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4)
스코틀랜드는 최근에도 다녀왔다.
지난가을에 수호랑 같이 테넌트의 증류소에 다녀왔으니 4개월 만인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런던에서 한번 경유해서 우리가 내린 곳은 애버딘 공항인데 그곳에서 하이랜드 지역에 있는 스페이사이드로 향했다.
지도상으로는 인버네스 공항이 더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항공편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차로 이동하는 거리를 따지면 오히려 애버딘이 10마일쯤 더 짧았다.
애버딘 공항에 내리자 뫼리스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엇보다 외모가 꽤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M자 탈모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진행되어서 요즘은 허허벌판처럼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안색은 꽤 좋았다.
요즘 뫼리스는 끌루소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중이다. 3년전쯤에 승진을 했는데 최근에는 임원급 이야기도 나왔다.
거기에 오저당의 몫이 없진 않지.
뫼리스는 벽향주 등을 통해 꽤 많은 수익을 냈고 유럽 내에서 유일하게 돈 레오넬을 유통하는 성과를 올렸다.
“짐이 생각보다 없으시네요.”
“아니요. 너무 많아서 따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스코틀랜드까지 오실지는 몰랐네요.”
“우리 보스가 무척 아끼는 술을 빚는 증류소라서요. 저는 그걸 지키는 임무를 받은 거고요.”
뫼리스는 솔직하게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밝혔다. 그가 말한 보스는 당연히 끌루소의 오다르 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담긴 숨은 뜻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만약에 증류소를 오저당이 인수해서 동일한 수준의 스카치위스키를 내놓으면 끌루소가 어떻게든 돕겠다는 의미였다.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상당히 좋은 술이었나 보네요.”
“아마 맛보시면 왜 그런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까지 온 거죠?”
“자세한 이야기는 증류소로 이동하면서 해드리겠습니다.”
뫼리스는 일단 이동하길 원했다.
멀리서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이 비가 한 차례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 맞는 것은 나도 썩 좋아하지 않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스페이사이드까지 가는 길은 드넓은 평원과 야트막한 구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모든 곳이 이런 형태의 지형은 아니다.
런던이 있는 영국과 달리 북서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스코틀랜드의 지형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괜히 하이랜드라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가을에 왔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네요.”
그때는 뭔가 싱그러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눈이 덮여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뫼리스는 얼마 전에 폭설이 내린 탓이라고 했다.
“지난달에 영하 13도까지 떨어져서 난리였습니다. 제가 괜히 옷을 든든하게 입고 오시라고 한 게 아니에요.”
“네? 예전에 테넌트 씨에게 듣기로는 스코틀랜드 날씨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라고 했었는데요.”
“이상 기온 때문이죠.”
스코틀랜드의 주요 도시는 영하까지 잘 안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나 최근 몇 년 동안 겨울마다 한파가 닥쳤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뫼리스는 한탄에 가까운 넋두리를 했다.
“요즘 프랑스 와이너리도 그렇고 다들 기후 변화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어요.”
“그렇게 심한가요?”
“포도의 새싹이 냉해를 입어서 완전히 초토화되는 일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죠. 오죽하면 횃불을 포도밭에 줄지어 세워 놓고 있을 정도라니까요.”
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뉴스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았다. 문제는 여름이 되면 고온 현상까지 와서 숙성하는 과정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포도 생산이 가능한 지역이 점차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
수십 년 후에는 북유럽 같은 곳의 와이너리가 유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후 변화가 남의 일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 실생활에도 하루가 다르게 그것도 무척이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그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하긴 테넌트 씨도 매년 온도가 바뀌는 탓에 수십 년 동안 유지하던 숙성 과정을 바꾸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요.”
“저희한테 납품하는 다른 증류소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오저당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요?”
“아직 심각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풍리는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작년에 엄청나게 비가 왔으나 수해를 입진 않았다.
당시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폭우가 내리면 물의 요정이 미쳐서 날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에 한동안 향이와 검이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어느 한 지역만의 일은 아니라 안심할 수는 없죠. 혹시 지금 가는 곳도 그런 이유 때문에 매물로 나온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거는 아닙니다.”
그때부터 뫼리스는 우리가 향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주었다.
어차피 스페이사이드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나 걸리니 시간은 많았다.
“혹시 글렌 툴릭(Glen Tullich)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글쎄요.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워낙 글렌이란 상표명이 붙여진 곳이 많으니 이해합니다.”
나라고 스카치위스키를 빚는 모든 증류소와 브랜드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지간히 큰 곳들은 이름을 알고 있으니 규모가 작은 곳인 것 같았다.
“글렌 툴릭은 해외보단 현지에서 더 유명한 곳입니다. 170년의 역사를 가진 증류소는 정말 드물거든요.”
“정말 오래되긴 했네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없이 많은 증류소가 폐업하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곳이라 더 의미가 깊죠.”
“그 시기에 술을 빚을 곡물의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 이해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차 세계대전은 오히려 스카치위스키에게 호재였다.
수없이 많은 미군이 영국에 머물며 버번이 아닌 스카치의 맛을 알아버렸다.
그 덕분에 스카치의 수출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호재를 맞이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모든 굴곡진 역사를 견디고 지금까지 왔다는 것은 충분한 저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제가 또 그런 거에 약한 거 어떻게 아시고 딱 맞춰서 연락해주신 겁니까?”
“파사데나만 봐도 취향이 뻔하니까요.”
“뭐 그건 그렇다고 쳐도 글렌 툴릭이 어쩌다가 매물로 나온 건지 아직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도태된 거죠.”
뫼리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전형적인 옛날 스타일의 증류소였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해오던 것만 계속 유지하니 좋은 술을 가지고도 정작 매출은 나날이 떨어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거기다가 가업을 물려받은 오너가 투자를 했다가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 어려웠던 증류소 경영에 치명타였죠.”
“어디에 투자했길래요?”
“저도 자세한 거는 모르겠는데 상장 폐지됐다는 정도만 들었습니다.”
휴지 조각이 됐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주식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더라도 그렇게 폭삭 망하는 경우는 흔한 편은 아닌데 신기했다.
“혹시 예상되는 인수 가능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거기까진 알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일단 가서 보고 결정하려고요. 아무리 값이 저렴하게 나왔더라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내 기준은 간단했다.
요정의 존재만 확인하면 된다.
요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술의 퀄리티가 좋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것만큼 확실한 증빙이 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증류소는 스페이사이드에서 조금 외진 곳이었다.
과거에 들렸던 테넌트가 일하는 글렌아워 증류소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 앞에 차를 세우고 뫼리스가 전화를 걸자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살이 많이 찐 중년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뭐랄까 얼굴에 탐욕과 짜증이 묻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관상은 과학이라던데···.’
실제로 성격도 썩 좋진 않았다.
그 남자는 증류소 인수 때문에 왔다고 나를 소개하는 뫼리스의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믿지 않았다.
만약에 평소에 거래하던 끌루소의 직원인 뫼리스마저 없었다면 문전박대를 당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싫은 표정은 또 아니었다.
인수 과정에 경쟁자가 생기면 증류소의 값어치를 더 높여줄 거라 여긴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증류소를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슈. 증류소 안에 들어가면 직원들 있으니 다 보면 이쪽으로 와요.”
남자는 직접 안내해줄 생각은 없었는지 곧장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있자 뫼리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여기를 운영하던 돌아가신 사장님의 조카인데 저분이 맡은 후부터 증류소가 급격하게 하락세를 겪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네요.”
“하지만 위스키를 빚는 디스틸러와 직원분들은 다들 경력이 상당하고 열정도 있으시니 일단 들어가시죠.”
혹시라도 내가 기분이 상해서 돌아서는 게 아닐까 뫼리스는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인수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는 거다.
사인을 하기 전까지는 냉철하게 모든 상황에 대해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증류소 앞으로 다가서자 직원들은 뫼리스와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와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뫼리스 씨만 믿고 있었습니다. 부디 우리 글렌 툴릭 좀 살려주십쇼.”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없고 대신 인수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분은 따로 오시는 건가요?”
다들 내가 뫼리스가 방금 말한 그 주인공이라 여기지 않고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끌루소에서 데리고 온 직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덧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다.
하지만 저들의 눈에는 내가 아직 20대 초반의 청년쯤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게 아니다.
아시아 사람을 자주 보는 것도 아니라 나이를 쉽게 유추할 수 없는 것뿐이다.
뫼리스는 그들이 더 큰 실수를 하기 전에 나를 소개해줬다.
“여기 계신 분이 오저당의 오너입니다. 혹시 돈 레오넬이란 테킬라나 한국의 술인 벽향주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혹시나 싶어서 뫼리스가 오저당의 대표적인 술에 대해 말해주었으나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스카치 외에 다른 술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혹시 증류소 내부를 조금 둘러볼 수 있을까요?”
“그전에 약속 하나만 해주게.”
하얀 턱수염이 이 동네 트렌드인가.
테넌트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자랑하는 한 노인이 나서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그가 누군지 뫼리스가 귀띔해줬다.
“저분이 여기 글렌 툴릭의 마스터 디스틸러이신 빌리 크래넘 씨입니다.”
“아··· 무슨 약속을 원하시는 겁니까?”
“자네 역시 그 강도 같은 놈들처럼 이곳을 인수한 뒤에 해체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겠나?”
그 질문은 나와 뫼리스까지 두 명 모두에게 동시에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뫼리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없으나 아직 이곳을 인수할 거란 장담은 하기 어려웠다. 그런 거는 결심을 내린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직 이곳이 어떤 곳인지 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약속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우리만큼 훌륭한 스카치를 만드는 곳이 흔하지는 않아. 더구나 역사도 오래된···.”
“하지만 망하기 직전인 증류소이기도 하죠.”
크래넘은 그 말에 대꾸를 못 했다.
대신 얼굴을 붉혔는데 이내 이성을 되찾고 문 앞에서 비켜주었다.
일단 증류소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엿보였다.
실제로 그의 자신감이 무엇 때문인지는 나도 곧장 알 수 있었다.
[우와··· 여기 증류소의 크기는 코딱지만 한 데 요정 숫자는 엄청나네요.]
향이와 함께 들어선 증류소에는 수많은 숫자의 요정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판초나 스퍼와 같은 급으로 보이는 요정도 있었다.
붉은 패턴의 치마 같은 것을 두르고 한쪽 어깨에 띠를 두른 모습은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과 흡사했다. 그리고 양손에는 백파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소리는 직접 들리진 않았으나 유명한 Scotland the Brave 연주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곁에서 요정들이 다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여긴 무조건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