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3)
F&B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사데나 버번은 바텐더 사이에서 알뜰템으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숙성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오로지 칵테일용으로 만들어서 내놓은 제품이라 가격은 저렴한데 맛은 꽤 훌륭했다.
그런 탓인지 초반에 생산해서 풀어 놓았던 버번이 떨어진 후에도 계속 술을 찾는 곳들이 제법 많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술이 나갈 때마다 퀄리티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존에 숙성을 마무리해서 나간 버번과 달리 나중에 나가는 것들은 요정의 효과를 제대로 받은 상태의 것들이다.
맛과 향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수요에 따라 생산 계획도 바뀌었다.
최소 2년 동안 숙성해서 팔기로 예정된 버번은 그대로 가되 칵테일용으로 일부 물량을 꺼내서 풀기로 한 것이었다.
좋은 소식은 한국에서도 들려왔다.
[지난주에 판매된 굿밤의 양이 심상치 않습니다. 편의점 월간 판매량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황동선 이사는 꽤 흥분한 상태였다.
기존까지 빚던 오저당의 술보다는 조금 더 대중적인 맥주의 성공은 지금까지의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이기 때문이다.
“10위권이면 어지간한 수제 맥주는 다 제친 거라고 봐도 되겠네요?”
[물론이죠. 그 정도면 유명한 수입 맥주와 비교해도 될 수준입니다.]
“생산량은 그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죠?”
[어느 정도 재고를 맞춰 놓고 물량을 빼고 있어서 문제는 전혀 없을 겁니다.]
오저당은 항상 재고를 일정량 확보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에 워낙 호되게 당한 게 많았고 거기에 익숙해진 주류 상사는 일단 많이 받아 가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그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한 번에 빠져나가는 물량이 상당하다.
반면에 출하량이 들쭉날쭉해서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직 오저당에 맥주 판매 데이터가 없는 것도 문제다.
맥주는 계절을 많이 타는 편이다.
당연히 겨울보다는 날이 더운 여름에 많이 팔리는 것이 정상인 제품이다.
그런데 여름에 어느 정도 나갈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이제 여름에는 매출이 하락하지 않고 오히려 상승할 수도 있겠네요.”
오저당은 다른 계절에 비해 여름 시즌의 판매량이 다소 떨어지는 패턴이었다.
그나마 있었던 ASAP도 국내보다는 동남아에서 판매되는 양이 많았다.
더구나 동남아의 성수기는 우리나라의 정반대였기에 오히려 겨울에 더 많은 매출을 올리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는 맥주가 있으니 상황이 조금 달라질 거라 예상되었다.
[그러길 바랄 뿐이죠. 그나저나 멕시코 출장은 이제 끝나신 거죠?]
“네, 어제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다행이네요. 멕시코에 가실 때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되거든요.]
황 이사는 멕시코에 가기 전부터 경호원을 적어도 한두 명 정도는 붙이자고 내게 끊임없이 제안했다.
혹시라도 내 돈을 노리고 납치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당장 수중에 돈은 별로 없으나 그런 걸 다른 사람이 알 방법은 없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멕시코의 치안은 많이 안 좋아졌다.
전염병 사태를 겪으며 점차 높아지던 살인율은 최근에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이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믿을 만한 수치는 아니다.
어딘가에서 살해됐을지 모르는 실종자 숫자까지 합치면 훨씬 많아진다.
황 이사는 그 부분은 다시 지적했다.
[다음에 멕시코 가실 때는 꼭 경호원을 붙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절대 안 보내드릴 겁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요.”
[겨우 500달러 때문에 납치를 하는 곳이잖아요. OGD 멕시코의 호르헤 사장님이 괜히 경비 업체에 큰돈을 들이는 게 아닙니다.]
하긴 이번에 가보니 실감이 났다.
증류소 입구에는 무장 가드가 서 있었고 호르헤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이들의 숫자도 작다고 하긴 어려웠다.
호르헤가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다.
돈 레오넬이 잘 나가며 이권을 노리고 군침을 흘리는 이들이 제법 많다고 했다.
그런 탓에 OGD 멕시코가 경찰과 정치인에게 뿌리는 돈이 제법 되었다.
뒷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깔끔하게 경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승인해줘야 했다.
저렴한 인건비와 맞바꾸는 비용이라 생각하는 편이 속이 편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멕시코 출장을 갈 때는 염두에 두겠습니다.”
[기억해둘 겁니다. 그리고 심양에서 걸어온 소송은 어떻게 됐나요?]
심양은 슈미트와 홍진구가 OGD USA로 옮겨왔던 과정을 문제삼고 있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최근에 심양은 미국 시장에서 거의 퇴출 위기에 도달했다.
과거에 메인으로 삼고 있던 KR 마트 공급망에 오저당이란 경쟁자가 생겼다.
오저당의 술과 전통주를 유통하기 시작한 OGD USA는 돈 레오넬이란 무기를 가지고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더해서 홍진구가 가지고 온 거래처가 제법 많아서 다루기 시작한 제품도 상당히 폭넓어진 상황이었다.
“심양이 소송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길 확률이 거의 없을 텐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작은 흠집이라도 내겠다는 생각이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슈미트를 우리 쪽에 끌어들이고 심지어 심양에 비수를 꽂길 원하는 홍진구까지 받은 게 아니다.
이미 그들이 오저당으로 오기 전에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법률가들과 논의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질 확률은 거의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문제가 안 되었다.
최대한 길게 재판만 끌고 가도 심양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들의 실수는 오저당을 놓친 게 아니라 정작 자신의 사람들이던 슈미트와 홍진구 같은 인재를 홀대했다는 것이었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심양에게도 더는 미래가 없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오저당에 별다른 일은 없죠?”
[조만간 RJ의 감저 런칭 스케줄에 들어갈 예정이라 다들 바쁘게 지내고 있죠. 언제쯤 귀국하실 예정이신가요?]
“원래 예정대로 이틀 후에 귀국할 겁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한다.
벌써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지낸 시간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굿밤의 런칭을 진행하는 것도 확인해야 했기에 제법 일정이 길어졌다.
굿밤의 반응은 꽤 좋았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좋은 느낌이었다.
애초에 라거를 주로 마시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에일에 대한 소비량이 상당한 편이다.
미국의 수제 맥주 수입량만 봐도 300억 달러가 넘어갈 정도다. 한화로 따지면 거의 40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중의 몇 퍼센트만 굿밤이 점유할 수 있다면 대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걸로 황 이사와의 통화는 끝났다.
그런데 향이가 또 보이지 않고 있었다.
녀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파사데나 증류소에 머물고 있기에 아마 버번을 숙성하는 데 있을 게 분명했다.
원래 여기로 올 생각은 없었다.
LA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며칠 머물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향이가 오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소멸 직전까지 갔던 스퍼였기에 아무래도 마음이 더 쓰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추가로 요정이 더 나타났고 그중에 하급 요정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급 요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일반 요정을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항상 곁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스퍼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다녀왔습니다.”
그때 다미안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꽤 묵직한 짐이 양손에 쥐어져 있었는데 출산을 앞두고 있는 호세 부부의 아기에게 줄 선물이었다.
출산 예정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전에 통화했을 때 3주 후라고 했으니 이제 열흘 정도 남았으려나.
처음으로 생기는 조카이기에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출산 선물을 골라고 다미안은 픽업만 해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멕시코에 갔을 때 호르헤가 조카를 위한 선물이라며 내게 꽤 많이 맡겼다.
크기가 큰 거는 따로 택배로 보낸다고 했는데도 부피가 상당했다.
“수고했어요. 고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네요.”
“아무래도 돌아갈 때는 캐리어를 하나 더 사서 넣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준비해주세요.”
캐리어 하나쯤 더 비용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한국에 있는 수호도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수호와 나 그리고 호세까지.
우리 세 명은 형제나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사람에게는 뭘 해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에 수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똑같이 모든 것을 해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당분간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다미안, 오늘은 별다른 일정 없죠?”
“내일 저녁에 파사데나 직원들이랑 저녁 식사 외에는 출국 전까지 일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다미안도 조금 쉬어요. 출국 준비는 그 이후에 해도 되잖아요.”
지금까지의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케이티가 업튼 가문은 물론이고 인근의 증류소 디스틸러 분들을 소개해준 덕분이었다.
매일 돌아가며 자신의 증류소로 우리를 초대해서 버번을 맛보여주신 덕분에 은근히 인맥이 두터워졌다.
확실히 투어로 돌아보는 것과는 달랐다.
연세가 지긋하신 마스터 급의 디스틸러 분들이 해주시는 이야기들은 버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맨입으로 다니진 않았다.
그분들을 뵈러 갈 때마다 적어도 소담과 벽향주 퍼플 라벨이나 돈 레오넬을 1년 숙성한 아네호(Anejo) 등급을 챙겼다.
하나 같이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술이지만, 돈 레오넬의 아네호 등급은 시중에 판매하지도 않는 특별한 술이다.
술맛을 아는 분들이라 그런지 반응은 생각보다 상당히 좋았다.
“이미 충분히 쉬었는 걸요.”
다미안은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보통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되면 다미안은 오히려 업무량이 많이 줄어들게 된다.
디스틸러와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 따로 약속을 잡을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니 스케줄 관리는 해줄 필요가 없고 케어해주는 것도 현지 법인 몫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미안은 오히려 해외에 나오면 조금이라도 더 나를 챙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띵띵 띠리디링 띵띵.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누군가 싶어서 봤더니 뫼리스였다.
평소에도 종종 통화하는 편이나 오늘은 왜 전화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굿밤을 비롯해 감저까지 향후 이어지는 제품들 대부분은 끌루소와 논의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혹시 뭔가 변동 사항이 있는 건가 싶어서 곧장 그 전화를 받았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물론이죠. 혹시 계약 사항 중에 변경해야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제가 전화드린 이유는 다른 것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뫼리스는 예전에 자신에게 부탁했던 것이 아직도 유효한지 물었다.
하지만 도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의 제가 했던 부탁이 뭔지 감이 안 오네요.”
내가 무슨 부탁을 했더라.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자 뫼리스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내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저한테 괜찮은 증류소 매물이 있으면 연락을 해달라고 하셨던 말이요.]
“아··· 그걸 말씀하신 거군요. 좋은 술이 사라지는 위기인 곳이 있다면 충분히 인수할 생각은 있습니다.”
[무려 170년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건 꼭 잡으셔야 합니다.]
덤덤하게 대화하고 있는 나와 달리 뫼리스는 꽤 다급한 느낌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예전부터 악명 높던 투자 회사에 넘어가게 생겼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감이 왔다.
렉싱턴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전에는 증류소를 사서 해체한 뒤에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꽤 악명 높았다.
일단 알겠다는 답을 준 뒤.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미안에게 귀국 항공권은 취소해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다미안은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했다.
“스코틀랜드로 갈 겁니다. 항공권부터 곧바로 예약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