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도 맞들면 낫다 (3)
멕시코에서 볼일을 마친 뒤.
카를로스가 있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예전에 슈미트와 함께 갔었던 저택이라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신 차는 렌트해야 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긴 쉽지 않았다.
다미안과 함께 렌트카를 받아서 나온 우리는 곧장 그쪽으로 가진 않았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은 돈 레오넬부터 싣죠.”
호르헤가 보낸 돈 레오넬은 항공 화물로 이미 뉴욕에 도착했다. 당연히 그 모든 과정은 LA에 있는 슈미트가 처리해줬다.
다만, 아직 뉴욕에 사무실이 있는 것은 아니라 아는 지인에게 맡겨놨다고 했다.
“네, 주소를 받아놨으니 가는 길에 잠시 들르면 됩니다.”
다미안은 능숙하게 렌트한 차를 몰아서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카를로스의 집으로 향하는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슈미트가 배려해준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통 체증이 심한 뉴욕이라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놨으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 걸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뉴욕에서 살짝 외곽으로 빠진 곳이었다.
얼핏 봐도 물류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화물차가 제법 많이 서 있었다.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차에서 내려 입구 쪽으로 향하자,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질문에 OGD라고 대답해주자 미리 슈미트가 연락해 놓은 건지 곧장 돈 레오넬을 꺼내왔다.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고 곧장 카를로스에게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직접 올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카를로스라면 날 기다리지도 않고 맛부터 볼 게 분명했다.
연애처럼 거래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퍼플 라벨의 맛을 보고 입가에 그 향이 남아있을 때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다.
술을 좋아하는 카를로스이기에 그 순간이 가장 공략하기 쉽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 오신 OGD분들 맞죠?”
“네, 그렇습니다.”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우리가 OGD 멕시코 소속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온 것은 맞잖아.
내 대답을 들은 그 남자는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젠장, 부탁인데 돈 레오넬 좀 많이 만들면 안 됩니까? 바크모에 사러 갈 때마다 헛걸음하는 일이 잦아요.”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을 텐데요.”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내가 다 마셔줄 테니 제발 좀 팍팍 만들어봐요.”
“하하!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남자는 돈 레오넬에 진심이었다.
그간 쌓아둔 말들이 많았는지 우리를 붙잡고 여러 조언까지 해줬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우리 술을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이런 대답을 내놨다.
“그 가격에 좋은 술을 찾기 어려우니 그렇죠. 형편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는 축복 같은 술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한 뒤에 나는 박스에서 퍼플 라벨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한 병 정도 선물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 가져온 술은 대부분 카를로스의 뱃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상자에서 돈 레오넬을 꺼내는 것을 본 남자는 꽤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돈 레오넬을 자주 마시는 사람답게 내가 든 병의 라벨의 색상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라벨이 또 바뀐 겁니까? 그리고 일관성 있게 화이트로 가야지 갑자기 퍼플로 바꾸면 어쩝니까.”
아마 이 남자도 우리 보틀을 수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식장에 일렬로 병을 세우려면 디자인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그러니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평소에 마시던 것과는 다른 겁니다.”
“혹시 신상품인가요?”
“네, 아네호 등급으로 이번에 출시되는 제품인데···.”
어떤 물건인지 설명해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남자는 병의 마개를 뜯어낸 뒤에 곧장 한 모금을 마셨다.
역시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어.
“크음··· 당신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퍼플 라벨을 맛본 거 아시나요?”
“캬아! 죽이네요. 이건 얼마입니까?”
“99달러에 판매될 겁니다.”
“조금 비싸기는 해도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의 술입니다.”
언제 출시될지 모르는 데다가 쉽게 구할 수 없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걸까.
한 병으로는 부족했는지 돈 레오넬이 들어있는 박스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한 병만 더 줄까요?]
향이마저 안쓰럽게 볼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곧장 떠났다.
잠재적인 고객 한 명을 확보하는데 한 병이면 충분하잖아.
우리는 차를 몰아 카를로스의 집으로 향했는데 머지않아 도착한 저택 앞에 앉은 채로 카를로스가 대기 중이었다.
언제 오냐고 몇 번이나 문자를 보내더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공항에서 곧장 온 거 아녔어?”
카를로스는 나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차에 쏠려 있었다. 이내 다미안이 퍼플 라벨을 꺼내자 그는 곧장 낚아챘다.
자신이 들고 가겠다며 소중하게 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았다.
당연히 우리도 나머지 박스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아닌가? 뭔가 바뀌긴 했다.
자세히 보니 바에 놓인 술이 대부분 우리 오저당의 것들이었다. 예전에는 테킬라와 위스키였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였다.
우리가 박스를 내려놓을 때.
카를로스는 벌써 잔을 채웠다.
하지만 곧장 잔을 비우지는 않았다.
아무리 급해도 관찰할 정도의 인내심은 있었다.
“생각보다 색이 엄청 진하네. 1년 숙성한 거 아냐?”
“맞아요.”
“색만 봐서는 거의 10년쯤 숙성한 거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야.”
오! 그걸 맞추네.
따지고 보면 그 정도가 맞긴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코를 킁킁거리며 향을 맡았다.
“그런데 향은 아네호 등급이란 말이지. 이거 참 기묘하네.”
“일단 마셔 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카를로스는 돈 레오넬을 마셨다.
술 그 자체를 판단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가미하지 않았다.
“제길! 마시니까 더 헷갈려. 깊고 중후하게 느껴지는 맛은 또 최고급 엑스트라 아네호 등급 같잖아.”
“크크큭, 그냥 즐기세요.”
“이거 테이스팅 전문가들한테 가져다주면 아주 난리 나겠네. 아무도 1년 숙성한 거라 믿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카를로스는 퍼플 라벨에 흠뻑 빠졌다.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연달아 석 잔을 마신 뒤에야 내게 가격을 물었다.
“99달러? 미쳤어? 200달러쯤은 받아. 이거 충분히 그 정도 값어치는 하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며칠 전에 호르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업계 1위를 잡겠다는 포부를 듣자 카를로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시장 점유율 30%에 도전하겠다니 용감한 건가? 아니면 무모한 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지. 얼마나 오래 걸리냐의 문제일 뿐이야. 영원한 일인자는 없는 법이니까.”
카를로스는 퍼플 라벨을 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해줬다. 화이트 라벨 하나만 있었다면 어려웠을 거란 의미였다.
“하지만 생산량이 그만큼 따라줘야지. 퍼플 라벨은 얼마나 나오는 거야?”
“매달 10만 병 정도는 팔 수 있어요.”
“뭐?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
바크모의 독점이 풀렸기에 10만 병을 나누면 자신의 몫은 아무리 많아야 6만 병도 안 될 거라며 펄쩍 뛰었다.
그것도 행복 회로를 돌려야 나오는 수치였다.
“런칭을 염두에 두고 빚어놔서 이번 달은 꽤 많아요.”
“많이 좀 빚어두지 그랬어.”
“빚는 족족 다 쓸어간 게 누구였는데요. 언제는 팔 것도 부족한데 왜 숙성을 하냐고 닦달하셨으면서.”
퍼플 라벨이 나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예전처럼 품절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나 여전히 소비량이 상당하다.
그 와중에 일부 물량을 빼서 숙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퍼플 라벨을 빚기 시작할 무렵에 증류소 확장 공사가 끝났었던 터라 시도해볼 수 있었다. 만약에 100만 병 단위에 묶여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술인지 알았으면 오히려 내가 먼저 등을 떠밀어줬을 거야.”
“이제라도 알아주셔서 다행이네요.”
황송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카를로스는 웃으며 잔에 퍼플 라벨을 다시 채웠다.
앉은 자리에서 한 병을 다 마실 기세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번에 런칭할 때 어느 정도 줄 건지 물었다.
“뭘 해주실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그때부터 빠르게 협상이 시작됐다.
5만 병부터 시작해서 15만 병까지 올리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카를로스에게 받아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은 매대 위치다.
바크모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베스트셀러 위치에 두 달 동안 오저당의 제품을 깔아주기로 했다.
매대의 위치는 중요하다.
심지어 같은 선반이라도 어느 곳에 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게 된다.
그 자리에서 나는 15만 병을 바크모에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한 느낌이야. 원래 15만 병으로 생각하고 온 거지?”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게 뭐가 중요해요. 누군가 손해를 보면 다음에는 이익도 얻고 그러는 거죠.”
“하여간 말은 잘해.”
그때부터는 편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옆에서 대화 내용을 정리하던 다미안도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 레오넬 퍼플 라벨은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기에 따로 칵테일을 만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술이 살짝 올라올 무렵.
카를로스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뜬금없이 자신이 보유 중인 테킬라 브랜드를 팔 거라고 했다.
“네? 갑자기 왜요?”
“신경 쓸 거는 너무 많고 이젠 기력이 쇠해서 조금 편하게 살려고.”
이 아저씨가 어디서 약을 팔아.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 걸 내가 아는데.
돈이 되는 거라면 어떻게든 손에 쥐려고 하는 분이 포기라니 말이 안 된다.
이건 둘 중의 하나다.
생각보다 돈이 되질 않거나,
좋은 가격을 부른 곳이 나왔거나.
어쩌면 두 가지 모두 맞을지도 모르지.
테킬라 시장의 파이는 정해져 있다.
매년 테킬라 시장이 성장 중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급성장을 하면 다른 브랜드의 판매량은 그만큼 줄어든다.
기존에 테킬라 시장에서 TOP10 안에 들어있는 카를로스가 보유한 두 개의 브랜드 모두 오저당에 역전당했다.
심지어 규모가 비교적 작았던 한 곳은 10권 밖으로 밀려났다.
“둘 중에 어딜 파시려고요?”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 둘 다 팔아버릴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열정을 기울여 어렵게 키운 브랜드인데 아깝지 않으세요?”
제법 좋은 테킬라를 빚었던 곳이다.
카를로스는 별거 아니었다고 버릇처럼 말을 하고는 했지만, 운만으로 이뤄낸 성과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M&A 생각 없어?”
“네? OGD 멕시코랑요?””
“정확하게는 합병이지.”
합병이란 이야기를 듣자마자,
카를로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챘다.
이 아저씨가 자신의 증류소를 미끼로 오저당의 지분을 탐내고 있었다.
솔직히 탐나기는 했다.
두 가지의 브랜드를 더 가져올 수 있고 그걸 토대로 OGD 멕시코는 단숨에 업계 3위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2위와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낚일 수는 없지.
지금 정리하려는 이유는 한마디로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방증이다.
반대로 현재 오저당의 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분을 가지고만 있어도 나중에 처리할 때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매년 수백억씩 배당금을 가져갈 수도 있기에 썩 내키지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혼자 결정하실 문제는 아니잖아요.”
“다른 투자자는 내가 설득해야지. 그리고 오저당 지분이라면 다들 환영할 거야.”
두 곳 모두를 합병할 경우.
카를로스는 49%의 지분을 원했다.
각각은 오저당보다 못하나 양쪽의 매출과 규모를 합치면 오저당보다 1.5배쯤 더 컸다.
나름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51%를 주겠다는 것은 경영권은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기에 더 듣지 않고 거절했다.
괜히 기운 빼고 싶지 않았다.
“저희 스타일 아시잖아요. 저는 1%의 지분이라도 남과 나누는 게 싫어요.”
카를로스도 내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거액을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모조리 거절했었다.
심지어 오저당은 대출조차 받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초창기에 한 번이 전부였다.
첫해가 끝날 무렵에 창고를 지을 때는 돈이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대부분 버는 돈에 맞춰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대출을 앞으로도 계속 받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은행에 이자를 내기 싫어서 그냥 안 받는 것뿐이다.
만약에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면 쓸 때는 써야지.
하지만 아예 관심이 없진 않았다.
만약에 정말 카를로스가 증류소를 정리한다면 욕심나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기존에 그가 맺어놨던 계약들이었다.
“다른 거는 필요 없고 정말 증류소를 정리하실 거라면 아가베 농장에 걸어 놓은 수매권만 저에게 따로 파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