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덜도 말고 5년 (3)
중국 상하이의 구시가지 푸시.
그곳에 사는 20대 초반의 왕얀은 어린 시절부터 K-POP의 열렬한 팬이다.
적어도 10년 정도 된 그녀의 덕질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최애는 RJ다.
글로벌 스타가 되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SNS를 돌아다니던 영상을 보고 팬이 된 케이스였는데 다른 멤버보다 RJ의 지적인 모습에 많이 끌렸다.
영어도 상당히 잘하고,
미술과 문학에도 관심 많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덩달아 왕얀 역시 미술관을 자주 찾았고 대형 박물관의 큐레이터를 꿈꾸는 대학생이 됐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이따가 저녁에 같이 술이나 한잔 하러 갈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저녁쯤에 RJ가 내놓은 술을 사러 나갈 생각이야.]
[응? 그거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어?]
[아니, 개인적으로 사서 중국으로 들어온 사람이 파는 거 사려고.]
[생각보다 꽤 비쌀 텐데?]
어린 시절부터 같은 그룹을 좋아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왕얀은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최근에 다양한 소문이 들렸다.
요즘 인터넷상에는 중국에도 RJ가 런칭한 술이 정식으로 수입될 수 있을 거란 소문이 은근히 돌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처럼 고단한 게 있을까.
어디 가서 말을 하진 않았으나 왕얀은 중국이란 나라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 공식 계정과 팬 계정을 폭파하는 등의 이해하지 못할 조치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너튜브조차 우회해서 들어가야 한다니 억울했다.
아마 RJ의 술도 그런 이유 때문에 정식 수입이 막힐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품절이 계속되고 있다니 기대조차 되지 않았다.
“돈만 많았어도 곧장 유학을 갔을 텐데. 그러면 이런 고민도 안 했겠지.”
그녀가 원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미국은 너무 멀고 문화도 상당히 다른 편이나 한국은 가깝고 음식도 입맛에 잘 맞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왕얀은 성인이 된 이후부터.
매년 한 번씩 한국에 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일년내내 알바를 해야 하지만,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여겼다.
RJ의 술도 마찬가지다.
비싼 돈을 주더라고 살 가치가 있다.
이번에 내놓은 술은 RJ가 어떤 심정으로 시작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돌 OO, 결혼 발표! 가을에 일반인 여성과 백년가약 예정]
[아무도 예상 못 했다. OO에 이어 △△까지 깜짝 결혼 발표]
멤버 두 명이 연달아 결혼을 발표했다.
향후 활동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몇몇 이들은 벌써 잠정적인 해체 수순이라며 악담을 쏟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왕얀은 오빠들을 믿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딛고 십여 년 동안 그룹 활동을 유지하던 이들이다.
더구나 이번 일들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축하해줄 일이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뒤.
왕얀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날이 살짝 어두워지기 직전이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많아 거래하기로 한 이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서른쯤 되는 것 같았는데 머리는 약간 덥수룩했고 등 뒤에는 축 처진 것이 무척 무거워 보이는 백팩을 짊어지고 있었다.
“감저 거래하러 나온 거 맞지?”
“맞아요!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가방에 붙인 아이돌 배지만 봐도 알지.”
그제야 왕얀은 자신의 가방에 여러 K-POP 스타들이 만들어서 판매했던 배지 여러 개가 부착된 것을 떠올렸다.
어쨌든 금방 찾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약속했던 금액을 지갑에서 꺼내려고 하다가 잠시 멈췄다.
“먼저 물건부터 보죠.”
돈만 낚아채서 도망가는 일을 예전에 겪은 이후부터 조심성이 많아졌다.
그때도 아이돌 굿즈 거래를 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보통 이럴 때 반응은 두 가지다.
흔쾌히 보여주거나 아니면 별안간 화부터 내는 이들이 있는데 후자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남자는 흔쾌히 가방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안을 슬쩍 보니 감저가 일곱 병이나 들어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다 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다음 한국 여행을 위해 모은 돈이 제법 있으나 그걸 써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술을 마시려고 사는 게 아니라 수집에 가까운 목적이라 한 병만 있어도 충분했다.
“여기요. 400위안 맞는지 확인해봐요.”
“그걸로는 부족해.”
“무슨 말이에요. 그 가격에 거래하기로 했잖아요.”
“아니, 조금 전에 가격이 올라서 이제는 600위안이야.”
“네? 600위안이요?
한국에서 80위안에 판매되는 술이다.
그런데 600위안(약 12만 원)이면 정가보다 7배나 더 비싼 금액이다.
처음부터 그 금액이었으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싫으면 말라는 듯한 표정이었고 그 사이 문자가 계속 오는 것을 보면 나머지 수량도 모두 임자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살 거요? 말 거요?”
돈을 주지도 다시 넣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서 있자 남자는 재촉했다.
당장이라도 돌아설 기세였기에 왕얀은 자신도 모르게 지폐를 더 꺼냈다.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지금 사지 않으면 더 가격이 오를 것 같다는 불안함도 한몫했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저렴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게요! 그러니 잠시 기다려요.”
*
그런 비슷한 일은 중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팬덤 사이에서는 꽤 문제가 되고 있었다. 발 빠른 기자들은 벌써 기사화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였다.
궈상 그룹에서도 커뮤니티를 통해서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류 유통을 하는 그들 입장에서는 고객의 니즈 파악이 가장 중요했다.
“무조건 RJ와 오저당이 함께 빚은 소주는 우리 궈상이 가져와야 해.”
궈상 그룹의 천펑 회장.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오저당에서 빚는 술치고 천펑의 마음에 들지 않은 술은 아직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애정하는 것은 벽향주 퍼플 라벨이었는데 어지간히 비싼 백주보다 훨씬 더 입맛에 잘 맞았다.
10년쯤 숙성한 백주와 비교해도 오히려 퍼플 라벨이 더 고급스러웠다.
어쩌면 오크통이 아니라 항아리에서 숙성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렴한 비용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라면 최소 몇 배 이상 받았을 것 같은 술이 헐값에 팔렸다.
개인적인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대부분 자회사를 중국에 세워서 직접 수출하기에 수출입 전문인 궈상 그룹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오저당은 아직 기회가 있다.
듣기로는 수년 동안 세 개의 해외 법인을 만들었으나 중국 시장에 대한 개척 의지는 그리 큰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쇼. OGD 그룹과 연이 닿은 중국의 기업은 우리가 유일합니다.”
임원 중의 한 명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미국으로 백주를 수출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이였는데 충분히 그럴만 했다.
미국의 OGD 현지 법인과 궈상 그룹은 이미 거래하는 양이 상당했다.
궈상이 중국 내의 백주 브랜드를 모아서 미국에 있는 OGD로 보내면 현지 유통 업체와 소매점 등에 물건을 뿌려줬다.
원래는 중국 동포가 운영하는 곳과 계약을 맺으려 했으나 여의찮았다.
차이나타운과 아시안 마켓 외에는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궈상은 그 이상을 바랐다.
중국이 빚은 백주를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랄까.
그래서 택한 게 OGD였다.
최근 한국의 술을 수입해서 미국 시장에 유통하기 시작하며 이뤄낸 성과는 제법 이 바닥에서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바크모 등에 입점시키는 성공률도 제법 높은 편이었다.
반대로 수입도 꽤 많이 진행됐다.
요즘 젊은 중국인들 취향이 스피릿으로 바뀌고 있는 탓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버번과 테킬라가 은근히 잘 팔렸다.
“방심은 하지 마. 다 잡은 고기도 놓칠 수도 있는 게 이쪽 바닥이야.”
“물론이죠.”
“안 그래도 오저당에서 저희가 보냈었던 제안서를 좋게 봤는지 조만간 미팅을 하자고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천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그리 오랫동안 이어지진 않았다.
미팅 전에 전달해온 조건 때문이었다.
“무슨 조건?”
“이번에 감저라는 술을 가져가는 곳은 무조건 굿밤과 소담 같은 오저당의 다른 술도 취급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건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바잖아.”
천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단순하게 한때 유행에 맞춰서 감저만 들여올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 오저당의 술을 안착시키고 지속적인 수익을 얻어야 한다.
더구나 오저당의 술은 품절이 자주 생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능하면 많이 가져와서 파는 게 오히려 유리했다.
어느 정도 양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매장에서 소화가 가능한 것이 궈상의 장점이었다.
“문제는··· 양이 제법 많습니다.”
“우리가 자금이 없어서 술을 못 사들이는 곳도 아니잖아. 설마 오저당에서 내민 양이 5억 위안 이상이라도 되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연간 2억 5천만 위안 규모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화로 500억 원 규모다.
그 정도는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국에서 선적하기 전에 전액 현찰로 입금해야 한다는 조건도 따라붙었다.
“뭐? 물건을 받기도 전에 입금하라고?”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대놓고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감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궈상이 안 하더라도 그 조건을 받아들일 곳은 제법 많았다.
업계 3위에서 5위쯤 되는 곳이라면 이런 조건 정도는 우습게 오케이할 것이다.
천펑은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궈상 그룹은 주류 유통에서 7위 정도다.
그것도 미국과 수출입을 하면서 한두 계단 오른 것으로 10위권 내에 들어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가용 가능한 자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펑 회장의 목표는 최소 3년 이내에 5위 이내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 이상 격차가 벌어지면 돌이키기 어렵다.
정글과 같은 경제 시장 속에서 승자만 독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조건이 전부인가?”
“아니요. 중국 시장에 대한 독점을 주는 대신에 1년 계약으로 진행하고 매년 갱신하는 걸로 요청했습니다.”
“1년은 말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과거에 오저당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1년이란 말에 임원들 전체가 술렁였다.
과거에 오저당이 한국에서 심양이란 곳과 계약해서 미국 유통을 시작했던 일을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오저당은 곧장 현지 법인을 세웠다.
그리고 심양이란 곳과 결별했는데 그 여파가 상당했는지 심양은 미국 시장을 거의 접어야 하는 수준이라고 들었다.
임원들이 우려하는 점은 자신들 역시 심양과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펑도 그 점은 오케이할 수 없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제품을 시중에 깔고 본격적인 수익을 내기도 빠듯했다.
“대신 거기에 이런 조건이 붙었습니다.”
“조건이 또 있어?”
“만약에 계약 연장이 이뤄지지 않아도 최소 5년 이내에 현지 법인을 세우거나 독점 권한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최악의 상황이 와도 중국 시장을 뺏기는 게 아니라 다른 업체와 경쟁 체제로 바뀐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다른 회사에 독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최소 2~3년 정도만 독점을 유지하면서 우선적으로 오저당 제품의 점유율만 올려도 이득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그토록 바라던 돈 레오넬의 독점 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존에도 궈상 그룹에서 돈 레오넬 유통을 도맡아서 중국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었으나 그게 독점은 아니었다.
언제든 물량을 빼서 다른 곳에 넘겨도 방법이 없던 상황이었다.
참고로 돈 레오넬은 공산당 간부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좋은 제품이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뇌물로 쓰일 정도는 아니나 생각보다 구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성의를 표시하기 좋았다.
수십 달러 정도 되는 술은 뇌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수준이고 그런 걸로 청렴하지 못하다고 트집도 잡지 못한다.
그러니 눈치 보지 않고 가볍게 선물하기 적당한 술이었다.
“그 정도면 계약할만하지. 오저당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서 계약서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