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49화 (249/254)

그나마 다행이야 (2)

향이는 한 차례 더 성장했다.

수년간 애타게 바라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도 7년 전쯤이었나. 워낙 오래되어서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였다.

좋은 술을 많이 빚을수록 성장한다.

모든 요정들은 명확한 룰을 가지고 있다.

향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당시만 하더라도 다음 변화가 조만간 있을 거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오저당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생산도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전혀 변화가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문제는 향이도 왜 그런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온 거야?”

[갑자기 요정계로 호출당해서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요정계가 뭐야?”

[쉽게 말하면 요정들이 사는 차원이죠.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요정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고요.]

향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상당한데 요정계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본다.

왜 그런가 했더니 향이도 존재는 알고 있었느나 이번에 가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곳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요정계에서 태어나서 이쪽 세상으로 보내지는 거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죠.]

“여기서 소멸하는 요정은 다 그쪽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요. 예전에 말했듯이 안타깝게도 소멸은 말 그대로의 소멸이에요. 간혹 스퍼처럼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나 굉장히 드믄 케이스는 아니죠.]

그 뒤로도 향이는 요정계에 대해서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런 구조였다.

요정계에서 막 태어난 요정들은 차원 너머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성장한 요정들 일부는 다시 요정계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온 요정은 다시 요정계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요정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는다고 했다.

향이도 그렇게 소환된 케이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거였어?”

내 질문에 향이는 아니라며 고개 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향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려줬다.

[검이가··· 저 대신 남았어요.]

그제야 향이와 함께 사라졌던 검이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향이에게 온통 신경이 집중된 탓에 거기까진 신경 쓰지 못한 탓이었다.

“검이가 왜?”

[소환된 것은 저 하나뿐이었는데 검이 이 녀석이 우연히 따라서 들어왔거든요.]

괜히 별명이 껌딱지가 아니었다.

검이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곧장 향이 곁에 달라붙었고 본의 아니게 덩달아 요정계로 소환됐다고 한다.

그리고 향이 대신 그곳에 남아 자신이 의무를 다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향이가 이쪽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이랑 너는 엄연히 격차가 있는데 그걸 오케이해줬어?”

[당연히 쉽진 않았죠. 그래서 이렇게 오래 걸린 거기도 하고요. 다행히 검이도 한 단계 상승할 때라 통했어요.]

검이가 이 세상에 조금 더 있었다면 예전의 향이처럼 다른 세상에 보내져 술의 요정들을 케어했을 거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더 잘해줄 걸 그랬어.”

향이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한 검이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줄 걸 그랬다.

애석하게 말을 못 하는 다른 요정들처럼 나와 직접적인 소통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어요.]

“그게 뭔데?”

[우선은 제가 이 세상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에요.]

깜짝 놀라 어느 정도 남은 거냐고 묻자 향이는 진정하라며 토닥거렸다.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란 의미였다.

[이쪽 세상의 시간으로는 50년쯤 남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50년 후면 내 나이가 85세쯤 되려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니, 어쩌면 향이보다 내가 먼저 떠날 수도 있잖아. 그 외에도 향이는 몇 가지 변화된 것들에 대해서 내게 알려주었다.

가장 큰 변화는 능력의 상승이었다.

녀석이 ‘술의 요정’에서 한 단계 위의 개념인 정령으로 오른 덕분이었다.

참고로 정령은 이 세계에서 정말 흔하지 않은 존재라고 했다.

지금껏 전 세계의 상당히 많은 증류소를 다녔으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요정들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에 퍼져있는 요정들의 상태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는 말이네?”

[비상용에 가까운 거라 모든 요정과 연결할 수는 없고 오저당에 소속된 요정들에 한해서는 평소에도 가능해요.]

“직접 소통도 가능한 거야?”

[판초나 스퍼 같은 특별한 아이들과는 짧은 메시지 정도는 가능해요.]

위성 전화를 탑재했다고 봐야 하나.

어쨌든 상당히 반길만한 이야기였다.

지금껏 시간을 쪼개 각국의 증류소를 찾아다닌 이유 중의 하나가 요정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밖에 볼 수 없는 거라 누구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전화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중에 제품으로 나오는 것을 맛봐서 상태를 확인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러면 너무 늦게 된다.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숙성해서 나오는 제품을 뒤늦게 알게 되면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없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대신 제가 받은 임무가 있어요.]

“그게 뭔데?”

[소멸 위기에 처한 술의 요정들을 구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소명이에요.]

“설마 지구 전체를 다 커버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오저당이 글로벌 기업으로 커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무리였다. 소멸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증류소가 망할 위기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돈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증류소의 덩치가 클수록 따라서 오게 되는 부동산과 설비가 상당히 비싼 경우가 많았다.

[예전처럼 양조장을 인수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제 임의로 다른 양조장에 옮기는 게 가능해졌거든요.]

“휴우··· 다행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계속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건가?”

[후훗. 종종 직접 가야 할 때도 있겠지만, 상급 요정을 전령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 그럴 필요는 없죠.]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만, 지역마다 상급 요정을 배치하려면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상급 요정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 그건 향이가 술의 정령이 가진 권능으로 업그레이드 가능하다고 했다.

뭐··· 그렇다고 오저당의 요정을 모두 상급 요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해진 숫자 이내에서 커버해야 하는데 우리가 독점하겠다고 욕심내다가 나중에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의무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다른 효과들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술의 정령이 된 탓에 요정들의 성장이 더 빨라지게 되었고 술맛도 훨씬 향상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 향이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는 게 중요했다.

녀석이 돌아왔으니 한강에서 말뚝 박고 생활하던 것도 청산하기로 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연우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엇! 설마 제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이야기하기 전에 알고 있더라. 너랑 대화하던 걸 들켰어.”

[오히려 잘됐네요. 이제는 제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지 마세요.]

나는 웃으며 알겠다며 대답했다.

대신 다미안과 연우 앞에서만 가능한 거라고 구체적인 범위를 정해놔야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미안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인제 그만 돌아가죠.”

“호텔로 모실까요?”

“아니요. 삼척으로 갑시다. 아! 다들 식사 전일 텐데 가기 전에 식사부터 하죠.”

모처럼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 탓인지 다미안은 크게 안도했다.

“기다리시던 분이 돌아오셨나 봅니다.”

“네, 그러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른 비서실 직원들이 여기는 정리할 테니 곧장 출발하시죠.”

한강에 오래 머물렀던 탓에 은근히 이것저것 늘어난 짐이 꽤 많이 있었다.

벤치 옆에는 그늘막과 매트가 깔려 있어서 언제든 누울 수 있도록 해놨고 이것저것 간식거리도 제법 많았다.

그길로 곧장 우리는 인근에서 식사를 마치고 삼척을 향해 출발했다.

거의 20일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향이는 꽤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검이 모습으로 컬렉션이나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도 좋겠네. 아예 동상도 만들어서 오저당에 세워놓자.”

[검이가 무척 좋아하겠네요.]

검이를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스케치할 필요는 없었다. 예전에 컬렉션 작업을 하며 검이도 그려놓은 게 있었다.

그걸 토대로 이미 작은 조각상 몇 개도 만들었는데 그걸로는 조금 부족했다.

어떻게 보면 오저당의 요정은 물론이고 직원들 전부를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향이가 사라졌다고 요정들에게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터라 결국에는 문제가 터졌을 것이다.

‘다른 요정들이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도 아니고 절대 불가능하지.’

동상을 놓을 자리는 넘쳐났다.

요즘 오풍리는 아예 요정을 테마로 만든 테마파크처럼 바뀌었다. 긴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오풍리는 동네 어디를 가든 요정을 그려 놓은 벽화가 있었기에 특색 있었다.

계곡에는 낚시하는 요정도 있었고,

물웅덩이가 고질적으로 고이는 곳에는 수영하는 요정 조각상도 있었다.

그렇게 마을 곳곳에 숨겨진 요정 동상의 숫자만 이백여 개에 달했다.

그걸 찾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찾은 이가 179개 정도였는데 대부분의 직원들조차 100%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진 못했다.

오저당을 찾아왔던 이들이 재방문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했다.

더 많은 요정을 찾기 위해 돌아오는 케이스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 결과 지역 예술가에 대한 지원도 상당했다.

대부분의 것들을 강원도에 거주하는 화가와 조각가에게 맡긴 덕분이다.

이게 국내만 있는 게 아니라 해외에 보낼 요정 조각상도 만드는 터라 일감이 상당했다.

[이번에 요정계를 보고 왔으니 확실하게 자문 역할을 해드릴게요.]

“거기는 여기와 많이 달라?”

[그럼요. 하늘에는 항상 세 겹의 무지개가 떠 있고 종종 하늘의 별이 내려와 요정과 어울리기도 하는걸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네.”

인간이 가진 고정 관념 같은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향이는 계속해서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줬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다미안도 듣고 있었으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내 말을 믿는 걸까.

향이는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놈으로 보기 딱 좋았다.

물론, 증명할 방법이 없진 않다.

향이에게 카 오디오를 틀어달라고 하면 믿어주려나. 물리력도 행사 가능하기에 그 정도 부탁은 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증명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운전하고 있는 다미안을 놀라게 해서 사고를 유발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우리는 삼척에 있는 집앞에 도달했다.

모처럼 돌아온 집은 정겨웠다.

보통 출장을 다녀오면 훨씬 더 오래 머물다가 오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독 감회가 새로웠고 향이도 나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았다.

나의 보금자리가 여기인 것처럼,

향이에게도 이 집의 의미가 꽤 깊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고 그 안에는 다양한 술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미니어처로 제작된 술병과 술잔도 있으니 맞춤형 공간에 가까웠다.

“아아아빠! 왜 이제 와쪄.”

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던 걸까.

다미안이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연우와 함께 아들이 우다다 달려 나왔다.

품에 안긴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니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영민이는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내게 자랑할 게 많았던 것 같았다.

한동안 자기 말만 쏟아낸 영민이가 다시 집안으로 돌아가자 연우는 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향이가 돌아온 거 맞지?”

미소를 띠고 있는 내 표정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향이가 돌아왔음을 알려주었다.

“응, 잘 해결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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