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다행이야 (3)
향이가 돌아온 이후.
많은 것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향이가 장담했던 것처럼 요정들의 성장세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검이를 제외한 오풍리의 상급 요정 숫자는 모두 합쳐도 여섯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향이가 돌아온 이후에 셋이나 더 늘어났고 그들이 보유한 능력은 곧 술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늘어난 상급 요정은 정작 다른 지역에 있는 양조장에 옮겨놔야 전령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아무에게나 맡길 이유는 없었다.
‘남 좋은 일을 해줄 수는 없지.’
다행히 오저당은 많은 수의 증류소와 양조장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그룹이다.
당연히 국내 곳곳에 그런 곳들이 있기에 커버 범위를 고려해서 한두 곳 정도만 선정하면 될 뿐이었다.
제천이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했다.
그곳에 있는 굿밤 제3공장은 워낙 많은 양의 맥주를 빚는 곳이라 이미 상급 요정 다수가 상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남해안에 있는 한 곳만 선정해서 옮기면 될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 것 같아?”
[제 생각에는 여수에 있는 옹달샘 막걸리가 적당할 것 같아요.]
나도 향이의 생각에 동의했다.
여수에 자리 잡으면 제주도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커버 가능해진다. 그만큼 제천의 위치가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옹달샘 막걸리도 OGD 그룹에 포함된 곳으로 제법 좋은 막걸리를 빚고 있기에 이미 중급 요정까지 있는 상태다.
요즘 국내 막걸리 시장에서 떠오르는 다크호스라고 봐도 되었다.
현재 오저당의 오풍주는 고급 라인으로 완전히 갈아타서 저가의 막걸리는 빚고 있지 않은 상태다. 그 빈자리를 옹달샘 막걸리가 잘 채워주고 있었다.
“그러면 다음 주 중에 내려갈까?”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한동안 집을 비웠으니 당분간은 조금 쉬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어. 움직여야 할 때 말해줘.”
향이에게 위험 신호가 와도 요정이 곧장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모든 기업에게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고 작은 고비 때마다 요정을 빼서 다른 곳에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지.
우리가 119 같은 존재도 아니고 최후 순간이 오기 전에 움직이면 된다고 했다.
다행히 아직 그리 시급한 곳은 없었다.
그런 곳이 있었다면 향이가 쉬엄쉬엄 가도 된다고 하진 않았겠지.
[저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게요. 저 녀석들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요.]
향이는 곧장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녀석이 향하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요정들이 뒤엉켜서 뛰어놀고 있었다.
술의 정령으로 올라선 이후에 우리 집은 요정들의 아지트처럼 바뀌었다.
덕월 계곡에 있다던 물의 요정부터.
강원도에 흔하다는 숲의 요정들까지.
심지어 빛의 요정들도 종종 보여서 밤에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물론, 녀석들은 내 눈에만 보였다.
그래서 빛의 요정이 있다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효과를 누리지는 못했다.
이렇게 요정이 모이는 이유는 습성 때문이라고 했다.
정령은 요정들의 어머니와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모라고 해야 하나.
정령의 냄새만 맡아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정도이니 사탕에 개미가 꼬이듯 요정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이 귀찮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기한 구경을 많이 할 수 있기에 꽤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숲의 요정들 덕분에 이 인근에서 자라는 야생 버섯과 더덕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산삼도 캐왔다.
향이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숲의 요정이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나를 썩 좋아하진 않았으나 화해하자는 제스처였다.
그런 반응이 이해되었다.
오저당이 점차 발전해가며 10년 동안 이 근처의 자연환경 일부를 개발했기에 나에 대한 인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코지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개발을 하는 만큼.
환경 보호에도 상당히 애쓰고 있었다.
상류의 수원은 오저당의 젖줄이기에 보호하는데 상당히 큰돈을 들이고 있다.
직원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여름 시즌이 되면 직원들 스스로 계곡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러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다.
“이런··· 커피가 다 떨어졌네.”
언제 다 마신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요즘 향이와 대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기에 차와 커피를 마시는 양도 늘었다.
나와 달리 향이는 술을 마셨는데 매일 낮술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방으로 내려가자 연우는 저녁 식사를 한참 준비 중이었다.
“도와줄까?”
“아니, 거의 다 끝났어. 조금 있다가 영민이 좀 데리고 와.”
“아직 어린이집에 있는 거야?”
“친구들이랑 더 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아! 출장 일정은 잡혔어?”
“당장 갈 일은 없을 것 같아.”
내 이야기를 들은 연우는 뒤를 돌아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쉴 때 영민이랑 같이 좀 놀아줘.”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요즘 동물원을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라. 언제쯤 시간 있어?”
“내일 당장은 약속이 있어서 힘들고 내일모레 식당 쉬는 날이지? 그날 가자.”
“알았어. 그런데 내일은 누구랑 약속이 있는 거야?”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따로 약속을 잡지 않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모처럼 나간다고 하니 궁금했던 것 같았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나도 한두 달 정도는 쉬려고 했는데 가만두질 않네.
“삼척 시장님이 보자고 하셔서.”
*
삼척 시장은 지난해 바뀌었다.
기존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유명석 시장은 3선이 매우 유력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벗어나 중앙으로 진출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이뤄졌다.
그는 삼척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현재 삼척 시장은 당시 부시장이었던 정희겸이 뒤를 이어 시장이 되었다.
정희겸 시장과 만나기로 한 곳은 삼척 시내에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그곳에서 특별한 것을 파는 것은 아니나 조용하게 이야기 나누기는 좋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장님이었다.
아니지··· 이제는 황해수 시의원님이지.
시의원이 되신지 꽤 됐는데 아직도 이장님이란 호칭이 가장 먼저 나왔다.
“나는 왜 자꾸 이런 자리에 불러? 이러니까 다들 내가 시장님네 정당 소속이라 오해하는 거 아니야.”
“제가 불렀나요. 시장님이 불러서 오신 거잖아요.”
“이럴 거면 굳이 어렵게 무소속으로 시의원을 달지 않았을 거야.”
지난 지방 선거 당시에 이장님은 양대 정당 소속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시의원에 당선되셨다. 정당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삼척만을 위해 일하겠다는 의지였다.
시의원이 될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오저당이 오풍리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소통의 아이콘이라고 봐도 된다.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직접 나서서 대부분을 해결해주셨다.
지금껏 오저당과 주민 사이의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정당에 가입하세요. 다음 시장 선거에 나갈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같은 식구라 보는 게 문제다.
사람이 살아가며 여러 가지 일에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일을 하다보면 저절로 내 편과 아닌 이들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놈의 정치계에서는 그렇게 흑백으로 나뉘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 만연하다.
참고로 오저당도 본의 아니게 전현직 시장님들 때문에 낙인이 찍혔다.
그게 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정치적인 견해 같은 것은 뒤로 하고 업무적인 것만 본다면 시장님과 의원님의 당선에 우리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공짜로 주어진 호의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도 받아낸 것이 적지 않다.
오저당까지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사라진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런 거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많이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시의원님이 마음만 먹으신다면 제가 팍팍 밀어드릴게요. 다른 곳도 아니고 삼척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농담은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자.”
아저씨가 먼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님이 벌써 와계셨다.
그는 우릴 보더니 반갑게 맞아주며 자리를 권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요즘 오저당의 일은 황동선 사장이 맡아서 하는 탓에 내가 삼척 시장과 만나 나눌 대화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급이 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자 맡고 있는 일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룹 전체를 살피고 있는 터라 내 시선은 삼척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두고 있었다.
본론에 들어갈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술잔이 두어 차례 이상 돌아간 뒤.
그제야 정희겸 시장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달에 진행될 썸 페스티벌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본론은 거기 있었던 건가.
요즘 썸 페스티벌은 꽤 핫해졌다.
굳이 따져보자면 국내의 여름 축제 중에서 최고라 말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많은 사람이 오기에 매년 축제의 크기도 덩달아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온 김에 축제를 보는 게 아니다.
축제를 보기 위해 삼척에 오는 수준이다.
그 시기가 되면 삼척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올 정도였다.
그들이 한국까지 오는 이유는 한정판을 제외한 OGD 그룹의 술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OGD 그룹에 소속되어 있거나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곳이 꽤 많다.
그곳들을 통해 내놓는 주류는 다양했고 백여 개의 제품이 시중에 팔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모든 주류가 유통되고 있는 나라는 아직 한국이 유일했다.
본부장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다른 대륙에 넣어보려 애쓰고 있으나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더구나 축제에서는 벽향주 화이트 라벨부터 옐로우 라벨까지 3종 세트를 꽤 저렴하게 판다. 각각 따로 사는 것보다 20%는 저렴한 수준의 가격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썸 페스티벌은 오저당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축제니까요.”
“하하!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황동선 사장에게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일부러 황동선 사장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할 거면 내가 아닌 황 사장을 만나야 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썸 페스티벌은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은 아니다.
축제 진행은 황동선 사장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데 나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연히 정희겸 시장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오늘 만나자고 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 때문이죠?”
“예전에 유명석 의원님이 시장 자리에 계셨을 때처럼 저 좀 도와주십쇼.”
유명석이 재선에 성공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오저당이었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당시에 최측근이자 부시장이던 정희겸이 모를 리 없었다.
“구체적으로 뭘 도와달라는 건지 말씀해주시면 이야기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 같은데요.”
“저에게는 치적이 필요합니다.”
시장으로 재임하며 업적을 쌓아야 지역 주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건 지자체를 대표하는 시장의 숙명과 같은 일이다.
모든 시장이 그러하듯 정희겸 시장도 재선에 대한 욕심이 상당히 많았다.
이미 그는 언젠가 유명석 의원처럼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불가능하다고 여길 일은 아니었다.
당장 경쟁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충분히 넘치는 상황이었다.
행복회로를 열심히 굴려 최대치인 3선까지 삼척 시장을 하면 그 꿈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장 그게 뭔지 말하진 않았다.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말하고 있기에 아직 이 사람이 뭘 원하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저씨도 답답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거···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씀하시죠.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뭐 하는 겁니까.”
그제야 정희겸 시장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것을 꺼내놨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잊고 있던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예전에 의원님이 시장 자리에 계셨을 당시에 말씀 나누셨던 전통주 박물관. 이제 슬슬 지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