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언제부터(1) (8/22)

8장. 언제부터(1)

시계를 보던 은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붙이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이 심장을 쿡쿡 쑤셔 아프게 했다. 그 아픔은 후회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을 향해 좋아한다고 말하고 걱정하는 승현에게 너무 모질게 말한 것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게 맞아서 은우는 마음이 줄곧 불편해서 편치 못했다. 밤새 승현에게 자신이 날카롭게 했던 말이 떠올라 스스로를 괴롭혔다.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나도 구구절절 승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속된 말로 뼈 맞는 기분은 아파서, 그에게 소리쳐 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다니며 살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남용하는 약도 줄여야 하는데….

알고 있었지만…….

은우는 동그란 실험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승현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어느덧 자신의 마음도…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홧김에 그에게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한 마음도 피어났다. 자신도, 승현도 자업자득이라 여겼다.

“그래……. 이제 다시 만날 일 없어. 잊어야지.”

이제 승현은 찾아오지 않겠지.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승현에게 더 잘된 일이라 여겼다. 괜히 자신과 엮이면 또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돌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관계없는 승현에게까지 이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은우는 저 스스로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되어 버린 마음은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우는 것처럼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 버리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금 눈앞에 놓인 과제에 집중했다. 복잡한 화학식을 훑어보며 다양한 색을 내는 화학 약품이 해골 마크가 붙어 있는 취급 주의 표시와 함께 놓여 있었다.

책을 넘겨 살펴보는 은우는 그만 멈칫했다. 하필, 발견한 것은 승현이 낙서해 놓은 그림이었다.

도식화해 놓은 탄소 모양의 동그란 원에 가느다란 팔다리가 붙어 있는 사람 모양의 낙서였다. 화살표로 끄적거린 승현의 필체가 어지럽게 쓰여 있었다.

이건 형, 이건 나. 이건 팔다리,

붙어 있어서 우리 뽀뽀하고 있는 거

그려 넣어 봤어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은우는 낙서해 놓은 그림과 필체를 쓰다듬었다. 흐릿한 미소로 우리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추억이라 불릴 법한 일들이 쌓였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하루에 십 분씩 만난다는 건 엄청나게 큰일이었다. 그를 그리워하며 미소가 번졌다.

“이 책은… 나중에도 못 버리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은우는 책장을 넘겼다.

보고서에 쓸 수치를 확인하고 작성하며 실험을 계속했다. 눈동자는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필기하는 손은 쉬지 않았다. 억지로 승현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은우가 실험에 집중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실험 강의 시간이 끝났다.

짐을 정리하던 은우는 이제 강의실 너머에는 승현이 없다고 생각하자 다시 울적해졌다. 그가 없는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왔는데, 그건 상당히 지루하고 심심하고 또… 밋밋했다.

“…익숙해져야지. 이제 다시….”

은우는 저 자신을 위로했다. 원래 승현이 없던 삶을 떠올리며 그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그가 있어서 조금이나마 재미있던 기억은 모두 추억으로 남겨야 했다. 그게 지금 은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은우가 실험실을 나왔을 때, 문 앞의 커다란 그림자가 앞을 막아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은우 형!”

은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제 완벽히 익숙해져 버린 목소리였다. 해맑은 승현의 목소리가 웃는 파동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은우는 심장 부근이 저릿하며 뜨거운 것이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르르 소금이 물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은우는 감정이 녹아 풀어졌다.

몸이 흔들려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흔들려 몸이 흔들리는 건지 황급하게 손에 든 전공 책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소리를 냈다.

“너 뭐야…!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마음과 같지 않게 또다시 어긋나게 화내는 목소리가 나가 버렸다. 이게 아니었는데….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은우는 몰랐다. 승현을 향해 다시 가시를 돋아냈다. 하지만 승현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상처 따위 받지 않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은우에게 말했다.

“에이, 이제 형이 ‘십 분 동안 만나는 거 없다’고 했죠. 그건 아홉 시 정식 경기 때잖아요. 지금은 번외 경기.”

“…무슨 소리야.”

조금은 누그러진 은우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살 웃는 승현은 이제 거침없이 자신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진한 남자의 얼굴로 다가온 승현 때문에 놀라서 은우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예전 같으면 손에 쥔 방패이자 무기인 전공 책을 위협적으로 들고 소리쳤을 텐데, 은우는 묘하게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근데 형, 지금 이런 말… 하기 좀 뭐하지만, 하얀 가운 입는 거 엄청 섹시한 거 알아요? 그거 알고 입는 거예요?”

“무, 뭐라고?”

“저번부터 느꼈지만, 형을 두고 백의의 천사라고 하나 봐요. 나중에 진짜 꼭 우리 의사 놀이 해요. 진짜 형 이거 입고 의사 놀이 하면 …이 서겠다.”

은우는 중간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 것인지 묵음 처리된 것을 알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게 있어요. 나만의 비밀.”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려 주지 않는 승현은 팔짱을 끼며 매력적인 조소를 지었다. 확실한 건, 어제의 승현과 눈앞의 승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형 앞에서 순진한 척 그만할까 해서요. 아…. 그동안 안 어울리는 짓 하려니까 체질에 안 맞아. 골병들 거 같아서. 본래 성격대로 하려고요.”

승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팔짱을 끼웠다.

“…….”

은우는 획 고개와 몸을 돌려 그를 피했다. 곁눈질로 승현을 훑는데 확실히 오늘의 승현의 분위기는 새까맸다. 검은 가죽 재킷에, 검은 티셔츠, 검은 바지…. 모든 것이 다 까맣게 보였다.

애교 넘치는 레트리버 같은 승현이 하루 만에 섹시한 도베르만이 되어 나타났다.

“미, 미친놈…….”

은우가 그를 향해 작게 욕을 하며 스쳐 지나가는데 승현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살살 웃으며 따라왔다.

“형, 욕하는 거 존나 꼴리는데. 좀만 더 해주면 안 돼요? 되게 상스럽게….”

“…….”

확실히 미친놈이 되어 나타난 승현을 향해 고개를 돌려 욕이든 뭐든 퍼부으려고 노려봤는데, 씩 웃는 잘생긴 얼굴은 그 욕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진하게 승현의 볼에 보조개가 피어났다.

“은우 형…. 어제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다시 십 분씩 만나주면 안 돼요? 그럼 다시 착해져 볼게.”

“어, 안 돼.”

승현을 뒤로 앞을 걷는 은우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싫지 않은 듯 묘한 미소가 꼼지락거렸다.

“그럼 오 분씩이라도! 나 어제 형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죽을 거 같았단 말이에요. 진짜 위험한 생각까지 했다니까?”

“…….”

허락도 거절도 없이 빠르게 걷는 은우의 팔을 승현은 뒤에서 낚아채 잡았다. 은우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싫었다면… 예전처럼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치며 잡은 손을 뿌리쳤을 텐데……. 은우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형… 응? 네? 정말 안 돼요?”

덩치 큰 사내놈이 조르자 은우는 웃음이 피어나는 얼굴을 감출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여 가리며 조용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제 같은 짓 또 하면 그땐….”

“안 해, 안 해! 절대, 네버. 앗싸!”

포효하는 승리자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승현은 외쳤다. 결국 하루도 채 못 가서 은우는 승현을 허락했다.

“그럼 형, 아홉 시에 만나요. 예쁘게 차려입고!”

승현은 그러더니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어……?”

멍하게 은우는 멀어지는 승현을 멀뚱하게 보았다. 이제 다시 레트리버 같은 댕댕이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밥은? 커피는? 손잡고 걷기는?

매번 학교에 오면 하자고 졸라 댔던 것을 하자도 조르지 않았다. 움칫 손을 뻗어 뒤를 돌아 가 버리는 승현에게 뻗을 뻔했다. 지금 고작 저 말 하려고… 여기서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었다.

쿵쿵. 승현의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건물을 울렸다. 그 진동이 은우를 관통했다. 발이 진동해서 심장이 뛰는 건지 심장이 뛰어서 발이 진동하는 건지.

<2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