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5)
이런 곳이 흔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결심을 내리기 쉬웠다.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 아니라면 무조건 글렌 툴릭을 가져오고 싶었다.
지금까지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면서 요정을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심지어 지난번에 방문한 테넌트의 증류소에도 요정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여기 같은 곳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하급이나 중급 요정만 있었지 특별한 존재가 있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당연히 향이와 같은 존재는 내가 가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오저당과 다른 증류소의 차이지.’
당연히 술맛도 상당한 편이었다.
글렌 툴릭이 빚은 싱글 몰트는 부드러운 스카치 위스키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는 상당히 훌륭한 술이었다.
마스터 디스틸러인 빌리 크래넘이 자신 있게 내놓을만한 수준이긴 했다.
문제는 역시 방만한 경영과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마케팅 그리고 전혀 끌리지 않는 라벨과 보틀 디자인 때문이었겠지.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만약에 여길 가져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손봐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문제라 생각되진 않았다.
라니와 황동선 이사.
그리고 다른 모든 직원들까지.
이미 파사데나를 통해서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보았고 충분히 재능이 있음을 증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좋네요.”
“마음의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금액만 합당하다면 오저당도 글렌 툴릭의 인수 협상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해체할 생각은 없으니 생산직에 대한 고용 승계도 약속하죠.”
내 대답의 앞부분은 뫼리스에게 한 말이었고 뒷부분은 아까 크래넘이 물어본 것에 대한 뒤늦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무직과 관리직에 대한 고용 승계는 약속할 수 없었다.
이런 좋은 술을 가지고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무능력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두 무리 사이의 관계가 썩 좋진 않았는지 대부분의 직원은 오히려 안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너무 일렀다.
만약에 내가 인수에 실패하면 이들은 모두 실직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진짜 중요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현재 이곳에서 숙성 중인 위스키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보이는 저 오크통 전부 채워져 있지. 절반 가까이는 10년 이상 숙성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보다 짧아.”
“당장 제품화 가능한 양도 꽤 되겠네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최소 12년은 채워야지. 우리는 그보다 짧게 빚어서 내놓는 제품은 없어.”
하긴 대표적인 위스키들만 보더라도 12년 숙성한 정도의 것은 초급자가 마시는 술로 취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어느 정도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최소 15년에서 18년 정도를 즐겨 마신다.
그렇게 3년씩 증가할 때마다.
술이 가진 가치가 급격히 증가한다.
12년 숙성해서 파는 것보다 몇 년 더 숙성하는 게 훨씬 이득이란 이야기다.
“그런데 여길 인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회수할 생각인 거죠?”
“우리가 빚은 원액을 탐내는 거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만 처분해도 2천만 파운드(약 315억)는 나올 거야.”
“그 정도의 양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입구에서는 안 보일 텐데 여기 뒤편에 숙성 창고가 몇 개 더 있어.”
이거 생각보다 덩치가 꽤 크다.
원액만 그 정도라면 실제 필요한 돈은 두세 배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증류소의 설비와 건물 그리고 역사적인 가치까지 포함될 게 분명했다.
그 정도의 금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정말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할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왜 투기꾼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문을 닫은 증류소는 보통 Silent Still(침묵의 증류소)라 부르는데 그런 곳의 술은 몇 배 이상 값어치가 오른다.
이제 더는 마실 수 없다는 희귀성과 수집 욕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이유로 수년 사이에 10배 가까이 값이 급등한 술도 있었다.
원액과 오크통을 팔아치운 다음.
제품화가 가능한 위스키만 관리하며 시장에 조금씩 풀어도 충분히 투자금을 뽑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겠지.
“다미안, 오저당의 사내 유보금 얼마인지 최근 보고서 내용 기억나요?”
“올해 멕시코에서 들어온 배당금까지 합치면 대략 500억 정도였습니다.”
“470억 정도 아니었나요?”
“굿밤이 판매 시작된 이후에 수출 물량 매출이 잡힌 게 있어서 기존 보고서보다 조금 더 늘었습니다.”
나라고 모든 걸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다미안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의 비서 업무를 충실히 봐주고 있었다.
‘과연 500억에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길 가져온다고 끝이 아니고 추가로 투자해야 하는 것도 작지 않아 보였다.
증류소 자체도 낡았고 오래된 시스템 역시 현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돈 들어갈 곳투성이다.
적어도 700억 이상은 들고 있어야 문제없이 인수를 마치고 회생 작업까지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가서 이야기 좀 해보죠.”
순순히 말해줄지는 미지수였으나 기존에 얼마나 제시했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는 곧장 관리동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하니 아까 만났던 글렌 툴릭의 사장 앵거스 헤이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클리버든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운영하던 사장의 처조카였다.
그리고 언제 온 건지 그의 옆에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도 함께 있었다.
정체 모를 남자는 헤이터를 향해 뭔가 열심히 설득하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눈이 얄팍하고 마른 체형이었는데 보통 이런 얼굴을 쥐상이라고 하던가.
“증류소 구경은 다 끝냈습니까?”
“네, 좋더군요.”
“그러면 인수 경쟁에 참여하시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죠?”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몰라도 헤이터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달라졌다.
어쩌면 돈 냄새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떨어지는 돈이 많아지니 당연한 일이겠지.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헤이터는 옆에 있는 남자를 소개해줬다.
그는 이번에 글렌 툴릭을 인수하기 위해서 온 라즈 이브기라고 했다.
“어지간한 금액으로 어림도 없으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시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더라고요.”
“어디서 온 분들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브기는 그래도 예의까지 잊진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도 꺼냈는데 헬리엇 사모 펀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도 그에게 내 명함을 주었는데 재밌게도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호오! 오저당의 분들인지 몰랐습니다.”
“오저당이 어떤 곳인지 아시는군요.”
“물론이죠. 저희 헬리엇의 본사가 미국에 있으니 모를 수가 없죠. 혹시라도 투자받으실 의향이 있다면···.”
“전혀 없습니다.”
나는 깔끔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오저당에게 지금까지 투자해주겠다며 다가온 이들이 과연 한두 명일까.
엄청나게 다양한 이들이 꿀단지를 탐하며 접근해왔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저당은 항상 버는 금액에 맞춰 투자하는 방법을 택했고 지금껏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브기도 꽤 끈질겼다.
오저당에 돈만 넣어두면 최소 몇 배 이상은 불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헬리엇에서는 2,200만 파운드를 제시했는데 젊은 사장님은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반면에 헤이터는 모든 관심이 자신의 증류소가 아닌 오저당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슬쩍 헬리엇의 제안을 내게 공개했다.
지금 환율로 350억 원 정도 되려나.
원액의 가치만 제대로 쳐주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으로 계산한 금액 같았다.
이건 아예 부동산과 설비 같은 것은 제대로 계산조차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상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이랜드 지역보단 비싼 동네지만, 도심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렴한 곳이 바로 이 근방이었다.
어차피 이 동네에 개발 호재 같은 것은 딱히 없다는 것은 이미 인근 증류소에서 일하는 테넌트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생각보다 저렴한 금액이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2,200만 파운드요? 진심인가요?”
아직 이곳의 원액에 대한 가치를 직접 계산해본 것은 아니나 나는 적어도 4천만 파운드 정도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저렴했다.
후려치면 후려칠수록 남기는 이득이 더 많아지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가격에 정말 넘길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빚이 있다더니 그것 때문에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옆에서 슬쩍 뫼리스가 조언을 해줬다.
그는 이브기를 줄곧 째려보고 있었는데 유서 깊은 증류소를 해체하려는 행동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되었다.
이런 증류소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가슴 아픈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170년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저는 2,500만 파운드에 인수하겠습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헬리엇의 조건이 어떤 건지 모르겠으나 계약서에 사인하면 최대한 빨리 전액 현금으로 지급될 수 있게 해드리죠.”
“헬리엇은 2,600만 파운드를 드리죠.”
그 말을 하면서도 내키지 않는 건지 이브기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저렴하게 일을 처리할수록 성과로 남는데 그게 불가능해져서인 것 같았다.
더구나 이 일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을까.
나도 그쪽 바닥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몇 개월쯤은 이리저리 재보면 계획을 세웠을 것이 분명했다.
사모 펀드도 결국 남의 돈을 가지고 운영하는 것이고 투자자에게 이득을 안겨주지 못하면 존재 의미가 없었다.
아마 글렌 툴릭의 원액과 부동산을 넘길 곳까지 섭외해서 출구 전략도 짜놨겠지.
하지만 나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한두 번씩 번갈아 가며 값을 올리니 어느덧 3,000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그 정도가 되자 다미안은 식은땀을 흘렸고 헤이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번 핑퐁 할 때마다 십억 이상의 돈이 추가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에서 잠시 멈췄다.
이브기가 내심 생각했던 적정가는 3천만 파운드였던 것 같았다.
“3천만 파운드면 손해 아닙니까? 우리가 이럴수록 헤이터 씨만 이득이잖아요.”
“여길 해체하려는 헬리엇과 달리 오저당은 인수해서 술을 빚을 거라 손해라 보기는 어렵죠.”
쫄리면 빠지시던가.
헬리엇은 어떤지 몰라도 오저당에는 아직 여력이 있었다. 사내 유보금이 오저당이 가진 전 재산은 아니다.
자금이 부족하면 OGD 멕시코와 함께 사들인 뒤에 지분을 나눠도 된다.
그런 방식이라면 지금 가격의 두 배쯤 되어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증류소가 500억도 안 한다면 바겐세일이라고 봐도 된다.
이미 오저당은 돈 레오넬을 12만 달러에 인수해서 700배 가까이 가치를 올린 전적도 있었다.
여길 인수하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 몰라도 그 이상으로 만들 자신은 있었다.
마케팅과 디자인만 손보고 뫼리스가 소속된 끌루소의 협조만 얻어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이브기는 잠시 자리를 벗어나 헬리엇의 담당자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은 역시 무리였던 걸까.
어쩌면 계약을 성사시켜도 남는 게 없을 거란 판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들이 예상했던 예산에서 800만 파운드나 초과한 상태였다.
통화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고 인수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한 건지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헬리엇은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쪽에서는 오저당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의향이 있으니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나는 한번 웃어주며 명함을 챙겼다.
아까 했던 대화에서 말했듯이 투자는 받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으나 여기서 단호하게 선을 그을 이유는 없었다.
이브기가 패배를 인정하고 밖으로 나가자 나는 곧바로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헤이터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승자의 여유보다 더는 잔꾀를 부리지 못하게 재빠르게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계약 조건을 조율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