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8장. 언제부터(2) (9/22)

선량한 야만인(Salvaje) 2권 (19세 미만 구독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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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8장. 언제부터(2)

9장. D-DAY

10장. 본색

11장. EDPS(음담패설)

12장. 처음

13장. 보스전

14장. 이상한 정략결혼

15장. 데이트?(1)

8장. 언제부터(2)

다시 시작된 십 분의 데이트는 은우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옷 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승현과 만나면서 새삼 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얼마 전에 왕창 사다 놓은 옷이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빼곡하게 옷장을 채웠다. 백화점을 탈탈 턴 보람을 느끼며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꺼냈다.

문득 승현과 아주 짧은 데이트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이 몰려와 주절주절했다.

“아니…. 내, 내가… 옷이 없어서 그런 거지…. 예, 예쁘게 입으라고 해서 입는 거 아니다.”

옷을 갈아입으며 은우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괜히 어딘가 찔려서 은우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은우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조금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

앞으로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은우는 벌써부터 초조해지고 무슨 말을 나눌지 생각하다 긴장되어 손바닥을 허벅다리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발걸음이 움찔하다 말고 또 움찔하다 말았다.

이제 한 삼십 분은 지나지 않았을까 싶어서 시계를 보았다. 그러나 아직 십 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은 절망적이었다.

“시간 되게 안 가네.”

혼잣말을 주절 내뱉은 은우는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책이라도 보려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까만 건 글자요, 하얀 건 종이였다. 우스갯소리로 하던 저 말이 어떤 건지 십분 이해되었다.

집중하며 글자를 읽었다. 하지만 활자를 읽을 뿐, 머릿속에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은우는 책을 덮어 시계를 보았다.

한… 사십 분은 흐른 줄 알았더니, 고작 오 분이 더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 씨….”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약속된 시간까지 많이 남았지만 은우는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탑돌이를 하듯 마당에 놓인 분수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곰곰이 승현이 그동안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찍 승현과 만나려고 대문을 나갔다가 승현이 자신에게 나중에 꼭 한번 써 달라고 부탁한 말이 있었다.

간지러운 미소가 피어나 은우는 탑돌이를 멈추고 대문으로 걸어갔다. 약속된 시간보다 아직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은우는 멈추지 않았다. 덜컥, 커다란 대문을 열고 나갔다.

“어? 형! 대박!”

승현은 차에서 내리다가 대문으로 나오는 은우를 보며 보이지 않는 꼬리를 이리저리 난잡하게 흔들며 달려갔다.

“나도 막 도착했는데, 우린 역시 운명인가 봐요!”

“아, 아니야……!”

은우는 창피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더듬거렸다.

“그, 그냥… 변덕 같은 거야. 응, 변덕…!”

“흐음…….”

눈을 가늘게 뜨며 승현은 콧소리를 냈다.

“그럼 설마, 보고 싶어서요?”

올곧은 승현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은우는 헛기침만 흠흠 하며 말했다.

“…무, 뭐…. 그, 그런 거라…고 해…. 거, 거짓말 같은 거.”

“에이, 뒷말은 생략하고 앞에 말만 해줘도 좋았는데.”

승현은 내심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도리어 은우가 부끄러워져서 큰소리를 냈다.

“나, 나중에, 써먹어 달라며!”

“그게 오늘이라니, 기분 째지게 좋네요. 오늘은 일찍 만났으니까….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

승현은 몸을 돌려 후다닥 차에 가서 큰 몸을 반쯤 구겨 넣었다가 빠져나오며 양손에 든 걸 흔들어 보였다.

“나는 허락된 시간이 십 분밖에 없어서 술은 못 마시니까. 이거 마셔요.”

빈정거리는 승현의 말투에 은우가 눈을 흘겼다.

“뭐야… 시위하는 거야?”

승현은 대꾸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이것도 기억해 놨다가 써먹어 줘요. 나랑 술도 마시기…. 밤에 커피 마시기 부담스러울 거 같았는데,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커피로 사 왔어요. 에스프레소 더블 샷 들어간.”

“응, 고…마워.”

“형, 밥 먹었어요?”

“어? 뭐…….”

“나는 안 보고 싶었고요?”

씩 웃는 승현은 아직도 익살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었다.

처음 승현과 엮이면서 그의 손에 강제로 끌려 커피를 마셨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듯했다. 설핏 웃음이 나서 은우가 승현이 내민 커피를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약 기운을 이기려고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은우는 빨대를 쪼옥 한 모금 빨았다. 쓰디쓴 커피가 오늘따라 달았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형, 물어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해도 물어볼 거니까, 뭔데?”

“원래도 형 이렇게 말랐어요? 유전인가?”

“그건 아닌데…….”

은우는 그냥 눈을 회피하며 은은한 불빛을 내는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근데 이렇게 일찍 만나니까 좋네요.”

“…….”

“은우 형, 잠깐 같이 걸어도 되죠?”

“……응.”

고개를 끄덕인 채 적당한 거리를 띄운 채 걸었다. 분명 은우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걸었다. 자신이 그에게 가까워진 건지, 승현이 저에게 가까워진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형, 은우 형.”

“왜 또 뭔데?”

“형은 옛날 때 꿈이 뭐였어요?”

“나?”

은우가 사실대로 말할지 말지 고민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쪼옥 커피를 한 모금 빨아 마시다 대답했다.

“난 신약 개발.”

“와, 씨. 개멋있다.”

“푸훕.”

승현의 반응에 은우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하얀 가운 입고 막 그러는 거잖아요? 형한테 딱 어울리는 거 같아! 너무 좋은데? 내가 응원할게요!”

“어? …응, 고마워. 그러는… 너는? 너는 꿈이 뭔데?”

“난 비행기 조종사?”

“뭐? 거짓말치지 마.”

“진짜인데.”

은우는 눈을 갸름하게 뜨며 승현을 쳐다봤다. 승현은 억울하다는 외려 억울해했다.

“비행기 조종사를 하려면 과를 선택 잘못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요, 망했어요.”

“푸훕-”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승현이 귀여워 푸훕 소리를 내 웃었다.

부자 동네는 구조부터가 다르다. 소규모로 조성된 공원이 중간중간 아담하게 꾸며져 있어 공동 소유 정원 같았다. 그래서 이 동네 구성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공원을 정원처럼 꾸몄다. 정원 같은 공원은 각기 특색을 갖추어 꾸며져 있었다. 이쪽 공원은 화단과 화려한 꽃으로 꾸몄다면, 다른 쪽 공원은 오솔길을 둘러싼 높다란 정원수로 꾸며져 있는 곳도 있었다.

노란 가로등이 길을 밝혀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원이었다. 이 공원은 정원수가 멋지다고 했는데 은우와 승현은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걷다가 중간에 놓인 공원의 벤치를 발견하고 승현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좀 앉아요.”

“응.”

은우는 승현이 앉은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아직 자신은 그의 옆에 바짝 앉을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걸어오는 오는 내내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거의 대부분 승현이 떠들었다. 중학생 시절 승현이 한번은 시험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친구들과 작당하고 커닝했었다는 모험담을 이야기했다. 은우가 어깨를 잘게 떨며 웃기 바빴다.

“아니, 형. 웃지만 말고요.”

“그렇지만 너무 웃기잖아.”

“나만 이런 경험 있나? 칫! 형도 있지 않아요?”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웃던 은우가 슥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나? 누가 그런 거 해.”

“뭐야, 이거 봐…. 또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들어. 참 나-”

“근데 왜 커닝한 거야?”

빨대를 입에 물며 쪽쪽 빨며 물었다.

“그때 너무 억울했다니까요! 잘 들어 봐요.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성적이 이러니 용돈을 끊겠다고….”

“근데 안 걸렸어?”

승현은 그때를 회상하며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 아뇨. 딱 걸렸죠. 진짜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설펐어요. 지금 하면 안 걸릴 수 있었는데.”

은우는 다시 참지 못하고 쿡쿡 웃었다.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너무 웃겨서 저도 모르게 은우가 가볍게 승현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형, 그렇게 웃겨요?”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승현은 다시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아, 이건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인데요.”

“또 뭐 있어?”

“집에서 쫓겨날 뻔한 이야기 해줄게요. 아무도 집에 문을 안 열어 줘서 그때만 생각하면 당황스러워요.”

“그런 일도 있어?”

눈을 반짝거리던 은우가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점점 승현과 있는 게 재미있고 스릴도 있으며 편안해졌다.

“아, 너무 웃겨서 재미있다.”

은우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승현과 너무 가까이 앉은 것 같아서 슬쩍 엉덩이를 밀어 벤치 끝으로 갔다.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은우는 여러 가지로 계산하고 생각해서 조심스러웠다. 승현이 오해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사람들이 입방아 찧는 ‘알파 잡아먹는’ 그런 오해를 승현이 할까 봐. 차가운 얼음이 들어 있는 일회용 컵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곁눈질로 승현을 살폈다.

연신 승현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건지, 확인하려는 건지 이상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를 살피며 물었다.

“뭘 그렇게 찾아?”

“쉿-”

승현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행동으로 보여 은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형… 그거 알아요?”

“뭐?”

눈을 반짝거리는 승현은 상당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있잖아요, 형.”

몸을 앞으로 살짝 숙여 은우에게 가까이 다가간 승현은 은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왜, 뭔데”

“그게…….”

은우가 그의 손짓에 따라 몸을 살짝 그에게 가까이 기울였다. 조금은 두근거렸다. 승현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은우는 조금씩 승현에게 가까워졌다. 얼마 만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은우는 스릴을 느꼈다. 친구들과 비밀이야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너무 어릴 적이라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비밀이야기라는 묘한 분위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이거 친구들이 해준 이야기인데요.”

“응, 뭔데?”

승현의 울림통이 낮게 진동하며 동굴 소리가 귀에 가까이 들렸다. 은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이곳에 관련된 전설 이야기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좋아했다.

“이 공원에서 가끔… 어떤 그런 게 나온다고 하는데….”

“…응? 뭐가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우가 되물었다.

“아, 몰라요?”

“그게 뭔데?”

은우는 엄청 상큼한 어투로 입술을 모아 커피를 쪽쪽 빨면서 승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신이요.”

“콜록, 콜록…!”

커피를 마시던 은우는 사레가 걸려 얼굴이 빨갛게 되어 연신 콜록거렸다.

“은우 형, 괜찮아요?”

잔기침을 하는 은우의 등을 두들겨 줄 심산으로 승현은 팔을 뻗었지만, 은우가 그를 노려보았다. 괜히 기대한 자신이 손해 본 생각이 들었다.

“너… 그래서 지금 일부러 귀신 보자고 이 공원까지 오자고 한 거야?”

“보고 싶지 않아요? 글쎄, 처녀 귀신이라잖아요. 정말 소복 입고 있는지 궁금하잖아요.”

혈기 왕성한 눈으로 승현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음흉한 미소로 기웃거렸다.

“나 가, 갈래….”

“형, 아직 시간 안 됐어요…. 근데 귀신은 찾으면 안 보인다더니, 아쉽네.”

“…야, 그만해….”

“무서워요?”

은우가 등이 허전해 경계하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꼭 뭔가 서늘한 기운이 등에 닿는 거 같았다.

슬그머니 은우는 승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창피하고 민망한 은우는 고개를 숙여 커피만 쪽쪽 빨며 마셨다. 바람이 살랑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며 인기척이 나는 듯해서 괜히 움찔거려 신경이 쓰였다.

귀, 귀신인가?

흠칫, 놀라며 은우가 벤치 등받이에 등을 바짝 붙였다. 슬금슬금 승현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승현이 힐끗거리며 은우가 귀여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형… 진짜 귀신 무서운 거 아니죠?”

“…어? 아니야. 안 무서…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은우의 눈동자가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은우는 가만히 승현과 같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래서 무서우니 가자는 소리도 못 했다.

승현은 벤치의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채 은우를 지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쳐다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적막이 흐르는데 승현의 시선이 민망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요…. 너무 예뻐서요.”

“죽을래?”

푸후- 승현은 반사적인 자신의 반응에 웃었다.

“오늘 이렇게 보고 나면 내일 아홉 시까지 꼬박 기다려야 하잖아요. 앞으로 24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다니까요.”

이유답지 않은 이유였지만 그것이 승현의 이유다워 은우는 무의식에 가깝게 그에게 말했다.

“… 내일 또 학교 올 거 아니야? 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가 은우는 순간적으로 말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흡! 숨을 들이켜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꼭 빨개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승현은 씩, 웃으며 못된 아이처럼 말했다.

“그럼 학교에서 허락한 거예요!”

“아… 아니…. 지금 말… 취소! 그게 아니고….”

“아, 몰라요! 이제 안 들을래.”

승현은 말과 동시에 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결국 말실수한 건 자신이기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은우는 한숨을 푹 내쉬다 결연한 눈빛으로 손바닥을 승현에게 내밀었다. 승현은 의아하게 양손을 귀에서 떼어내더니 자신을 응시했다.

“그럼… 너, 핸…드폰 줘 봐.”

“왜요?”

의심 없이 승현은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주머니 속 딱딱한 존재를 확인하더니 꺼내서 작은 은우의 손에 올려 주었다. 은우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신중한 얼굴과 입술로 터치패드를 꾹꾹 눌렀다. 꼭 고양이가 꾹꾹이를 하는 것처럼 열한 번의 꾹꾹이가 끝나자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내, 번호야. 오늘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지… 말라고.”

승현의 반짝거리는 눈이 기쁨에 일렁거리며 건네진 핸드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실, 은우 핸드폰 번호는 외우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지금 했다.

“와… 오늘 무슨 로또냐. 형, 나 정했어요.”

“어? 뭐를?

“오늘 내 생일로 바꿔야겠어요. 기념일 설정해 놔야지. 매년 오늘을 기념해야겠어요.”

그저 숫자 열한 자리에 저렇게 좋아할 줄은 은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건네줄 건데 하는 생각을 하자 저 스스로에게 놀라 생각을 지웠다.

“맨날 전화하고 문자 보내도 돼요?”

“야! 안 돼…! 그러라고… 주, 준 거 아니야! 지, 진짜로 중요한… 일에만….”

“음…. 중요한 일…….”

아주 짧게 고민하더니 승현은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며 말했다.

“그 중요한 일…이라면,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사랑한다, 같이 있고 싶다, 이런 거요?”

“미… 미친 거야? 아니잖아! 안 되겠어…. 다시 핸드폰 이리 줘.”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하고 큰일인데!”

“진짜……!”

겨우 용기 내서 건네준 번호였는데 은우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의 손에 든 핸드폰을 낚아채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줬으면 장땡이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승현은 은우의 손을 따돌리려고 뒤로 몸을 뺐다. 은우가 조금 더 승현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는데, 더욱이 승현은 뒤로 몸을 젖히며 물러나 버렸다. 은우보다 승현의 키가 크다 보니 승현이 은우를 피해 팔을 뒤로 젖혀 버리면 닿을 길이 없어서 은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승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 진짜… 이리 줘…!”

벤치에 등을 바짝 기댄 승현은 팔과 몸을 뒤로 쭉 뺐고, 은우는 몸을 앞으로 숙여 승현의 팔을 잡았다. 그러다 기어이 은우는 무릎을 굽혀 벤치 위로 꿇어 올라갔는데, 은우는 승현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승현의 손에 잡힌 핸드폰을 빼앗는 데 열중했다.

본의 아니게 승현의 무릎 위에 걸터앉은 듯한 자세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은우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더니 다급하게 저장한 자신의 번호를 삭제했다.

“…휴, 됐다.”

청량하고 맑은 은우는 개운한 목소리를 했다.

“형…….”

“…아……!”

그리고 은우는 승현의 얼굴에 자신의 배가 밀착한 걸 깨닫고 나자 당황한 소리를 냈다.

“아, 저기… 그게…. 미, 미안….”

다급하게 은우는 승현의 무릎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승현이 자신의 몸을 확 끌어안았다.

“……야!”

“내가 한 거 아니에요. 형이 한 거지.”

“미, 미안하다니까….”

은우의 배에 승현은 조금 더 밀착해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하면 잠깐 움직이지 말고 이렇게 있어요. 후우…….”

우물쭈물하며 은우가 승현의 커다란 숨소리에 움찔했다. 곤란한 손을 허공에서 어쩔 줄 몰라 허우적거리다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올렸다.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내리깔았더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승현의 머리 위 정수리가 보였다. 삼 초 정도 고민하며 은우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까? 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승현을 끌어안은 것 같은 모양새였기에.

희미하게 저 멀리 도로에서 차가 쌩쌩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승현에게서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은우는 승현을 밀어내지 않았고, 그는 고개를 파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대처법을 모르는 은우는 눈을 깜빡거리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승현에게 물었다.

“…너, 자는 거야?”

“푸하- 뭐라구요?”

승현은 고개를 들어 은우를 올려다봤다. 은우의 빨갛게 상기된 볼이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형을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데 잠이 어떻게 와요? 심장이 터질 거 같은데.”

“아, 아니…. 미, 미동도 없으니…까, 주, 죽은 줄 알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머리가 생각나는 대로 은우는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승현은 잠시 눈빛에서 ‘알파’의 욕정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은우를 손에서 놓아주었다.

“자, 십 분 끝.”

“어? 어…….”

은우는 슬쩍 어딘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얼음이 전부 녹아 버린 커피를 집어 들고 헛기침을 했다.

“형, 데려다줄게요. 손은 잡아도 되죠?”

“혼자… 갈 수 있어. 그리고 손은… 안 돼.”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러자 아쉬워진 건 은우였다. 아주 잠시 은우는 손을 뻗어 승현의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괜히 선심 쓰듯이 말했다.

“좋…아. 오늘만… 봐준다.”

승현은 씩 웃으며 날렵하게, 꼭 맹금류가 사냥을 하는 듯이 은우의 손을 낚아채며 잡았다. 은우는 손을 꼭 잡는 것도 아니고 안 잡는 것도 아닌 것처럼 어정쩡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큰 승현의 손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형은 손도 되게 부드럽고 좋다.”

“손이 다 똑같지. 무슨….”

“내 손에 다 잡히는 것도 너무 좋아, 이렇게 조물조물 만지는 감촉도 좋아요.”

호기심으로 자신의 손을 탐험하듯 승현이 손가락 하나하나 더듬거렸고, 손톱을 어루만지더니 손끝까지 쓰다듬었다.

“손만 잡는다며.”

“지금 손만 잡고 있잖아요.”

조물딱조물딱.

“이게 어딜 봐서….”

“난 원래 손 이렇게 잡아요.”

“또 거짓말.”

히죽 웃는 승현은 은우의 손을 꽉 잡았다. 은우는 손을 빼지 않기에 조금 놀려 줄 생각으로 승현이 말했다.

“싫은 척 다 해놓고… 그러면서 손은 안 빼네?”

“…진짜 이거 놔.”

웃는 승현의 말에 은우가 도끼눈을 하더니 손을 빼려고 했다. 승현은 손을 더욱더 꽉 잡으며 능글맞게 웃었다.

“저기 집 앞 다 왔으니까요. 조금만 더 잡고 가요.”

“…너, 아저씨 같아.”

배 속의 능구렁이가 어느새 번식을 한 것 같았다. 또 그것이 싫지 않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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