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D-DAY (10/22)

9장. D-DAY

십 분 동안 만나기 외에 학교에서 만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졸업반의 1학기 기말고사였다. 은우는 평소 공부한 대로 어렵지 않게 시험을 치르고 나왔다.

“은우 형!”

댕댕이 같은 얼굴로 승현이 은우를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말이다. 은우가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승현에게 다가갔다.

“어? 승현아, 넌 시험 안 봐?”

눈길을 피한 승현은 화제를 돌렸다.

“형, 시험 잘 봤어요? 맨날 나랑 안 놀아 주고 공부만 하더니…. 잘 봤겠죠?”

“음, 뭐… 어렵지 않았어.”

“헐,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는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형, 티브이에 나와야 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막 장학퀴즈 나와서 문제 맞히고?”

시험을 치르면서 졸렸던 은우의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승현의 농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근데 너 뭐 들고 온 거야?”

은우는 승현의 손에 들린 게 궁금했다.

“형 공부하니까, 방해 안 하려고 도시락 싸 왔죠. 오늘 오후에 또 시험 있다면서요.”

“응, 이따가 네 시간 뒤에 시험 있는데. 뭐? 도시락?”

“또 약만 먹고, 밥도 안 챙겨 먹고 도서관 가서 공부할까 봐, 걱정돼서. 자요.”

승현은 은우의 손에 도시락 가방을 들려주었다. 은우가 어떤 표정으로 승현을 바라봐야 하는지 모르는 듯 오묘한 얼굴을 했다.

“네가 직접… 싼, 건 아니지?”

“이거 다-! 내가 직접 만든다 하는 마음으로 일하시는 아주머니한테 부탁했죠. 메뉴 선정도 내가 다 했는데, 아주머니한테 퇴짜 맞았지만요.”

은우가 풉-! 웃음이 났다.

“뭘 싸려고 했는데?”

“영양 만점 랍스터요.”

“뭐?”

“머리에 좋은 키토산이 많다기에 그래도 커피는 내가 탔어요.”

은우가 은색의 보온병이 보여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니 이런 도시락은… 수능 때 이후 처음이었다.

“설마… 커피에 이상한 거 탄 거 아니지?”

“에이, 형을 향한 내 사랑과 애정을 가득 담았죠. 그 애정이 너무 진해서 못 마실지도 몰라요.”

“자신 있어 하는 거 보면, 엄청 수상한데.”

“아니라니까요.”

승현은 바람에 나부끼는 은우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안도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은우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시험공부 방해 안 할 테니까.”

“어? 가…려고?”

“난 형의 꿈을 응원하니까!”

승현이 가 버리려고 하는 듯했다. 도시락만 건네주고 말이다. 은우가 조금 다급하게 목소리를 올렸다.

“승현아, 너… 넌 점심 먹었어?”

“형, 같이 먹어 주려고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승현을 보며 은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아니…. 뭐,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 준다면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하죠!”

“이거 같이 먹고 가.”

✻  ✻  ✻

순하고 선량한 얼굴을 한 승현과 은우는 어영부영 매일 마주치고 매일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승현은 자신의 학교 건물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점점… 승현에게 빠져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내리게 된 결론은 자신도 승현이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거세지자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는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렇게 변해 버린 자신을 다그쳐 봐도 승현에게 빠져 버린 마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맹렬하게 타고 있었다.

은우의 가뿐하고 들뜬 발걸음이 한달음에 달려 승현에게 다가갔다. 하늘거리는 얇은 머리카락이 폴짝 뛸 때마다 너풀너풀 휘날렸다.

“은우 형! 시험 끝났죠?!”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너는 어째서… 내 시험 날짜까지 다 알아?”

처음 승현을 대했을 때와는 180도 다른 얼굴과 태도를 보였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승현에게 은우는 자각도 없는 듯 자연스럽게 한 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야, 형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죠. 에헴! 그래서 형, 시험은 잘 봤어요? 맨날 공부한다고 나한테 화내더니. 도시락 싸다 바친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은우가 멋쩍은 웃음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되물었다.

“너는? 나는 뭐… 시험 어렵지 않았어.”

이번엔 승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뭐… 흠흠. 시험이 어렵지가 않다니…. 그 무슨 실례되는 소리예요?”

은우가 쿡쿡 웃었다. 그러다 승현이 학기 내내 자신의 뒤만 쫓아다닌 터라 학교도 제대로 안 나갔을 거라 생각해서 엄격하게 눈썹을 세우며 한마디 했다.

“학교는 제대로 다녀야지. 공부 안 하면 이제 안 만나 줄 거야.”

“푸하하…!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학교 개빡세게 다녀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여전히 승현은 사심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자, 이제 은우도 덩달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승현에게는 늘 화내고 긴장된 얼굴만 보이던 은우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 주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승현과 나란히 캠퍼스를 걸었다. 대놓고 손을 잡는다고 하면 은우는 안 된다고 하니, 승현은 슬쩍 아닌 척하면서 은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은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게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일단, 그건 그렇고. 은우 형.”

은우는 나란히 손을 잡고 걷다가 발걸음 속도를 늦추며 승현을 돌아봤다.

“왜?”

여름의 초입, 여름이 이제 막 시작하는 뜨거운 6월의 끝 무렵이었다.

“시험도 끝났고, 여름이고… 그러니까…. 형, 나 부탁 하나 해도 돼요?”

휘이잉- 여름답지 않은 서늘한 바람이 은우의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을 따라 춤을 췄다.

승현의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 은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을 은우는 이제 가만히 받았다.

“무슨 부탁?”

은우는 왠지 심장이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함과 공존하는 설렘, 아니 스릴 같은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음… 오늘은 나한테 시간 좀 내줘요.”

“……시…간?”

승현은 은우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굴렸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 선한 보조개를 만들어 말했다.

“사실 형한테 그동안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자랑? 뭐를? 나한테?”

“사심으로는… 데이트가 하고 싶어서요.”

싫다고 하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긍정적인 억양으로 말해서 승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은우의 영역 안으로 가까이 들어갔다. 이제 은우는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게, 저 하와이에 잠깐 놀 겸 한 육 개월 정도 살았거든요. 그때 거기서 요트 운전을 배웠었단 말이죠…. 그래서, 한 한 달 전쯤인가? 요트를 샀어요. 그리고 그게 드디어 며칠 전에 항구에 도착했거든요. 그게 도착했는데 형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 일빠로 형한테 자랑해야지! 라고. 막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지 뭐예요.”

한 달 전쯤. 은우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 주쯤 자신에게서 모습을 감추었을 때라고 생각되었다.

“…그거 자랑하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승현은 누가 봐도 순진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형은 시험이라고 상대도 안 해주지…. 형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몸은 근질근질거리지! 그리고 형이 진수식 해주면 좋겠다, 싶었죠.”

은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승현이 보기에도 은우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마지막 자신의 도박이었다. 승현은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뭐? 진수식?”

은우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귀가가 늦어 화를 낼 아버지의 불같은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안 될 거 같다고 말하려고 승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 승현의 눈빛에서 이게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읽었다. 은우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만약 이번에 승현을 밀어내면… 이제 그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말하는 바가 은우는 너무 쉽게 읽혔다. 승현은 지금 이제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은우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하긴, 생각해 봐도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가… 승현으로서는 지칠 법도 할 것이다.

승현 자신이 내미는 마지막 기회라고, 그가 내민 손을 이대로 내가 쳐내면, 이제 그와 다시는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생겨도 그걸로 끝이겠지. 의외로… 승현은 냉철한 면이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척하면서 선을 넘지 않는 모습들이 그려졌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은우는 고민했다.

마지막.

처음에는 승현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그 생각을 안 하게 되었을까. 의외로 처음부터일지도 몰랐다. 순수한 얼굴을 하고 배고프다고 같이 밥 먹어 달라고 조르던 모습에서부터.

언제부터 승현이 곁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승현이 아주 잠깐 제 앞에서 사라졌을 때 느꼈던 불안함을 기억했다.

대체 언제부터… 승현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은우의 손이 움찔했다. 승현이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은우는 쉽게 그 손을 덥석 잡지 못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눈에 또 이 상황이 어떻게 비칠지 은우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을 또 많은 사람들에게 들켜 버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한 흉을 볼지 몰랐다. 그들의 수군거리며 비아냥대는 말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도 승현아……. 좋아해.

이 말을 하기가 두려워 말하지 못했다.

은우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먹는 것, 만지는 것, 보는 것, 모든 것을 다 생각해야 하고 신중해야 했다.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퍼질지 몰랐다. 자신이 승현을 꼬셨다는 소문이 날지도, 그와 문란한 생활을 한다고 할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왜소한 은우의 어깨가 움츠러들어 작아졌다.

“…형, 싫어요?”

승현의 커다란 손이 움찔하며 느릿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 어쩔 수 없네, 그럼 하는 수 없죠.”

승현은 동그란 은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은우가 힘들어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은 은우가 용기를 내서 단단한 껍질에서 나와야 한다고 승현은 생각했다.

“…그게…….”

은우는 손에 쥔 전공 책을 더욱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되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승현의 커다란 손이 안타까웠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고 싶었다. 그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창피하게 승현을 상대로 야한 꿈을 꾸고 자위하던 일이 지금 갑자기 생각났다. 당연히 창피한 일이라 그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은우는 꿈을 꾸면서까지도 그 몰래 그를 원했던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더 망설이고 있었다.

아주 조금만, 손을 뻗기만 하면 되는데.

사소한 용기를 내면 되는데, 은우는 그 용기가 없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승현이라면…. 승현이와…. 그와 함께.

괜찮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은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긴장된 눈과 흔들리는 눈동자로 승현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은우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어졌다.

그 ‘무슨 일’에는 은우가 느꼈던 끔찍한 종류의 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제 괜찮다고 생각했다. 승현이라면 괜찮았다.

은우가 천천히 손을 뻗어 승현의 손을 잡았다. 처음 은우가 스스로 움직여 승현의 손을 잡은 날이었다.

“그래, 알았어….”

승현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아몬드 모양의 보기 좋은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원하는 거 해줄게.”

은우에게는 상당히 오래 걸렸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지만, 은우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은우는 승현에게 말했다. 승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다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님한테 말하고 올 테니까.”

“알았어요.”

은우는 빠른 발걸음으로 총총 뛰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이대로 가셔도… 괜찮아요.”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경호 겸 운전기사를 발견해 그를 올려다보며 긴장되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다소 흥분으로 떨리는 것은 저만 느낄 수 있었고, 저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은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 승현을 힐끔 보며 다시 눈앞의 경호원에게 향했다. 경호원은 상당히 승현을 못 미더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차분하던 은우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리면서 흥분된 음성이 가라앉지 않은 채 미약하게 묻어 나왔다.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경호원과 달리 은우는 조금 설레는 기분도 느꼈다.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은우가 괜찮다고 하는데 경호원이 안 된다고, 그럴 수 없다고 할 힘이 없었다. 그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보고는… 회장님께 할까요?”

그가 나직하게 묻자 은우는 움칫 한 번 떨다가 굳어지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요. 아버지 말구요. 차라리… 형에게, 정윤 형에게…요. 시험 끝나서 친구랑 놀다 들어간다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무덤덤하게 대답을 한 경호원은 차를 몰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은우는 멍하게 잠시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다가 몸을 돌려서 승현에게 다가갔다. 가벼운 발걸음이 통통 튀며 뛰어오르자 맞춰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춤을 췄다.

시험만 보고 끝난 이른 오후는 쾌청했다.

“뭐야…. 왜 이렇게 웃고 있어?”

퉁명스럽게 은우는 싱글벙글하는 승현에게 향했다.

“저기서부터 걸어오는 형이 천사 같아서요,”

“…정말… 그런 헛소리 하는 거 좀 고치면 안 돼?”

“누가 헛소리해요?”

“너 말이야. 너.”

“난 늘 진심만 말해요.”

“아닌 거 같아.”

승현은 웃음을 보이며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꼭 아무것도 못 하는 아기 취급당하는 기분이 들어 은우는 얼굴을 붉혔다.

“나도 문 여닫을 수 있는 손 있거든.”

“알죠. 그냥 형한테는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요.”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은우는 가방과 무거운 책을 무릎 위에 올려 떨어지지 않게 안고 있었다.

차 안은 미약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이 시원해서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승현의 차에 올라탄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벌써 두 번이나 남의 차를 얻어탄다는 것이 이상해서 웃음이 짓고 있는데 운전석으로 몸을 밀어 넣는 승현이 말을 걸어왔다.

“형, 안 불편해요?”

“응?”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승현은 은우가 짐들을 끌어안고 있는 자세가 여간 불편해 보였다. 그의 팔 안에 안겨 있는 가방과 책을 빼앗아 뒷좌석으로 획 던졌다.

“어? 야……!”

아직 이런 일이 불안해서 은우는 예민하게 받아들였지만 승현은 씩 웃었다.

“불편하게 가지 말라고요. 어쨌든, 바다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승현은 흥얼거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해가 정수리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시간이었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은우는 창문 밖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팔꿈치를 창틀에 괴도 무의미하게 스치는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하암-”

차만 타면 졸린 건가.

은우는 안락한 의자에 편안해져 하품했다. 시험도 끝나 긴장이 풀리자 밤새워 공부하던 피곤함이 몰려와 깜박이는 눈꺼풀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은우는 기지개를 켜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는데, 시험을 보기 전에 먹은 약 기운이 퍼지며 잠은 쏟아지고 있었다.

“은우 형, 나 예전부터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핸들 위에 손을 올려 정면을 응시한 태 승현은 말을 걸었다.

“응……? 뭔데?”

졸음 때문에 반응이 느려지는 은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그에게 돌려 말했다.

“형은 신약 개발 한다고 화공과 선택했을 때 반대 없었어요? 집에서 경영 배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둘째라서 괜찮은가? 나는 아빠가 무조건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경영대인데.”

빨간 신호에 걸린 틈을 탄 승현은 은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아…. 하암…….”

별것 아닌 질문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작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작은 하품을 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피곤하면 좀 자요.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늘어지고 나른한 은우의 모습에 승현은 어른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했다.

“어제 시험공부 한다고 거의 밤새우지 않았어요? 그리고 좀… 형한테 묻기에는 스스로 지뢰를 밟는 것 같지만, 오늘 약 먹었을 거잖아요.”

“…응, 근데… 괜찮아.”

버틸 수 있다며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지만, 은우는 점점 퍼지는 약 기운에 다시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안락한 시트의 편안함은 자꾸만 잠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점점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잠에 빠져들면서 승현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하아…. 반대… 없…. 음…….”

하지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은우는 잠의 늪 속으로 침잠했다. 아마 그에게 마음을 허락해서 승현을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형……?”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잠든 은우를 보며 승현은 작게 불렀다. 승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잠든 은우를 힐끗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순수하고 해맑은 빛이 사라졌다.

야만인은 절대로 선량해질 수 없었다. 선량한 야만인은 이제 그 본성을 드러내며 가면을 벗어던졌다. 승자의 미소가 지어진 입가는 송곳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은우에게 향하던 청량한 미소와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남은 건 아주 비릿한 비열한 웃음이었다.

은우를 태운 차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았다.

✻  ✻  ✻

엔진이 회전하며 도는 소리도 나지 않는 고급차량은 작은 진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은우가 무아지경으로 잠에 빠진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차 안을 채웠다. 창틀에 동그란 머리를 기대고 붉은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승현은 눈가를 찡긋거렸다. 자신보다 네 살 형이라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누가 봐도 자기보다 네 살이 어려 보였다.

은우와 만나는 내내 승현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만약, 은우가… 정말 약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악하고 비열한 웃음을 짓는 얼굴에서 도톰한 입술에서 붉은 혀가 나와 입술을 훔치고 사라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몸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이 뿜어져 나오리라….

은우의 페로몬은 어떨지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렇게 예쁜데 페로몬까지 풍기면 황홀할지도. 다만 이걸로 충격을 받을 은우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번 시험해 보려고 했다.

도로의 정체 구간을 만나 승현은 은우의 시트를 뒤로 젖혀 편하게 했다. 지금은 깨우지 않고 푹 자게 놔둬야 이따가…….

“…응…….”

끙끙거리며 자는 은우가 고개를 편안하게 돌리더니 자신에게 향했다. 조용히 잠든 은우의 얼굴을 보았다. 곧게 뻗은 속눈썹이 눈 밑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워냈다. 뜨거운 태양의 빛나는 햇빛이 은우를 방해하지 못하게 햇빛도 가려 주었다.

보기 좋게 솟은 콧대와 콧방울, 전체적인 은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조화로운 은우의 이목구비가 크게 확대되어 승현의 눈에 들어왔다.

새삼 긴장되고 또 아랫배를 묵직하게 울리는 욕정을 느꼈다. 지금 맹수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을 자는 은우를 보며 계획이고 뭐고 당장 일을 칠 것만 같아서 핸들에 올려놓은 손을 꽉 주먹을 쥐었다.

“형…. 자는 거 맞죠? 나 유혹하는 거 아니고.”

결국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승현은 살짝 손을 뻗어 은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은우는 멋을 부리는 것도 아니어서 자연 그대로의 매끈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렸다. 하늘거리는 다갈색의 부드러운 것이 손가락에 엉켰다. 얇은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니 습관이 될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새 고속도로로 진입한 차는 시속 120킬로미터를 넘나들며 질주했다. 과속이고 뭐고 승현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고속도로의 풍경이 어느새 색다른 풍경으로 바뀌었다. 쉬지 않고 차를 몰고 달렸더니 하늘에 높이 떠 있는 해는 조금 기울어져 있는 게 보였다. 승현은 요트가 정박한 선착장으로 곧장 이동했다.

점점 해는 기울어져 그림자를 길게 만들어내며 저녁놀이 깔리는 하늘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승현은 천천히 차를 세웠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 깊은 잠에 빠져든 은우는 평소 예민하게 굴던 것을 떠올리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한 은우를 보며 승현은 몸을 뒷좌석으로 쭉 뺐다. 그리고 늘 은우가 가방에 넣어 다니는 약통을 가방에서 뒤적거리며 찾았다.

달그락거리며 약통에 들어 있는 수십 개의 피를 연상시키는 색의 동그란 알약을 손에 꽉 쥐었다. 혹시나 긴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승현이 손을 뻗어 매끈한 은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제 자신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 은우를 떠올렸다. 은우의 작은 손등을 덧그리며 승현은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의 촉감만으로도 흥분할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자신의 피를 더욱더 끓게 했다.

“형, 미안해요….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미리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도망간다고 하면 도망 못 가게 할 생각이었다. 승현도 처음에는 호기심,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하루하루 은우와 보내면서 은우가 없이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매끈한 볼을 매만졌다.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부드러운 피붓결이 꼭 매끈한 푸딩을 만지는 것 같았다. 가벼운 손길에 은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작은 몸짓만으로도 흥분되어 승현은 심호흡을 하며 일어날 기미도 안 보이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형… 은우 형….”

승현은 은우를 가볍게 흔들었다.

“…으, 응…. 응?”

몸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으며 은우는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해 눈을 깜박거리더니 정신을 차렸다.

“잘 잤어요?”

샐쭉 웃는 승현은 선량한 가면을 쓰고 웃고 있었다.

“어… 어? 나… 잤어? 나, 안… 잤는데? 왜… 잤지?”

안 잔줄 알았는데 잠들어 버렸다. 승현 앞에서 푹 잔 것이 민망했다.

그렇지만 잠을 깊이 잔 것이 나른하며 어딘가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약을 먹었을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잠들어 버린다는 건 비일비재하니까. 하지만 승현이 앞에서 정신없이 잠든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창피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멍하게 바라봤다.

“완전! 폭풍 수면. 코도 골던데?”

은우는 창피해서 잠의 흔적에서 퍼뜩 깨어나 굳은 얼굴을 그에게 보였다.

“아… 아…….”

“농담, 농담. 코는 안 골았어요. 근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막 떠들면서 왔네요.”

밉지 않게 투덜거리며 말하는 승현을 보여 은우가 오묘한 표정으로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다 왔으니까, 이제 내려요. 저기예요.”

승현은 손가락을 창문 밖으로 가리켰고, 은우는 그의 손끝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요트가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다. 우리나라는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요트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은우는 관심을 준 적이 없어서 그 부분에서 놀란 눈을 했다.

분명 자신의 명의로 이런 건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나 형의 이름으로 된 요트는 한두 개쯤 있었을 테니 그리 신기하고 휘둥그레지는 장면은 아니었다.

차 밖으로 나간 승현을 따라서 은우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나갔다. 바닷가 특유의 비린내와 함께 여름의 습한 공기가 온몸을 덮쳤다. 여름 바다의 향기였다. 부둣가에 잔잔한 파도가 부서져 찰박찰박, 아니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은우는 정말 여행을 온 기분이 들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저기예요. 형, 빨리 와 봐요.”

아이처럼 보채는 승현은 자신의 팔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어? 어, 잠깐만… 약… 좀….”

은우는 막 뒷좌석에 놓은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으려고 했는데 팔을 잡아끌며 발을 동동 구르는 댕댕이 같은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 탓에 은우는 가방에서 약을 꺼내지도 못하고 가방을 달랑달랑 손에 든 채 승현을 따라갔다.

“이거예요. 어때요? 되게 엄청, 그럴듯하죠?”

은우가 입술을 오므려 배를 전체적으로 훑었다. 제법 놀란 눈을 하고 승현을 힐끗거리니 우쭐대는 승현의 콧대가 하늘로 올라갔다.

“음…….”

한눈에도 꽤 큰 요트가 선착장에 정박해 있었다. 은우는 자랑스레 요트를 샀다는 말에 무슨 작은 통통배 정도 샀겠거니 했는데, 제법 그럴듯한 요트의 크기는 놀라워 승현을 다시 보게 했다.

“이걸 사고 아무도 안 태워 줬다구요. 사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도 형을 제일 먼저 태워 주려고 했죠.”

의기양양한 승현은 영락없는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사서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냥… 형이 이제 나의 모든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요. 그래서 진수식도 형이 해줬으면 싶었죠.”

“별걸… 다.”

그리 작지 않은 요트 갑판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간 승현은 은우도 들어올 수 있게 팔을 뻗어 잡아 주었다. 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휘청이는 은우는 넘어질까 봐 승현의 손을 꽉 잡았다.

요트의 갑판에서 문이 보였다. 좁고 작은 문이었다. 아마도 선실이겠지. 승현은 그 좁고 작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문 열고 들어가면 선실 있어요. 쉴 수 있는 데 있으니까 구경해 봐요.”

“뭐, 이 정도면 구경 다 했지. 이제 자랑할 거 다 했으니까, 진수식? 그거 해달라며.”

은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민망하게 웃었다.

“근데… 나 잠들어서 아무것도 못 샀는데… 어떡하지?”

“괜찮아요.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 놨으니까.”

은우는 갑판 위를 빙 둘러보았다. 출렁이는 갑판이 흔들거려 묘한 기분이었다.

“그럼 빨리하고 가자, 벌써 해가… 늦을 거 같아.”

“에이, 형. 여기까지 몇 시간을 걸려서 왔는데, 잠깐 태워 줄게요. 이래 봐도 나 요트 운전 개잘한다구요. 기다려 봐요. 저기 앞에 부표 있는 데까지만 돌았다가 와요.”

이미 승현은 제 할 말만 하고 뒤를 돌아서 조종석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니!”

은우는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어깨춤을 추는 듯한 승현의 등짝은 배 중앙에 아담하게 솟은 건 선실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즐거워하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기분 좋아 한다는 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승현은 늘 말버릇으로 하는 로또 맞은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엔진의 모터가 움직이는 진동과 소리였다. 승현이 우쭐대며 시동을 켰을 얼굴이 그려졌다. 결국 은우는 그가 말한 곳의 문으로 다가갔다.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정도의 좁은 문을 열었다. 센서가 달린 건지 문이 열리면서 선실 내부의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아래로 내려가는 층계가 네다섯 개 나 있는 선실 내부는 생각보다 아주 널찍한 공간을 자랑했다.

“오… 제법 넓네.”

감탄하는 은우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높은 천장은 아마 승현의 키라면 꽉 들어맞을 정도였지만 은우는 여유 있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알차게 구성된 공간 활용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정된 공간으로 좁은 요트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계단을 내려와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왼쪽에는 간단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조리대와 오른쪽에는 리빙처럼 사용할 수 있는 붙박이 카우치와 소파와 활용성이 좋아 보이는 테이블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은 선두(船頭)에 가까운 곳이라 밖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과 꽤 커 보이면서 아늑한 침대가 빼꼼하게 보였다. 아마 침실 쪽에는 욕실도 붙어 있을 것 같았다.

“나… 너무 잘 잔 거 같은데.”

시험도 끝났으니 긴장도 풀려 확 정신 줄을 놓은 게 분명했다. 은우는 오른쪽 작은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잘 잔 것 같아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이는 은우는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웅웅 엔진소리가 선실을 가득 채웠다. 요트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맞다. 약 먹어야지.”

머릿속에 번뜩이며 은우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약을 꺼내려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뒤적였다.

✻  ✻  ✻

아주 천천히 배가 움직였다. 일부러 승현은 최저 속도로 향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하늘이 도와주는 건지 오늘의 바람과 파도는 흔들림도 없이 잔잔했다.

얼굴에 떠 있는 사악한 미소를 지우고 다시 선량한 가면을 썼다. 그리고 시동을 끄고 선내로 발을 느릿하고 천천히 옮겼다.

“은우 형, 뭐 해요? 나 졸라 멋지게 운전하는 거 구경하러 안 오고, 흥! 결국 혼자 멋 부리면서 목적지까지 다 와 버렸잖아요.”

밉지 않게 투덜거리며 승현은 선실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은우가 예측한 대로 키가 큰 승현이 선실의 높이 딱 맞았다. 발꿈치는 들어 올리면 머리가 쿵 찧을 정도로 꽉 들어맞았다.

승현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가방 속을 죄다 꺼내 뒤집어 바닥에 난장판을 해놓은 은우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우의 얼굴을 보자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때 차에서 약을 못 먹게 했을 때 보였던 핏기가 가신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없어…. 승현아, 이상해…. 없어….”

“응? 뭐가요? 뭐가 없어요. 뭐 잃어버렸어요?”

“없어…. 없어, 어떡하지?”

은우는 얼굴빛이 창백하게 떠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손바닥을 이마에 얹어 지금 상황을 돌이켜 봤다. 승현이 등장하자 은우는 굳은 얼굴로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나, 나, 갈래…….”

“짐 이거 왜 다 이래요? 또…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요. 형… 나 좀 속상하려고 하잖아요.”

은우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승현은 은우의 손을 잡았다. 가만히 은우는 승현의 손을 꽉 쥐었다.

징- 징-

또 하필 최악의 타이밍으로 은우의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시도 때도 없이 매일 먹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알림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은우는 오메가의 발정기 주기 따위 무시한 지 오래였다.

“형…….”

은우가 아무것도 못 하게 멍하게 있자 승현이 바닥에 떨어진 은우의 핸드폰에서 알림을 껐다.

약을 매일 먹을 필요는 없지만 은우는 약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 먹고 안 먹었지? 불안한 눈동자로 바닥에 널브러진 짐들을 훑어봤다.

당황하거나 다급할 때는 눈앞에 놓인 것도 잘 못 볼 때가 많으니까. 그래, 그런 걸 거야.

긴장된 눈으로 은우는 흔들리며 바닥에 널린 짐들을 세세히 살폈다. 손발이 떨렸다. 공포가 되살아났다.

약을 안 먹으면…….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안색이 급기야 파랗게 질려 은우는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형… 왜 그래요.”

승현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우에게 다가갔다. 작은 자신의 발걸음이었지만 잔뜩 경계하고 있던 은우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마른침을 삼키며 은우가 자신에게 창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약이… 약이 없어…. 어떡하지?”

“무슨 약이요? 설마 그 빨간 약이요?”

“…응…….”

“왜 없어요?”

“몰라…….”

떠는 목소리의 은우가 초조하게 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잘 찾아봐요. 여기 어디에 있겠지….”

승현은 모른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없어.”

“근데 약 그거, 꼭 먹어야 하는 거예요?”

“지금 농담 따 먹기 할 때가 아니야!”

은우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예민하게 소리쳤다. 오메가에게 억제제가 어떤 건지… 승현도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일부러 다 알면서 묻는 건가, 아니면 오메가인 자신을 놀리고 싶어서 묻는 건가. 은우는 좌불안석이 되어 순수한 승현의 커다란 눈망울을 응시했다.

“나… 갈래….”

언제가 됐든, 억제제 효과가 떨어진 시간이었다. 대체 내가 언제 약을 먹었는지. 은우가 가볍게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불안해서 심장이 요동쳤다. 긴장된 침을 삼키며 은우는 승현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매달렸다.

“…빨리 가자. 응?”

“알았어요. 일단 짐을 좀 챙겨야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승현은 본모습을 숨기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짐들을 훑어보며 허리를 숙였다. 떨어져 펼쳐진 노트, 필통에서 탈출한 펜, 전공 서적을 하나씩 주워 먼지를 털어 챙겼다.

은우는 떠는 손으로 승현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켜 세우며 다급하게 매달려 말했다. 오늘따라 승현이 뭉그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건 괜찮아….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자, 응…?”

재촉하는 은우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승현은 숙였던 몸을 일으켜 은우의 떠는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싫다고 피했을 손길을 은우는 피할 겨를도 없는 듯했다. 아니면, 자신이니까 은우가 허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형,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안심을 주는 옅은 미소를 은우에게 던졌다.

“응.”

은우도 크게 안도하는 얼굴로 끄덕였다. 승현을 방황하는 강아지의 눈빛으로 의지했다. 지금까지 만난 승현은 못된 면이 있어도 꽤나 믿음직스러운 남자였다.

“금방 갔다 올게.”

거기서 승현은 그치지 않고 불안에 떠는 은우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쥐고 진정하라고 의자에 앉혀 두고 선실을 나왔다.

“하- 어… 어떡하지….”

오메가의 페로몬이 새어 나오면 어떡하지?

가시지 않는 불안함으로 은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오늘 이 일은 자신이 상정하지 않은 일이었다.

약을 잃어버린다.

이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망망대해에서.

알파는 어지간해서 러트 사이클을 조절할 수 있었지만,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스스로 조절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약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은우는 약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말만 들었다.

겪어 본 적은 없었다.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오메가는 호르몬과 페로몬에 잠식된다고 했다. 그게 어떤 건지 어렴풋이 머리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고가 정지한 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오메가 아니야?」

머릿속에만 남아 있던 그날의 남자의 목소리가 정말 오랜만에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한동안 느끼지 않았던 그날 맡았던 알파의 페로몬 향기도 콧구멍에서 되살아났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수축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면서 그 횟수가 빨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에 따른 몸의 혈류도 빨라지더니 몸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하아…. 안 돼.”

은우는 기억에서만 있던 페로몬과 목소리가 더욱 커져 코와 입을 막았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최악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득 담긴 땀이 흘러나온다.

막힌 입으로 은우는 천천히 떠는 숨을 내쉬었다. 공포에 전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서 갑자기 저도 모르게 그날의 느꼈던 손이 뒤에서 튀어나올 거 같아서 은우는 벽에 등을 붙였다.

“괜찮아, 괜찮아. 여긴… 아무도 없어.”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벌써 칠 년도 더 된 그날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네가 먼저 오메가 냄새 뿌리고 다녔어. 알지?」

「페로몬이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피어나는데. 이거 완전히 순진한 척하면서 알파 잡아먹는 오메가잖아.」

눈을 질끈 감은 은우의 입술을 비집고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흐읍…….”

등을 붙인 벽에서 손이 튀어나올 거 같아서 황급히 등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튀어나올 거 같아지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스, 승현아….”

빨리 승현이 와서 도착했으니까 가자고 해주었으면, 승현의 손길과 품으로 빨리 자신을 보듬어 주었으면,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으면. 선착장에 도착해 어디서도 좋으니 아무 약국에서 빨리 아무 약이라도 사서 먹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은우는 시간 감각을 잃었지만, 몸의 변화는 느꼈다.

“서, 설마… 이렇게 빨, 빨리?”

은우의 이마에 맺혔던 식은땀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옷을 크게 움켜잡은 은우는 조금씩 몸이 이상해지는 걸 느껴 힘겹게 누르고 있었다.

킁킁, 은우는…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를 맡았다. 본디 자신의 향기는 맡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은우는 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서 나는 페로몬을 맡을 수도 느낄 수도 있었다. 몸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것 같은 이 냄새는 지독하게 역겹다고 생각했다.

“아, 안 돼…. 냄새…나. 후으….”

가는 신음 섞인 숨을 길게 내뱉으며 좁은 카우치 소파에 몸을 웅크렸다. 몸 어디서 피어나는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가 역겹게 흘러나오는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냄새를 느끼는 코도 자르고 싶었다. 생각과 다르게 몸에서 일어나는 이상함이 무서워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 칼이… 있을 건데.”

은우는 바닥에 엎어져서 떠는 손으로 필통을 잡아들었다. 커터 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우는 자신의 소지품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사고력이 정지해 있었다. 필통을 아무리 뒤적여봐도 분명 가지고 다닐 커터 칼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 왜… 없지? 있을 텐데…. 분명 있을 건데…. 왜 칼도 없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코를 크게 훌쩍거린 은우는 빠르게 시간을 역순으로 되돌리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무릎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분명 승현이가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서, 그거 때문에…. 그 순간 약이 가방에서 빠진 걸 거야. 그래, 맞아.”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중얼거렸다.

“…차에 가서 뒷좌석에 문을 열면 약이 있을 거야…. 응, 맞아. 괜찮아, 은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유를 되찾으려 괜히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슥 닦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몸의 이상한 변화는 달갑지 않아서 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빨리 이 배가 선착장에 다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승현이 지금까지 만나 본 오메가는 수없이 많았지만, 은우 같은 인물은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은근슬쩍 억제제를 일부러 안 먹고 오메가의 페로몬을 자신을 향해 발산하여 육체적인 관계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승현이 만난 인물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만 만났으니 은우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승현은 선실의 문밖에서 몸을 기대고 섰다. 은우는 당장에 선착장에 돌아가자고 했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선착장의 불빛을 보며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메가는… 몇 분이 지나야, 효과가 나올까? 우리 곱상한 도련님은… 고집이 세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가 흥분과 희열에 젖었다. 등을 기대선 선실 내부를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았다. 은우가 과연 안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 눈초리를 했다.

오메가도 알파도 마찬가지로 발정기 때 뿜어내는 페로몬이 있었고, 또 서로를 찾기 위해 평소 풍기는 옅은 농도의 페로몬이 존재했다. 이때 나오는 페로몬은 스스로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승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은우에게서 피어나는 페로몬을 어떤 것도 맡은 적이 없었다. 은우가 평소에 먹는 억제제를 오남용해서 그런 것인지, 은우의 오메가의 페로몬이 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억지로 그의 페로몬은 불러 깨우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차에서 일부러 약을 빼앗아 봤지만, 역효과만 일으켰었다.

아직 맡은 적은 없지만, 은우의 페로몬은 향기로우리라. 무슨 향기일까. 은우를 닮은 향기라면… 장미 향이나 라벤더 같은 꽃향기가 어울릴 것 같았다. 이렇다 보니 은우에게 미안하지만, 꼭 그의 페로몬을 느껴 보고 싶어서 은우에게서 그 약을 빼앗는 거로 시작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계획을 세웠다.

은우가 강박적인 모습으로 약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은우가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 지인과 친구들을 통해 알아봤지만… 자세한 이유와 상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소문으로 “내가 겪은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는….”, “카더라….”였다.

은우 본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은우에게 못 할 짓이었다. 지금도 저렇게 강박적으로 약에 의존하는 은우였기에.

아버지는 은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사교 파티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렸던 말은 은우를 둘러싼 소문을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물어보려 했지만, 그만뒀다. 그런 건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런 소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씩 은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들은 은우의 소문은 ‘문란하다’, ‘알파를 꼬신다’, ‘섹스에 미쳤다’ 등등 믿기 힘든 말들이었지만, 지금은 은우가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심지어 은우는…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은우의 뒷조사를 하며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은 모두 하나같이 은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따로 연락하는 적도 없었다고 했고, 졸업 이후로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다만, 고등학교 동창들이 말해 주기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경호원이 없었는데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그 이후부터 은우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었고,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다고 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그들도 모르는 듯했다.

그때 겪은 어떤 일로 인해, 은우가 약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에 의해 은우의 오메가 페로몬이 사라졌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승현이 알게 된 사실은 그게 끝일 뿐이었다.

못되고 힘든 일을 꾸며서까지도 자신은 은우의 페로몬을 느끼고 싶었다. 그건 알파와 오메가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은우의 페로몬을 끄집어내는 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분명 향긋하겠지. 음, 민트 향도 좋을 거 같아. 상큼하겠다.”

하루하루 은우에 대한 마음이 커져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빵’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작은 고슴도치가 위협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몸을 웅크리고 가시를 돋아냈다. 여린 은우가 밀어내는 손짓도, 경계하는 눈빛도, 못된 가시 돋친 말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이 자신에게 안기면 얼마나 황홀할까. 나긋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열에 잠겨 신음하면 얼마나 좋을까.

단정하고 정제된 고운 얼굴이 자신이 주는 페로몬과 쾌락에 못 이겨 풀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반듯하고 기품이 넘치는 도련님의 귓가에 저급하고 적나라하게 속삭이면 수치심에 매달리겠지.

은우가 자신이 슬쩍슬쩍 내뱉는 음담패설에 눈꺼풀을 미약하게 떠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은우를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은우라는 사람은 만만찮은 상대였고, 그 경계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알게 모르게 초조해졌던 건 자신이었다.

약을 손에서 빼앗기만 해도 은우는 예민하게 발톱과 이빨을 드러냈다. 빈틈이 없는 은우가 행여 오메가의 억제제를 어쩌다가 안 먹기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못 이기는 척 풀어주기라도 할 텐데, 은우는 안 먹기는커녕 남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결론은 보일 때 빼앗으면 예민해져 안 되니, 은우가 보이지 않을 때 즉 안 볼 때 숨기자는 이야기였다.

승현은 그러면서 아까 은우의 가방에서 꺼낸 약통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옷 위에서 툭툭 만졌다. 볼록한 것이 느껴졌다. 그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완전무결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이 이제 저밖에 없어서 방금도 돌아가자고 매달리는 모습조차 상당히 요염해서 당장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아직 자신은 선량한 사람이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승현은 희열에 들뜬 목소리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다. 저녁놀이 지던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조금만, 더 있어 볼까? 시간은 많으니.”

다소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고즈넉하게 파도 소리가 선착장에 정박한 하얀 요트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출렁출렁 물소리가 가득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이쯤이면… 어떨까. 우리 도련님, 예뻐해 드려야지.”

사실 은우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오늘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때는 강제로 취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 도망가지 못하게 바다 위로 끌고 나왔다.

콧대 높은 공주님의 성을 무너뜨려, 아름다운 공주님을 쟁취한다는 동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승현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아서 포기해 버렸다. 그게 무엇인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 슬슬… 도련님의 본능을 깨워 볼까?”

등을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우며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부딪쳤다. 지금까지 지었던 못된 얼굴을 철저하게 감추며 몸을 서서히 돌렸다. 그리고 조심히 선실의 좁은 문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열었다.

은우는 대체 어떤 페로몬을 뿜어낼까.

삐익- 경첩이 맞물리며 소리가 나며 안에서 미풍이 불었다. 그 공간을 가득 메워야 할 오메가의 페로몬은 없었다. 바람에 묻어 있어야 하는 은우의 페로몬은 나지 않았다.

아무런 향기가 없었다.

인상을 살짝 찡그린 승현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여기까지 온 거, 고작 페로몬이 없다고 그르칠 수 없었다. 최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은우의 페로몬이 이곳에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승현은 ‘알파’의 페로몬을 펌프질을 하며 발산했다. 은우의 페로몬이 나지 않는 걸 모른 척하며, 상상의 자극을 했다. 조금 김이 새 집중해야 하긴 했지만, 은우를 앞에 두고 그런 상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온몸에 끼쳐 오는 은우의 페로몬을 상상하며 눈을 살며시 감고 느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향긋하고, 본능을 가만두지 않은 채 자신을 달아오르게 할 것이다. 미칠 듯이 후각을 찌르고 성욕을 살살 긁어 자극해서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게 할 것이다.

슬쩍 눈을 치켜떠 은우가 공포에 절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왜소한 등이 굽어져 움츠러든 그의 어깨가 사랑스러웠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학적인 욕구를 같이 느꼈다.

몇 번의 시행착오와 판단 미스를 거듭해 계획을 세워 은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함정에 빠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여유가 없어졌다. 그 목표를 목전에 두고 나니 승현은 당장이라도 은우를 벗겨 덮칠 것 같은 욕망이 피어올랐다.

은우에게서 피어나는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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