다.
거의 밤낮없이 오저당과 맥주 공장을 오가며 술을 살폈을 정도였다.
문제는 거리가 제법 멀다는 것이다.
중급 요정끼리 옮겨 다닐 정도의 거리는 아니라 그때마다 향이가 나서야 했다.
향이만 고생시킬 수 없기에 당연히 나도 그때마다 같이 다녀줬다.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
맥주를 숙성하기 시작한 뒤부터.
요정들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3일째가 되던 날부터 오저당의 다른 요정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생각보다 빠른 회복이었다.
하긴 맥주 공장에서 숙성하고 있는 맥주의 양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그때부터 맥주의 요정들은 공장에서 줄곧 파티를 열었다.
개화기 시기의 옷을 입은 탓일까.
노는 모습도 오저당의 요정과 달랐다.
이 녀석들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살롱의 모습을 보여주며 흥을 표출했다.
모던 걸과 보이의 댄스.
바에 앉아서 들이켜는 맥주까지.
심지어 마이크를 잡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요정도 있었다.
상당히 생소한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요즘 오저당에 있는 시간보다 맥주 공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열흘의 숙성을 마칠 무렵.
맥주의 병입을 앞둔 시점에서 나는 맥주 공장에 생긴 커다란 변화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와···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항상 요정이 생긴 뒤에 발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이 좋게 술의 요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뽀글··· 뽀글!
보통의 맥주는 병입을 할 때 추가로 탄산을 주입한다. 하지만 맥주를 빚는 과정에도 자연스럽게 탄산이 생성된다.
제법 큰 탄산이 터지며 뽀글거릴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나타났다.
문제는 그게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맥주를 숙성 중인 저장 탱크에서 요정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복사해서 붙여놓고 있는 느낌과 흡사했다.
그렇게 나타난 요정의 숫자만 수천에 달할 정도였으니 순식간에 맥주 공장은 요정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중에는 검이와 같은 상급 요정이 둘이나 있었다.
각각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두 상급 요정은 곧장 향이를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 두 요정을 보며 향이는 내 어깨에 앉아서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휴우··· 이제 조금 안심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