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도 맞들면 낫다 (4)
아가베를 확보할 경우.
생산량을 대폭 늘릴 수 있다.
따로 뭔가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돈 레오넬 증류소는 아가베가 들어오는 즉시 작업할 수 있는 상태다.
카를로스가 아가베를 넘길 경우.
현재 110만 병에 달하는 생산량이 200만 병까지 순식간에 늘어날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리하실 거면 그걸 저한테 넘기는 게 더 이득이잖아요.”
내 제안을 들은 그는 잠시 소파에 기대 생각에 빠졌다. 아마 지금 모아놓은 수매권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 중이겠지.
예상컨대 그 양이 엄청날 것이다.
욕심 많은 이 아저씨는 언제나 자신의 증류소에서 빚는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아가베를 사들이는 편이다.
쓰다가 남은 것은 다른 증류소에 팔면 되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걸로 돈을 벌었지.
우리가 테킬라를 빚기 몇 년 전에 아가베 가격이 폭등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상당히 큰돈을 만졌다.
“오저당에 넘기는 게 이익일까?”
“물론이죠. 돈 레오넬이 넉넉하게 만들어지면 퍼플 라벨의 수량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거예요.”
“그렇기는 하지.”
“영업 비밀을 넘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브랜드 가치가 저하되는 것도 아닌데 뭘 고민해요.”
인수합병을 진행할 때.
당연히 수매권도 인정을 받는다.
거기에 걸려 있는 계약금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넘기면 거기에 커미션이 붙게 된다.
설마 내가 있는 그대로 받겠어?
당연히 일정량의 수수료를 붙여줄 거다.
그것뿐인가. 추가로 만들어진 돈 레오넬을 받아서 팔면 바크모의 이익도 더 늘어난다.
“일단 생각해볼게. 지금 당장 답을 해줄 수 없는 거 알지?”
어느 정도까지 M&A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던 건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확정된 것은 아직 없을 거다.
그 정도까지 진행된 이야기라면 내게 합병을 권유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인수 의사를 밝힌 곳에서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오저당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카를로스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수합병에 경쟁자가 생기면 분위기가 달라지게 되는데 오저당이 동종 업계에 있다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크다.
‘하여간 쉽게 볼 수 없다니까.’
어쨌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이 문제는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상황에 맞춰서 검토해보겠다는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이죠. 확정되면 연락주세요.”
*
그로부터 3주 뒤.
미국에서 퍼플 라벨이 출시됐다.
다른 동일한 등급의 테킬라보다 거의 1.5배쯤 되는 가격이었으나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 살 수 있냐가 문제였다.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바크모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15만 병을 주었으나 백여 곳의 매장에서 나누어 가지니 판매 가능한 수량은 매장별로 기껏해야 1,000 병이 전부였다.
그 수량은 한 줌의 모래와 같았다.
제법 많은 것 같아도 전시와 동시에 그대로 사라지는 일이 허다했다.
생각하고 있을 틈조차 주지 않으니 가격 같은 것은 사소한 문제처럼 여겨졌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돈 레오넬은 확고한 팬덤이 있다.
따로 광고를 할 필요도 없이 커뮤니티 같은 곳에 슬쩍 정보만 흘려도 입소문을 타고 알아서 퍼졌다.
### : 제길! OGD가 소리소문없이 돈 레오넬 퍼플 라벨을 내놨어.
ㄴ### : 정말이야?
ㄴ### : 오늘 바크모에 갔는데 배너 걸려있더라. 다들 어떻게 알았는지 오픈과 동시에 다 쓸어갔어.
### : 가격은 OGD 답지 않더라. 초심을 잃은 걸까?
ㄴ### : 얼마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야?
ㄴ### : 99달러. 스토어 할인받아도 96달러 정도는 줘야 할 거야.
ㄴ### : OMG! 자주 마시는 사람한테는 부담되는 수준이네.
### : 가격은 일단 맛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단골인 바크모 매장에서 한 병을 시음용으로 내놨는데 쩔더라.
ㄴ### : 99달러의 값어치가 있어?
ㄴ### : 최소 두세 배는 받아도 돼. 지금까지 맛본 테킬라는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 : 우리 동네는 일부 수량을 추첨 형태로 판다고 하더라. 200병이 전부인데 벌써 응모한 사람만 900명을 넘겼어.
ㄴ### : 그래도 아예 가능성이 없진 않잖아. 우리 동네는 이미 끝났다고.
ㄴ### : 바크모말고 다른 곳은 파는 곳이 없는 거야?
ㄴ### : OGD가 SNS에 올린 거 보니 한인 마트랑 다른 곳도 있다는데 수량이 바크모보다 훨씬 작다고 하더라.
이미 다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돈 레오넬 때문에 겪은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점차 뜨거워지고 있는 분위기에 불을 지른 이가 있었다.
[스피릿 포인트 평점 : 4.8]
LA에 있는 스캇 왈라스.
그가 내린 점수는 역대급이었다.
오저당이 KR 마트에 납품하기 위해 심양과 함께 미국에 진출했을 당시에 평점을 줬었던 게 4년 전이다.
당시에 오풍주가 4.5점이었다.
보통 4.5점은 한해에 두세 개도 나오기 힘든 점수였고 그 덕분에 미국 진출 과정에서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4.8점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껏 그 점수를 받은 술은 정말 손에 꼽힐 정도였고 50년 가까이 숙성한 정말 고가의 술이 대부분이었다.
스피릿 포인트 역사상 최소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란 의미였다.
당연히 그걸 본 이들은 어떻게든 새롭게 내놓은 돈 레오넬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와··· 이것 좀 봐보세요.”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쉬고 있던 내게 다미안이 다가와 태블릿을 보여줬다.
상체를 일으켜 화면을 보자 누군가 올려놓은 퍼플 라벨 사진이 보였다.
그런데 사진이 정말 별로였다.
주변 정리도 안 해놓고 조금 어두운 곳에서 찍은 탓에 라니가 애써 만든 라벨이 무척 칙칙하게 보였다.
“좀 예쁘게 찍어서 올려주면 덧나나.”
“경매 사이트인데 퍼플 라벨을 100만 원에 팔겠다는 사람까지 나왔습니다.”
“그래도 10배는 넘지 않았네요.”
이쪽 바닥에도 리셀러는 있다.
술도 재테크가 가능한 품목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대부분 한정 수량 판매되는 것들인데 구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몇 배 이상의 이익을 얻는다.
희소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수십 년 동안 숙성한 그리고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 빈티지는 매년 20% 가까이 가격이 오르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하던 현송 주류의 도진학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술은 4년 동안 가치가 억 단위로 올라갔다.
문제는 그만큼 돈을 쓰신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잖아.
이게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술에 대한 지식과 끊임없는 관심 그리고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소주를 사놓고 값이 오르길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며칠 전에는 2~3배 정도였는데 확실히 스피릿 포인트의 영향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서 술을 보내기는 했는데 이렇게 점수를 후하게 줄지는 몰랐어요.”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준 것 같았다.
한 잔을 마시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마시고 싶은 이들에게 99달러는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몇 병 더 보내드리는 거는 어떨까요?”
“그때부터는 뇌물이 되는 거죠.”
나는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 저었다.
경매에 올라온 가격만 놓고 보면 돈 레오넬 퍼플 라벨 10병만 보내도 거의 천만 원에 달하는 가치라 환산된다.
진짜로 열 배나 되는 가격에 판매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계산할 것이다.
아마 받는 쪽에서도 부담이 되겠지.
그보다 좋은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앞으로 더 좋은 퀄리티의 술을 빚어서 테이스팅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언젠가 만점인 5.0이 나올 수도 있잖아.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출시되는 벽향주 옐로우 라벨도 있었네요. 차라리 그걸 보내주세요.”
어느덧 수호가 정성들여 빚은 옐로우 라벨도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과연 그건 어느 정도의 점수가 나올지 궁금했다. 만점은 아니더라도 4.5점 이상만 나와도 만족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점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라난 지역에 따라 입맛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신맛이 강한 음식에 꽤 민감하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향신료만 보더라도 나라마다 차이가 심했다.
그나마 나는 미국에서 자란 탓인지 고수를 꽤 즐기는 편이나 수호는 샴푸 같은 맛이라며 아주 질색할 정도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보내줄 때 기존에 판매 중이던 화이트와 퍼플 라벨의 맛과 비교할 수 있게 몇 병 정도 같이 넣어주면 더 좋고요.”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다미안은 알겠다며 대답을 하고 곧장 태블릿에 내 지시 사항을 적어놨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다미안이 시계를 보더니 대화를 멈췄다.
“이제 슬슬 약속 시간이 다 됐습니다. 정말 저 없이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업무상 미팅도 아니고 개인적인 약속인걸요. 모처럼 서울에 머무는 거니 다미안도 개인적인 볼일 봐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곧바로 연락주십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알겠다며 대답하고 일어났다.
약속 장소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반 스카이 1호점이었다.
정말 모처럼 가는 그곳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직원이 낯선 얼굴이었다.
몇 년 전에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은 이제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철이 형은 미국에서 오저당 F&B 미국 지사를 이끌고 있었고 유나 누나는 얼마 전에 세계 칵테일 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서 긴 시간 고생하며 그토록 바라던 대상을 드디어 받았다.
하지만 아는 얼굴이 없진 않았다.
과거에 2호점을 맡고 있었던 지점장님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곧장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안내해줬다.
이미 그곳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선배, 먼저 와계신 줄 몰랐어요.”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공항에서 우연히 봤었던 장성근 선배다.
주류 협회에서 미팅이 있어서 올라온 김에 시간이 맞아서 잡은 약속이었다.
“방금 왔어. 여기도 오저당 F&B에서 하는 매장이야? 거기서 이런 스타일의 루프톱 바까지 하는 줄은 몰랐네.”
“그런 거는 아니고 삼촌이 F&B를 맡기 전에 개인적으로 하시던 곳이에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여기 와본 적 있지? 예전에 인사드린 것 같아.”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나 내가 1학년 때 같이 와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삼촌을 뵀던 것 같았다.
“자··· 그럼 오늘은 어떤 술부터 시작할 거야? 나 내일 아예 휴가 내놨으니 쉽게 집에 갈 생각은 하지 마.”
“저도 호텔 잡아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처럼 5차까지 달려봐야죠.”
“하하! 역시 주도찬이야.”
어린 시절의 우리가 5차까지 막무가내로 술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노래방과 당구장을 한 바퀴 돌고 호프집을 시작으로 소주로 마무리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잠시 그때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자 지점장님이 내가 부탁해놨던 술과 가벼운 안주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돈 레오넬 퍼플 라벨이었다.
“시작부터 테킬라는 무서운데.”
“그냥 맛만 보시라고 준비한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미국에서 엄청 핫하다고 소문난 술이라 도대체 무슨 맛이길래 그런 건지 궁금했는데 잘됐네.”
선배의 반응은 꽤 뜨거웠다.
비록 지금은 오션에 다니고 있으나 평소에는 우리 술을 즐겨 마신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술이 돈 레오넬이었다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내가 비록 경쟁사인 오션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 대박이란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경쟁사요? 오션에 비하면 저희는 구멍가게 수준인데 신경이나 쓸까요?
“만약에 오저당 지분이 너한테 100% 있지만 않았어도 벌써 우리 팀이 작업 들어갔을 거야.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
“와··· 무섭네요.”
약간 소름 돋는 기분인걸.
하긴 우리가 이젠 듣보잡 수준은 아니지.
대표 제품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만큼 탐나는 곳이란 의미야.”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네가 성공해서 정말 고맙더라.”
“네? 뭐가 고맙다는 거죠?”
“오저당이 한국의 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잖아. 확실히 예전과 비교하면 위상이 다른 게 느껴질 정도야.”
한국의 술하면 소주가 떠오른다.
그게 하필이면 희석식 소주라 문제다.
저가의 퀄리티 낮은 소주가 긴 시간 숙성하는 위스키 같은 것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오저당에서 빚은 소담과 벽향주를 통해서 소주와 청주가 원래 얼마나 맛있는 건지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성근 선배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며 내게 기쁜 얼굴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 자부심을 혼자 느끼고 싶지 않다며 선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OGD도 오션처럼 확장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M&A 팀을 꾸릴 생각인데 저랑 같이 일해보시는 것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