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도 궁합이 있답니다 (2)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그 말은 패션계만 해당하진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주류 업계도 저알코올 제품이 치고 올라오는 동시에 하이볼이 다시 한번 유행하고 있었다.
하이볼의 역사는 꽤 길다.
어원이나 유래에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최초의 기록은 1895년도에 등장한다.
하지만 하이볼이 딱히 어떤 특정한 칵테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카테고리의 명칭이라고 봐야지.
칵테일 중에 OO콕, OO토닉 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들이 하이볼인데 보통 뭘 섞냐에 따라 접미사가 붙여진다
예를 들면 제일 유명한 잭 콕은 콜라고 진 토닉은 토닉 워터를 섞은 조합이다.
선배의 리스트에 올라온 업체는 토닉 워터 브랜드 ‘피레시아(pirexia)’였다.
피레시아가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고 있으나 처음 접한 곳은 미국에서 유나 누나가 만들어준 하이볼을 통해서였다.
요즘 오저당 F&B 미국 매장에서 가장 핫하고 주력으로 밀고 있는 칵테일 중의 하나가 ‘테크토닉(TeqTonic)’이다.
테크토닉은 테킬라와 토닉 워터의 합성어로 유나 누나가 개발한 메뉴다.
바텐더 세계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도 바로 테크토닉 덕분이었다.
‘돈 레오넬과 피레시아는 궁합이 잘 맞는달까.’
다른 종류의 테킬라와 토닉 워터를 쓰면 테크토닉 특유의 맛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선배도 알고 있었다.
“피레시아에 알코올은 전혀 들어가지 않지만, 돈 레오넬과 시너지 효과가 나올 거라 기대돼서 넣었어.”
토닉 워터는 알코올이 없다.
성분만으로는 보면 탄산수에 가깝다.
차이가 있다면 퀴닌이 들어간다는 건데 요즘에는 워낙 다양하게 나와서 그렇게 구분하는 것도 조금 애매한 상태다.
참고로 피레시아의 토닉 워터는 합성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 퀴닌 성분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글로벌 점유율 1위인 피벗 우드의 방향성과 꽤 흡사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알코올이 없는 제품이라 요정의 효과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피레시아는 분명 좋은 기회였다.
“여길 천억 원에 가져올 수 있다고요?”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피레시아에서 토닉 워터를 개발해서 처음 제품을 내놓은 게 6년 전쯤이다.
그사이에 제법 성장해서 천억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사이즈가 됐다.
상당히 빠른 성장세였다.
현재 가치를 따져보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성근 선배는 내가 가진 고정 관념에 대해 지적했다.
“인수합병이 모든 지분을 가져오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하긴 오저당이 조금 특별한 케이스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곳을 인수하며 지분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작은 곳들만 가져왔던 덕분이다.
“아··· 경영권만 가져올 건가요?”
“그래야지. 피레시아 같은 곳을 가져오려면 기존과 다르게 이제부터는 조금 지저분한 방법을 써야 할 수도 있어.”
선배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인수합병 과정은 낭만과 인정 따위는 전혀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약하면 잡아먹히게 된다.
오저당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도 투자를 받는 쉬운 길로 가지 않고 독자적인 루트를 타고 온 덕분이다.
투자금 확보를 이유로 지분을 넘겼다가 주주들이 변심해서 회사 소유주가 다른 이로 바뀌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편이다.
피레시아 역시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성장한 속도를 보면 회사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요.”
“맞아. 직원들의 능력도 좋고 오저당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는 곳으로 유명해.”
“그렇다면 오너 리스크인가요?”
“빙고! 일단 이것부터 읽어봐.”
선배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런 뒤에 검색창을 열고 에드윈 베르디언이란 이름을 타이핑했다.
잠시 후에 검색창에 뜬 내용을 본 나는 무슨 상황인지 곧장 이해했다.
“이 사람 미친 거 아닌가요?”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을 성추행한 것도 모자라서 인격 비하 폭언에 인종차별까지 했다고 한다.
이게 어쩌다 나온 실수는 아니었다.
여직원들 있는 자리에서 아내와의 잠자리 이야기를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성차별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단다.
레스토랑에서 난동을 피운 것 따위는 그리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심지어 봇물 터지듯 제보가 계속해서 매일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피레시아 본사가 있는 스페인 현지에서도 매장되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더해서 피레시아를 향한 불매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을 정도였다.
“매출에 타격이 상당하겠네요.”
“그만큼 기업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지.”
“위험 부담은 반대로 늘어나죠.”
“맞아. 하지만 오너 리스크만 해결할 수 있으면 금방 잠잠해질 거야.”
해결책은 간단하다.
베르디언을 끌어내리면 된다.
이미 우호적인 지분마저 돌아선 상태라 추정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문제는 거길 가져오려면 당장 자금을 투입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이 타이밍이긴 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간을 보려는 이들이 많이 생길 텐데 그러면 일이 복잡해져.”
“안 돼도 찔러보자는 뭐 그런 건가요?”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사들일 수만 있다면 나중에 그만큼 많이 남기니까.”
턴 어라운드였던가.
가치 높은 기업이 잠시 휘청거릴 때.
인수한 이후에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매각해서 처분하는 기법 중이다.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후려치기에 성공하면 대박이고 아니다 싶으면 손을 떼면 그만인 일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꼭 피레시아가 아녀도 된다.
더 좋은 매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우리가 빚는 돈 레오넬과 피레시아의 매칭이 어떤 효과를 만들지 충분히 그려졌다.
순수익 비율은 높지 않겠지만,
매출에 꽤 영향을 줄 것이라 예상됐다.
이미 오저당은 ASAP과 굿밤 같은 도수가 낮은 제품으로 톡톡히 효과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소모되는 양도 상당했다.
한 잔의 하이볼을 만들려면 캔 하나를 거의 다 써야 할 정도다. 그렇다고 돈 레오넬이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한번 테크토닉에 꽂히면 앉은 자리에서 몇 캔씩 마시게 된다.
나 역시 누나가 하이볼을 만들어주면 적어도 서너 잔 이상은 마셨던 것 같았다.
당연히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다.
막상 따져보면 테킬라 서너잔에 불과한 수준이다. 하지만 시원하게 벌컥거리며 마시는 그 느낌이 하이볼만의 매력이다.
“돈 레오넬과 엮어서 마케팅을 하면 어느 정도까지 복구하는 게 가능할까요?”
“글쎄··· 내 생각에 한두 해 정도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진짜 여길 가져오려고?”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네요.”
“자금 마련할 시간이 부족할 텐데.”
그게 가장 문제이긴 했다.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300억이 전부다.
M&A에 사용될 목표 자금을 모으려면 아직 멀었다.
원래 계획은 국내에서 300억 정도만 더 준비하고 미국과 멕시코에서 연말 이후에 400억 정도를 당겨올 생각이었다.
아직 배당금으로 받아서 진행할지 아니면 해외 법인이 일부 지분을 직접 받아 가는 걸로 할지 정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진 않았다.
사업은 원래 빚을 내서 하는 거라잖아.
회사채를 발행한다고 하면 당장 달려들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회사채를 발행하면 되겠죠.”
“이자로 나가는 비용이 꽤 될 텐데.”
“어차피 그 금액만큼 법인세에서 손비로 인정된다고 알고 있어요.”
“오저당은 상장된 회사가 아니라 전환 사채는 안 될 테고 어느 정도의 신용 평가가 나올지 모르겠네.”
“그것 말고도 방법은 많잖아요.”
맥주 공장과 오저당의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도 되고 그마저도 안 된다면 외부의 펀드와 손을 잡아도 된다.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성근 선배도 쉽게 수긍했다.
“그것도 방법이지. 그런데 저번에 오저당에서 헬리엇 사모 펀드에 투자한 돈이 꽤 많다고 하지 않았어?”
“멕시코에서 넣은 것까지 합치면 300억쯤은 돼요.”
“출자의무기간이 얼마나 되는데?”
“절반쯤은 1년 7개월 남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보다 더 길어요.”
헬리엇 사모 펀드에 돈을 넣을 때.
이브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옵션을 제시해서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당시에 2년을 의무로 걸고 300억으로 스코틀랜드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는 걸로 결정을 내렸는데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헬리엇 사모 펀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수익률도 꾸준히 상승해서 최근에 15%를 찍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45억 가까이 번 것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M&A만 아니면 사모 펀드에 투자금을 더 넣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요즘 글로벌 경제 상황은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쟁과 코로나 그리고 인플레이션까지.
온갖 악재가 있었던 시기는 이미 다 지났고 그 기간 동안 주춤했던 성장력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수익이 좋네.”
“듣기로는 희토류 쪽에 투자했다는데 거기서 나오는 수익이 제법 쏠쏠해요.”
“어쨌든 그 돈은 못 쓰는 거잖아.”
“이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아직 확정은 아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성근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료를 내놨다.
서류철을 열어보자 피레시아의 지분 구조가 정리되어 있었다.
“베르디언의 지분은 32%네요. 왜 이렇게 낮은 거죠?”
“기존까지는 초창기에 창업할 때 투자를 해줬던 20%의 지분을 가진 펀드 쪽이 확실한 우호 지분으로 구분됐거든.”
“저희는 얼마나 확보해야 할까요?”
“당연히 많을수록 좋지.”
51% 이상이면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주식 시장에서 매집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작년에 상장하며 한때는 삼천억 내외까지 올랐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 총액이 이천억 내외까지 떨어졌다.
단순히 생각하면 천억을 가지고 절반의 주식을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나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아무리 비공개로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사들이면 상대방이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고 속도를 내자니 가격도 그만큼 빠르게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러니 투자자들의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병행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의결권 위임장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이번 M&A의 키는 피레시아의 20% 지분을 가진 몬티엘 펀드가 쥐고 있군요.”
*
목표가 정해진 뒤부터.
일이 진행되는 속도는 빨라졌다.
선배는 피레시아를 타깃으로 삼고 M&A 부서 직원들과 함께 적대적 인수 작업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했다.
자금 문제가 해결된 덕분이다.
피레시아 이야기를 나눈 지 며칠도 안 돼 오저당은 700억을 추가로 마련했다.
거기에서 절반은 OGD 멕시코에서 투자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호르헤도 피레시아와 돈 레오넬의 궁합이 좋다는 것과 테크토닉이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OGD 멕시코가 피레시아의 지분 일부를 가지는 방식을 택했다.
나머지 절반은 은행을 이용했다.
채권은 복잡한 탓에 맥주 공장과 건물을 담보삼아 대출을 받는 것으로 했다.
신청만 한다면 350억 정도는 무리 없이 나올 거라 했다.
이자가 제법 들어가겠지만,
어차피 올해 내에 중도 상환이 가능한 수준이라 부담되진 않았다.
그 덕분에 천천히 지분을 매집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으나 저렴할 때 줍줍하는 상황이다.
현재 상황을 보면 더 떨어질 곳이 없어 보일 정도로 주가 방어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에 M&A에 실패해도 상관없다.
오너 리스크만 해결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 추측됐기에 주식은 나중에 처분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M&A 과정에 경쟁자가 생길 경우.
그렇게 매집한 주식은 베르디언에게 그린 메일을 보내서 비싸게 팔아도 된다.
경영권 방어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프리미엄이 상당히 붙을 것이다.
어쨌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될 무렵에 나는 스페인으로 출장 일정을 잡았다.
피레시아의 대주주인 몬티엘 펀드의 대표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우리가 스페인의 로그로뇨 공항에 도착한 것은 거의 26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는 직항이 없는 탓에 두 번이나 경유해야만 했다.
다미안과 내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향이만큼은 상당히 흥분한 표정으로 공항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셰리 와인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리오하 지역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