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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이상한 정략결혼 (15/22)

14장. 이상한 정략결혼

변 회장이 무섭게 엄포를 놓던 말에도 꿈쩍없이 앉아 있던 승현은 은우의 아주 가벼운 잡아당기는 손짓에 반응하며 움직였다. 커다란 멍멍이가 은우의 손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신장 190을 넘기는 승현이 하늘로 불쑥 솟았다. 커다란 거친 야수가, 가녀린 미인 조련사에 끌려가는 것처럼 순진하게 끌려 서재를 나갔다. 은우와 승현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사뿐하게 밟았다.

거실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중앙 계단을 가운데로 왼쪽은 은우의 구역이고, 오른쪽은 정윤의 구역이었다. 은우는 왼쪽 복도로 걸어갔다. 2층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은우는 겨우 승현의 손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은우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문이 몇 개씩 있었다. 그중 커다란 양문형으로 된 문이 은우의 방이었다.

“넌 저기 써.”

은우가 왼쪽에 있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저기는 내 손님들 오면 사용하는 방이니까.”

“형 방은 어딘데요?”

승현의 가벼운 말에 은우는 그의 까만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순진무구하게 손가락으로 자기 방을 가리켰다.

“응? 내 방은 여기.”

승현은 순수한 은우를 보며 눈을 번뜩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은우가 가리킨 방으로 몸을 돌려 양문형 문을 벌컥 열었다.

“야…! 뭐, 야…. 네가 왜 내 방에 들어가는데.”

은우가 당혹스러워하며 승현을 쫓아 자기 방에 들어가며 말했다.

넓은 은우의 방이 드러났다. 승현이 빙 둘러본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은우의 방은 자신과 다른 느낌이었다.

창가 쪽에 자리 잡은 퀸인가, 킹사이즈의 침대, 그리고 침대 끝 발판이 있는 곳에 TV가 놓여 있었고, 무엇보다 방안에는 책으로 꽉 채운 책장이 한쪽 벽을 장식했다. 책장 앞에는 디귿 자 모양의 넓은 소파와 소파 테이블이 있었고, 소파 밑바닥에는 포근해 보이는 러그가 깔려 있었다.

승현은 침대로 가서 은우를 쉬게 하려고 생각했지만, 일단 허락도 없이 침대에 올라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커다란 소파로 향해 허리를 내렸다.

“뭐야… 너….”

문을 닫고 들어오는 은우가 제집처럼 편안하게 구는 승현을 우두커니 서서 멍하게 바라봤다.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요.”

승현은 등받이에 팔을 걸어 꼭 흡사 양아치가 껄렁하게 앉은 모양새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미소 지었다.

“후우… 여기 내 방이거든.”

“형 방은 되게 평범하네요.”

“뭐? 내 방에 뭐 있는 줄 알았어?”

“난 뭐… 막 레이스 있고, 공주님 방인 줄 알았죠.”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막무가내인 승현의 성격을 어느 정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은우는 다가가 풀썩 승현의 옆자리에 풀썩거리며 앉았다. 긴장이 풀려 피곤함이 몰려와 은우가 작게 하품을 하는데 승현이 자신의 팔을 잡고 주욱 당겼다.

“가까이 앉으라니까, 꼭… 이래.”

은우는 얼굴에 근심과 수심이 가득한데, 승현은 어느새 여유로움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야- 야아… 하지 마.”

“형 방 오니까 진짜 신기하다. 내가 여기에 들어올 줄 몰랐는데…. 꼭 금남의 구역 같은…? 아니지 알파 금지 구역 같은 곳.”

은우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여자냐? 여기가 왜 금남의 방이야. 그리고 알파 금지 맞아.”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수긍하자 은우가 더욱 그의 꿍꿍이가 이상했다.

“이제부터 내 방은 너만 금지의 방이야, 한승현 한정! 그러니까 빨리 나가.”

손가락을 문으로 가리키며 은우가 말했지만, 승현은 책장으로 시선을 던지며 화제를 바꿨다.

“근데 저기 책장에 꽂힌 책은 다 읽은 거예요?”

“응? 응.”

은우는 또 쉽게 그의 말에 대답을 해버렸다. 도리어 은우의 말에 승현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하는 소리를 내더니 음흉하고 낮은 목소리로 놀렸다.

“꽂혀 있는 책 뒤에 막 야한 잡지나, 그런 거 있는 거 아니고?”

“……미쳤어? 내, 내가… 너냐? 생각해도 그런 것만 생각하지?”

얼굴이 빨개진 은우가 당황하며 승현에게 빽 소리쳤는데 승현은 타격감 제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 방에 성인물 많은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난 내 방에 다 꿍쳐 놨죠. 형,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또 너무 형이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아주 몹시 궁금한데?”

“무,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알았어요. 믿어 줄게.”

승현은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은우를 품에 안은 채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침대에서 매일 자고 일어나는 은우를 머릿속으로 그렸더니 큭큭 웃음이 났다.

“야… 왜 웃어…. 소름 끼치게.”

“아- 그게, 형이 저기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는 거 상상했더니, 무슨 숲속의 공주님 같을 거 같아서…. 생각하니까, 예쁘잖아요…. 아, 예쁜 거 싫다고 했지? 예쁜 거 말고, 음… 꼴리는 거잖아요. 우리 나중에 형, 결혼하면 형이 꼭 드레스 입어 줘요.”

“…너 좀 미친 거 같아. 알아? 그리고 뭘 또 결혼까지 가? 내일 당장 헤어질 수도 있는데.”

“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부정 타니까 빨리 침 세 번 퉤퉤퉤 뱉어요. 빨리.”

“뭐?”

가끔이 아니라 갈수록 애늙은이 같은 걸 보여 주는 승현 때문에 은우는 실없이 웃었다.

승현이 침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아 은우가 괜히 민망해져서 승현의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기려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승현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침대가 아주 넓은 게 마음에 쏙 들어요. 우리 둘이 자도 충분하겠다. 그렇죠?”

“뭐라고?”

“…형이 내 생각 하면서 저 침대 위에서 자위했다는 생각 하면, 지금도… 아랫배가 저릿저릿하네.”

“아, 아니야…. 이, 이상한 소리 하… 하지 말고… 빨리 나가라니까.”

“아니긴 뭐 아니야. 맨날 아니래. 사실이면서. 내 생각 하면서 했다고 아까 다 말했으면서.”

실없이 웃으며 속 편해 보이는 승현을 매섭게 노려보는 은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우는 창피함에 눈을 꾹 감았다.

은우의 반응이 귀여워 놀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겠는지 승현은 자꾸만 웃음을 보이며 은우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은우가 싫다고 반항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은우는 자신의 품속에 가만히 안겨 손을 꼼지락거리며 체념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승현은 시간의 텀을 두고는 분위기를 바꾸었다.

“…근데 진짜 형네 아버지, 회장님 진짜 완전 무섭더라. 오줌 지릴 뻔했지 뭐예요. 볼썽사납게.”

승현은 대치했던 변 회장의 얼굴과 분위기를 떠올리자 오금이 저린다는 듯 몸서리를 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너… 진짜 미쳤어?”

갑자기 은우는 이 모든 일의 화근이 승현인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맞잖아요.”

그 말에 적당히 대꾸할 말을 못 찾은 은우가 심각하게 말했다.

“지금 너 여기 내 방에 있는 거 아빠가 알면….”

어깨를 으쓱하며 심각함을 모르는 것처럼 승현은 반응했다.

“뭐 어때. 이미 다 밝혔는데요, 뭐 우리 둘이 섹스했다고.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 형, 내가 가서 말하고 올까요? 우리 둘이 섹스했다고?”

“아, 야! 진짜…. 하지 마, 그런 거! 하기만 해!”

“알았어요. 그건 최후의 보루로….”

“최후의 보루로도 남기지 마, 진짜…! 너 빨리 집에 가든지, 건너편 방으로 가든지 해. 아빠 진짜 화나면 더 무섭단 말이야.”

“와- 형…. 잠깐만, 그 말은 그러니까. 회장님 저게 화내는 게 아니었어요?”

은우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은우를 승현은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승현은 은우의 아버지가 자리에 없다고 기죽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럼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저게 화낸 게 아니라니, 반전이다. 회장님 화내는 거 무서울 거 같지만 그래도 여기 있을래요. 여기까지 와서 가오 죽게 내뺄 수는 없잖아?”

일어나서 쫓아내려는 은우와 버티려는 승현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힘으로 승현을 이길 수 없는 은우가 지고 말았다. 승현은 은우에게 완전히 기댔는데, 체중이 무거워 은우가 옆으로 기우뚱하게 쓰러졌다.

“뭐야. 왜 그래, 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승현은 은우의 몸 위로 겹쳤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은우는 승현의 얼굴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 버린 은우는 입에 침을 바르며 거짓말을 하자면, 체중의 두 배 차이 나는 승현을 들어 올릴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다시 승현의 밑에 깔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형 방은 금남의 장소는 아니지만, 금단의 구역 같아서 되게… 기분이 좋아요.”

음흉하게 지은 승현의 미소가 꿈틀거리며 사악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승현은 커다란 몸을 은우에게 겹쳐 눕더니 손으로 은우의 허리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야, 야…. 하지 마!”

“왜에- 오늘 우리 섹스 많이 해서 형 허리 아프지 않아요? 내가 좀 풀어 줄게.”

“아, 아냐……!”

“뭐 맨날 아니래. 그렇지만 괜찮다는데 좀 더 할걸. 안 아픈 거 보니 더 해도 됐었을 건데.”

“자… 잠깐…. 좀, 진짜!”

“흐음… 형, 너무 귀여워…. 잠깐 만지는데 예민해…. 되게 잡아먹고 싶은데요?”

승현은 뜨거운 숨을 가늘게 은우의 귓가에 뿜었다.

“아, 역시… 예뻐.”

말 그대로 흠칫한 은우는 소름이 돋은 오묘한 감각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야- 정말… 그, 그만해….”

“나 좋다면서요. 알면서 따라갔다면서요…. 그 말이 너무 좋았어.”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옆으로 돌린 은우의 옆선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입술에 담았다. 혀를 이용해 애무하고 빨다가 이로 잘근거렸다.

쪽쪽 소리가 가까이 들려 은우의 얼굴은 수줍음으로 가득했다. 승현은 수줍어하는 은우를 더 괴롭히고 싶어 노골적인 애무로 귓바퀴를 따라 혀로 쓸어올렸다.

“흐으, 응…. 하, 하지… 마. 승…현아…. 하아.”

빠는 소리와 혀로 질척이는 소리가 은우는 외면할 수 없는 거리에서 들리고, 몸을 덮은 승현의 체온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장을 간질거리는 감각은 목청을 살살 긁어 소리를 내라고 하는데 은우는 힘주어 참았더니 목에 핏대가 선명해졌다. 대신 간지러운 자극이 허리를 관통해 울려 눈물이 한 방울 눈꼬리를 타고 또르르 흘렸다.

승현은 은우의 목선에 얼굴을 묻어 혀를 날름거렸다.

“으으…….”

밀어내지도 못하고 은우가 간질거리는 감각에 한 손으로는 입을 가로막고 다른 한 손은 승현의 머리채를 가볍게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은우는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누가 방에 들어와서 승현과 이 모습을 본다는 사실에 은우는 아찔해졌다. 절대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자 몸을 덮고 있는 승현을 밀어내려고 했는데, 승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비… 비켜…. 누가 왔잖아.”

덜덜 떠는 힘겨운 목소리가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방해로 인해 멈춘 것이 아쉬운 승현은 진득하게 목선을 빨아서 빨간 자국을 만든 부분에 입을 한 번 맞추더니 몸을 일으켰다.

방문은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은우가 미처 소파에서 일어나기 전에 열렸다. 방문을 열고 방으로 습격한 사람은 정윤이었다.

“들어오라는 소리는 없었는데… 나 들어가도 되는… 거 맞지?”

정윤은 조심히 방문을 닫으며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을 보며 허락을 받았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은우의 벌어진 셔츠, 그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양쪽 볼과 그렁그렁 맺힌 눈물 자국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혀, 형.”

은우의 몸을 덮은 커다란 승현은 아쉬움을 담아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좀, 옆으로 가.”

은우가 날카롭게 승현을 밀치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른 벌어진 셔츠를 여미고 아무렇지 않은 척 소파에 반듯하게 앉았는데, 정윤에게 모두 들켜 버려 창피했다.

승현은 은우 옆에 철썩 붙어서 엄마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있으면서 정윤을 날카롭게 재단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정윤을 적군인가 아군인가 판별하는 눈이었다.

“어, 엄마는……?”

은우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형은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승현과 은우의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랑 얘기 중. 비서실장님도 오신다고 하시고… 나도 다시 내려가 봐야 해.”

정윤은 현재 일품 그룹의 후계자 수업 중이었다. 정윤은 솔직한 심경으로 승현이 달갑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복잡했다. 아래층에서 부모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더욱 신경 쓰였다.

은우가 가진 일품의 지분이 자신이 보유한 지분보다 많았으며, 아직 아버지가 차명 계좌에 숨겨 놓은 주식의 가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그걸 노리고 승현이 접근한 거라면….

“…….”

비상 상황이라는 분위기를 내는 형을 보며 은우는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세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지만, 서로 말이 없었다. 묘한 기류만 흘렀다. 정윤을 경계하는 승현과 죽을 듯이 고개만 숙인 은우,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정윤은 은우를 할 말도 많고 궁금한 점도 많은 얼굴로 응시했다.

은우에게 있어서 정윤 자신은 언제나 든든한 방어막이고, 보호자이면서 지원군이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은우의 방어막이 이제… 자신에게서 떨어져 승현에게 옮겨 가기 시작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정윤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상황이야? 빙빙 돌리지 말고.”

“…….”

은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꾸며서 말해도, 저렇게 꾸며서 말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그러니까, 둘이 사고를 정말, 친 거야?”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은우가 눈동자를 굴렸다. 옆에 앉은 승현은 은우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바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은우 형을 제가 덮쳤어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정윤의 시선을 피하는 은우는 옆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승현이 있었다. 덕분에 어깨가 들썩이며 화들짝 놀란 은우는 반응하며 승현의 입을 막으려고 몸을 비틀었다. 은우가 양손으로 승현의 입을 틀어막고 곁눈질로 정윤을 힐끔거리는데 얼굴은 붉게 창피함으로 물들었다.

“푸핫-!”

정윤은 크게 웃으며 승현을 보고 웃었다. 동시에 정윤은 자신이 걱정한 게 헛수고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승현은 은우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은우에게 미안하지만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자신이 담당하는 리조트 개발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와- 너무 당당하니까 할 말이 없네. 근데 꿍꿍이 없이 대답하는 성격 시원시원한 게 마음은 든다.”

“헤어지라고 하면 은우 형 납치해서라도 갈 겁니다.”

승현은 자신의 손에 비해 가냘픈 은우의 손목을 잡아당겨 막은 손을 치워 정윤에게 지지 않고 말했다.

“야, 좀… 조용히… 해. 창피하잖아.”

은우는 화르륵 불에 타들어 갈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되어 매서운 눈초리를 했다. 꼭 삐친 고양이 같았다.

“어디든, 무조건 은우 형 데리고 갈 겁니다.”

“그만 좀! 이제 그 입 좀 다물어!”

눈에 힘을 주며 은우가 말하는데 승현은 당당하게 눈빛으로 ‘왜, 뭐, 틀린 말 했냐’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이게 지금 정윤 앞에서 무슨 짓인가 싶어 은우는 곤란한 듯 승현을 밀어내고는 있는데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윤은 은우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평소에 약을 먹고 늘 불안하고 예민하던 모습이 잦아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생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 대 때려 주려고도 생각했는데. 은우가 약을 먹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승현의 배경에 대해 이미 조사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승현에게 재차 확인할 사항은 정말 은우가 좋은지뿐이었다.

“너, 정말 내 동생 좋아하는 거야?”

“네.”

대답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거기다 정윤을 바라보는 승현의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확고한 의지였고, 알파의 본성이었다.

알파의 본능, 정윤은 더는 막고 반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더는 할 말은 없지. 반대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승현을 향해 히죽이는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 말에서 승현의 눈빛에 살기가 돈 게, 정윤은 웃음이 났다.

“…좀, 나도 내 동생 빼앗긴 거 같아서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정윤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승현을 응시했다. 그룹의 총수인 아버지의 기에 눌리지 않던 승현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다. 승현이 올해 스무 살이라면, 승현과 자신은 거의 띠동갑 이상 차이가 났다.

“난 너 같은 성격 싫지 않아.”

정윤의 웃는 목소리에 은우와 승현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향했다.

“…어,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린 건 어린 티가 났다. 정윤이 호의를 드러내자 승현은 제법 순한 얼굴로 자신을 대했다. 씩, 정윤이 웃으며 승현에게 말했다.

“승현이라고 했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거 같아서, 내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네.”

정윤은 은우와 승현이 모르는 이야기를 입술을 쫙 찢는 웃는 얼굴을 했다.

“너 오늘 우리 아버지한테 당한 거야.”

“……예?”

정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승현을 향해 웃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음, 예를 들어서… 조련당한 거지. 한마디로 길들이기.”

“예?”

은우도 승현도 정윤의 말이 아리송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리에 관계없는 나를 왜 불렀다고 생각해?”

정윤은 지켜보는 내내 승현이 은우에게 홀딱 빠졌다는 걸 느꼈다. 방증으로 승현의 손이 지금까지도 은우를 놓지 않고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지, 그걸 알면 네가 스무 살이 아닐 거다. 내 역할은 적당히 상황을 마무리하는 역할이지.”

정윤은 어깨를 작게 흔들며 웃었다.

“덧붙여서 한 가지 알려 줄게. 우리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대단하셔. 물론 너희 아버지인 한 대표님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데 과연 회장님인 아버지가 은우 옆에 네가 있다는 걸 지금까지 모르고 계셨을까? 방금 봤지? 아버지가, 사진 보여 주면서… 이야기를 꺼낸 건 아주 예전부터, 아마 처음부터이지 않을까? 그때부터 너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지. 만약, 너한테 별 볼 일 없었다면, 그 즉시, 아주 예전에… 은우와는 만날 수도 없었을 거야.”

“아…….”

승현은 충격적이면서 반전 있는 이야기에 큰 눈이 끔벅끔벅거렸다. 지금 그 말은…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했다는 거니까 허락한 게 아닐까? 승현은 좋을 대로 생각했다.

“그럼 저 은우 형이랑 만나도 되는 거 허락받은 건가요?”

“……형.”

은우도 놀란 듯이 정윤을 향했다. 대신 평온한 얼굴을 한 정윤은 덧붙였다.

“아마, 아버지 계산 속 순서가 바뀌어 버려서 머리가 아프신 걸 거야.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너의 그… 주체 못 한 혈기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겠지.”

“…….”

“그래도 사진이랑 이것저것 꾸며 놓았을 텐데… 아무튼 대단해, 아니 그건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 예전에는 가끔이었지만, 요즘은…… 나도 아버지가 무섭다.”

승현도 은우도 대꾸도 없이 가만히 정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정윤은 콧소리를 내며 턱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한테서 무슨 말이 나올지 나도 모르겠지만 꽤나 각오하고 있어야 할 거야.”

“그럼요. 그렇지만 헤어지라는 건 안 됩니다.”

승현의 대답에 정윤은 씩 송곳니가 보이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너 그래도 오늘 멋있었다. 의외로 아버지가 한 방 제대로 먹었지.”

승현은 엄격하던 변 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는데 어디서 변 회장이 한 방 먹은 걸까 고민했다. 정윤은 손뼉을 부딪치며 이어 말했다.

“그 부분은 인정해. 아버지도 그래서 은근히 네 배짱은 인정하신 것 같아.”

“그럼 저 확실히 은우 형이랑 만나는 거 허락된 건가요?”

“…….”

이제 정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윤은 알쏭달쏭하게 긍정과 부정 어떻게든 답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곧은 승현의 눈빛이 더더욱 마음에 들어 익살스럽게 말했다.

“방해꾼은 이만.”

정윤의 정체가 적군이 아니었다는 걸 파악한 승현의 손은 은우를 품속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승현은 그냥 은우와 허락받았다고 생각해 버리자 가슴이 웅장해지는 감각이었다.

은우가 잠시 얼이 나간 얼굴로 승현의 노골적인 손길을 모르고 있었는데, 정윤은 유유히 방을 나가며 동생인 은우를 위해 한 마디 도움을 주려고 했다.

“아, 맞다. 너희 언제까지 그렇게 끌어안고 있을 건데? 몇 분 뒤에 엄마 오시면 놀라서 기절하실걸? 그러니까 방금까지 했던 일 뒤로는 하지 말고.”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이며 정윤은 방문을 열었다. 정윤이 아니었으면, 은우는 그대로 다시 승현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몰랐다. 방금 승현의 손이 은우의 셔츠 밑으로 파고 들어가던 것이 딱 멈춰 버렸다.

“아, 아니… 어…? 그러니까, 이 손 좀 놔 봐.”

은우가 정윤 덕분에 정신을 차리더니 슬금슬금 승현의 커다란 손이 옷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 손을 치웠다. 싫다는 듯 승현은 자신을 손에서 놓지 않더니 은우의 입술에 소리가 나게 뽀뽀를 연이어서 하자 은우는 힐끔 방문 뒤로 사라지는 정윤의 그림자를 좇았다.

두 사람의 작은 실랑이를 힐끗 보다가 정윤은 미소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할 일이 많아졌다. 정윤은 아버지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이제 방해는 없는 건가.”

“방해는 너야!”

이런 분위기에 정신 못 차린 승현이 진득하게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 미, 미쳤…어!”

동공이 흔들리는 은우는 승현의 손을 막았다.

“…그동안 내가 형을 생각하며, 얼마나 딸을 쳤는데…. 이 좋은 걸 두고, 아깝게….”

승현의 손은 이제 거침없이 안겨 있는 은우의 허리부터 등살까지 매끈하게 쓸어올렸다. 매끈한 살결이 피부에 닿아 승현은 소름이 돋는 듯했다.

“스, 승현아….”

승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옷자락만 움켜쥔 채 떠는 은우가 사랑스러웠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하고 은우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옷 위로 말랑한 엉덩이를 조물딱조물딱 주무르며 속삭였다.

“그럼 키스해 주면 참아 줄게요.”

끈적하게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의 손길이 하지 않으면 더 심한 것도 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 진짜…지?”

“그럼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현은 놀고 있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치며 가리켰다.

“여기다 해요.”

“휴…….”

한숨을 소리가 나게 쉬고 은우는 승현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세를 마주 보고 앉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숨으로 승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두 뺨을 가볍게 쥐고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쪽,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질 찰나 승현의 손이 자신의 뒷머리를 잡아 고정해 도망가지 못하게 하더니 그대로 입술을 벌리며 혀를 침범시켰다.

“으으…….”

당황한 은우가 요리조리 피하느라 진을 빼는 혀를 승현이 강하게 움켜쥐더니 뽑을 듯이 빨아당기면서 혀를 섞었고, 또 뜨거운 숨을 나눴다. 승현은 말랑이는 은우의 입안을 제집인 양 헤집어 놓으며 혀끝으로 입천장을 쓸었다.

은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싶으면서 이제 승현을 받아들이게 되자 목에 팔을 감았다.

혀가 얽히며 질척한 소리가 났다. 말초 신경이 모두 저릿할 정도로 서로의 혀가 엉켜 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승현은 은우를 번쩍 안아 들었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위로 은우를 내려놓으면서 승현은 은우의 몸 위로 덮어 누르며 진하고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  ✻  ✻

어스름하게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빛이 비쳐 눈이 부셨다. 은우는 피곤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서 피곤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제는 너무 긴 하루였다고 생각하다, 꿈을 꾼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에 180도 바뀌어 버린 기분은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아주 두꺼운 철판을 깐 건지 철면피가 흐르는 승현은 옆에서 조용하게 눈을 감고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조차 이상했다. 은우는 숨을 쉬는데 가슴 위에 올려진 커다란 팔의 무게가 느껴졌다.

“……신기하다.”

잠긴 목소리로 은우는 승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우리 집에, 그것도 자신의 방에 한승현이라는 존재가 들어올 줄 몰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이렇게 승현을 보며 심장이 떨리고 설레는 기분을 느낄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었다.

“……끄응.”

밤새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탓에 어지간히 불편한 은우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정말 승현은 허락을 받을 때까지 붙어 있을 심산인 것처럼 보였다.

누운 채 한숨을 쉬는 은우는 빽빽한 피곤함이 몰려오는 눈을 살짝 감았다. 승현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게 좋았다. 그와 함께 있으니 안정감을 느꼈다.

뭐지?

평온한 숨소리만 내쉬는 승현과 달리 밖이 다소 부산스럽다고 느껴져 은우는 몸을 일으켰다. 상체에 올려진 승현의 팔을 들어 옆으로 조심히 놓았는데, 동시에 승현의 손이 움직여 자신을 확 잡아 눕혔다.

“어……?”

역시 그는 철면피였다. 하지만 눈치가 없다고 했어도 승현도 조금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깜짝! 이야…. 일어났어?”

은우는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꼭 신혼부부 같은 대사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난다긴다해도 승현의 얼굴에는 가시지 않는 긴장된 얼굴이 보였다. 하긴 스무 살의 승현에게도 아주 커다란 변환점이었으리라. 은우는 깜박이며 고민에 빠졌다.

“무… 흠흠, 무슨 생각 해요?”

승현은 낮고 갈라진 목청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응…?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우리처럼 이렇게 갑자기 변한 것을 두고 뭐라고 했는데, 1학년 때 교양 수업 하면서 들었던 말인데…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 기억이 잘 안 나.”

“…왜 그런 걸 생각해요? 쓸데없이.”

승현의 경험주의자다운 말을 했다.

“아… 생각이 안 나. 날 듯 말 듯 한데….”

은우가 눈을 찡그리며 답답해서 불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은우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을 주고받았다. 승현은 정말 은우와 부부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샐쭉 웃으며 승현은 바람처럼 가벼운 손으로 은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이 작은 머리로 무슨 그렇게 여러 가지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쓰다듬는 손길에도 아랑곳없이 은우는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생각 안 나면 어때. 어차피, 변하는 건 없어요.”

“그래도… 떠오를 듯 말 듯 하니까… 답답하잖아.”

슬금슬금 얼굴을 은우에게 가까이 가져가며 승현은 은우의 입술 위로 입술을 덮었다. 은우의 입술을 깊게 핥으며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승현은 은우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은우의 양손을 침대 위로 올려 누르면서 동시에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웠다.

손가락에 감기는 오묘한 감각에 은우의 목에서 갸르릉 소리가 울렸다. 승현의 혀가 거침없이 입속으로 파고 들어가 말랑거리는 혀를 감아쥐었다.

혀가 얽히면서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키스하는 건지 섹스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승현은 입술과 혀를 부단히도 빨아 자극했고, 아침부터 넘치는 정력을 쏟아내는 승현은 은우의 아랫배에 성기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아침이라서 승현의 성기가 부풀어 있었다.

“으음…….”

적나라한 움직임 때문에 은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츄릅, 쪽, 추릅, 쫍…. 쉬지 않고 혀를 놀리는 승현은 은우의 입술을 지나 턱 끝을 핥다가 목선에 입술을 가져가 대었다. 혀로 할짝대는 간지러움을 느낀 은우가 깍지 낀 손을 꽉 움켜잡았다.

“단추… 입으로 풀어 줄까?”

승현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서늘하게 웃으며 은우에게 속삭였더니, 은우의 반응이 귀여웠다.

“…뭐? 아침…부터.”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웃음을 짓는 승현을 보며 은우가 대경실색했다. 승현은 정말 단추를 입술로 물었고 맹수처럼 이로 잡아 뜯어 벌렸다.

툭, 단추 하나가 뜯어졌다. 투둑, 두 번째 단추가 뜯어지는 난폭한 소리가 났다. 이 소리는 은우도 기억하고 있던 소리였다.

“스, 승현아…….”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평평한 가슴골에 승현은 입술을 내렸고 혀로 핥으며 놀렸다.

“아앗, 아아…….”

새벽부터 거칠어지는 숨을 퍽퍽 뿜어내며 은우은 허리가 들썩거렸다.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배 속이 간질거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오므렸다가 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은우는 점점 시야가 하얗게 변할 정도의 아찔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야, 너희 언제까지 할 거야? 설마 이 새벽부터 끝까지?”

청량한 목소리에 은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니 문 앞에는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건지 모를 정윤이 어이가 없는 너털너털한 웃음으로 팔짱을 끼우고 있었다. 정작 정윤도 이 새벽부터 출근하려는 건지 말끔한 슈트 차림을 한 채 목청을 가다듬었다.

“적당히 그만하지? 이럴 줄 알고 엄마가 올라오겠다고 한 거 내가 올라왔는데, 다행이네.”

정윤은 콧잔등을 검지로 살살 긁으며 멈추지 않을 듯한 두 사람을, 아니 정확하게는 승현을 보며 말했다.

“하아, 비… 비켜, 봐…. 좀… 하읍!”

은우가 몸을 비틀어 승현의 입술을 힘겹게 피하며 밀어냈다. 하지만 승현의 큰 몸을 밀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아 은우는 아등바등했다.

승현은 달갑지 않은 방해를 받은 탓에 은우의 입술에 진하게 입을 맞추다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어차피 정윤에게 숨길 것도 없다는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은우와 만나도 좋다고 확답을 내려주지 않은 변 회장을 대신해 정윤 앞에서 시위하는 모양새였다.

아연실색하며 정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승현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나 참고로 노크했다. 너희 둘이 못 들은 거지.”

승현은 노골적으로 정윤에게 방해하지 말라는 어투로 물었다.

“형님, 용건이 무엇입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나가라. 정윤의 귀에 들린 말이 그랬다. 어깨를 으쓱했다.

“일품 그룹 비서실에서 너네 A&C 비서실에 연락했어. 아버지…. 아니 회장님은 벌써 회사 나가셨고, 나도 지금 나가봐야 해. 너희 둘이 사고 친 거 수습하러 가야 하거든.”

문득 은우는 궁금해졌다.

“형 근데 사, 사고는 나랑 승현이가 쳐, 쳤는데…. 왜, 형이랑 아빠가 수습해?”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정윤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익살스럽게 웃었다.

“잘 생각해 봐. 아- 진짜 가 봐야겠다.”

“정윤 형!”

승현은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걸 생각하는 은우가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내 새끼 잘났다, 우쭈쭈. 그런 기분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허를 찌른 질문이었다. 단순히 은우를 꾀어 하룻밤 찐하게 보냈는데, 마치 커다란 일이라도 난 것처럼 변 회장과 정운은 움직이는 게 묘했다.

“어제 그랬지? 아버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 각오하라고. 아마… 이번 일은 아버지, 아마 크게 엮으실 계획이시더라.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다.”

어린아이들에 불과한 두 사람을 보며 정윤은 피식 바람 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크…게?”

은우는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응, 그래서 아버지가 미리 너희 둘 알고도 손쓰지 않으셨던 거 같아. 뭐, 나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버지가 하실 생각이신지는 모르지만…. 아, 이제 그만 가야겠다.”

정윤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승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단하게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는 건, 긴장하고 있으라는 거야! 너가 생각하는 장르보다 스케일이 커졌으니까. 그 마음의 준비는 아침부터 내 동생 잡아먹을 준비가 아니고. 그럼 간다.”

정윤의 말대로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스케일이 커졌다. 승현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살살 꼬드겨서 자빠뜨렸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 승현도 예상하지 못했고, 똑똑한 은우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  ✻  ✻

꼭두새벽부터 출근한 아버지와 정윤, 그리고 어머니도 바쁘게 출근하고 나니 이 넓은 집에 은우는 혼자 남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졸졸 쫓아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승현이 있었다.

“너 진짜 집에 안 갈 거야?”

“허락받을 때까지 옆에 붙어 있겠다고 했는데, 당연히 안 가야죠.”

“그래도…….”

기분 좋게 샤워를 끝내고 나온 승현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괜찮아요. 저는…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이 많아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부모님이 걱정 안 해?”

“한두 살 먹은 애인가?”

은우가 밉상이라는 듯 눈을 흘기면서도 승현에게 옷을 건네자 승현은 챙겨 준 옷을 몸에 대 봤다. 신장 차이로 보나 체격 차이로 보나 은우의 옷이 전혀 맞지 않아 정윤의 트레이닝복을 꺼내 주었다.

정윤의 옷이었지만 승현에게 꽉 끼게 맞았다. 은우는 조금 꽉 맞나 싶어서 승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금 더 큰 옷을 찾으려 옷방을 기웃거렸다.

“근데… 너 왜 또 기분 나쁘게 웃어?”

눈을 가늘게 뜨고 은우가 물었다. 승현은 코를 찡긋하며 안면 근육이 웃고 있었다.

“왜냐니요. 형이랑 똑같은 냄새 나잖아요. 이참에 나도 샴푸랑 보디 워시 형이랑 똑같은 거로 바꿔야겠어요.”

미친놈 같아서 은우는 이제 대꾸할 여력도 없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승현은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아, 바꿀 필요도 없이 같이 살면 되겠네. 오늘부터 여기서 살아야지~ 어때요?”

아연실색하며 은우는 하필 저런 모자란 놈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똑똑-

음흉한 눈초리를 한 승현이 점점 은우에게 다가오는데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해 주는 노크 소리가 들려 은우는 냉큼 대답하였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은우를 포함해 온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의 사적인 스케줄을 꿰고 있는 집사였다. 그는 집안의 모든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로 집안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를 정원수를 관리했고,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을 고용하고 관리까지 하기도 했고, 또 집으로 오는 편지와 고지서 등등 업무를 맡아서 하는 등, 전반적인 집안일을 했다.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 네…. 지금 내려갈게요.”

말을 마친 중년의 집사는 뒤를 돌아 나갔다. 손에 들려 있는 고지서를 보며 그는 심각한 표정을 했다.

“가, 가서… 밥이나… 먹어.”

“그거 알아요?”

“뭐가?”

“형 진짜 귀여운 거.”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는 표정을 짓는 은우를 보며 승현은 픽- 웃는 얼굴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키에 비래 작은 은우의 손을 덧그리며 식당으로 끌고 내려오는 승현은 손가락으로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형은 손이 왜 이렇게 부드러워요? 생크림 같아, 폭신폭신하고 그래. 키에 비해 엄청 작아.”

“…응, 나 손이 좀 작아, 콤플렉스까지는 아닌데… 다른 친구들하고 손 크기 대 보면 내가 제일 작은 편이야. 너는 너무 큰 거 아니야?”

“난, 다 크지…. 손만 커요? 거기도 크지, 내가 좀 큰 사람이죠.”

“뭐라는 거야.”

민망하게 은우가 손을 빼내려는데…….

“아니, 나 되게 마음도 큰 사람이라고요. 훌륭한 사람.”

“뭐?”

“무슨 생각 한 거예요? 야하게. 귀여워, 그런 오해도 하고. 그럼 거기도 큰 사람은 사랑받는다던데…. 나 그럼 형한테 사랑받나?”

“…….”

은우는 말을 잃었다.

“뭘 또 그렇게 쑥스러워해요?”

“너 진짜…….”

“아니, 형 반응이 너무 귀여우니까… 참을 수가 없네.”

투닥투닥 하는 사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음식들 보는데 배고프다, 형은 괜찮아요?”

“음… 그러고 보니까 좀 배고픈 거 같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의 음식을 보고 승현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눈을 반짝이며 승현은 입맛이 도는지 식탁으로 달려가 앉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거의 아무것도 입에 음식물을 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그건 은우도 마찬가지여서 은우는 승현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게 눈 감추듯 차려진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먹는 것에 집중하니 식기가 부딪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며 대화가 잦아들었다.

은우는 오랜만에 식욕을 느꼈다. 부지런히 젓가락과 숟가락을 움직이며 입속으로 음식을 옮겼다. 늘 약 때문에 식욕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절반도 못 비울 밥그릇의 밥을 거의 다 비웠던 이유가 은우는 어제 이후 아직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원체 적은 양을 먹던 은우는 금방 젓가락과 숟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대비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은 승현은 우걱우걱 한 그릇을 벌써 다 비우고 일하시는 아주머니를 향해 넉살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차려 주신 요리들이 너무 맛있어요.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일하는 중년의 여성이 먹음직스럽게 먹는 승현을 보며 입가에 흐뭇함을 감추지 않은 채 고봉밥을 퍼서 건넸다. 승현은 2차전에 돌입한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음식을 대하며 제가 좋아하고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음…….”

어느 정도 배가 부른 은우는 가만히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승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내 얼굴에 밥풀 묻었어요?”

은우의 시선을 느낀 승현은 입속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켜 물었다. 은우가 고개를 가볍게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너처럼 먹어야 키가 컸을까? 그 생각 했어. 너처럼 잘 먹어야 크는 거였구나… 뭐, 그런?”

승현은 물컵을 들어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씩 웃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형, 혹시 알아요? 지금부터 잘 먹기 시작하면 커질지? 남자는 스물다섯 살까지도 큰다면서요.”

키 작은 자신을 놀려 대는 것 같아서 승현을 노려보는 은우는 이제 배부르다는 듯 젓가락을 식탁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어? 다 먹었어요?”

“응, 난 다 먹었어.”

승현은 목을 쭉 빼서 빼꼼하게 은우의 그릇 안을 보았다.

“아직 조금 남았는데?”

그러자 승현은 허겁지겁 밥을 퍼먹자 은우는 물을 마시면서 웃는 소리를 냈다.

“같이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처음 승현이 조르고 졸라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은우는 이제 추억이 된 기억이 미소 짓고 있는데 승현도 같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눈이 마주쳐 서로 웃고 말았다.

“좀 더 먹어요. 그러니까 비실비실하지.”

“근데 오늘 정말 많이 먹었어.”

은우은 승현에게 말하더니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향해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쪼르르 작은 키의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이고, 은우 학생. 내가 지금까지 일하면서 본 것 중에 오늘 제일 많이 먹었네! 매일 이만큼씩만 먹어도 좋겠어-”

은우는 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노력해 볼게요.”

사실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지만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을 기다려 준다고 했으니 자리를 지키고 앉은 은우는 승현을 지켜봤다. 승현은 부지런히 두 그릇째 밥을 비워 나갔다. 가만히 승현을 응시하는 은우는 먹성 좋아 보이는 그가 제법 귀여웠다.

부른 배를 살살 쓰다듬는 승현은 식당을 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으으- 배부르다.”

은우도 승현을 따라 하며 말했다.

“나도 배불러.”

“아니, 그거 먹고 배가 불러요? 나만큼은 먹어야 배가 부르지.”

“나 오늘 진짜 많이 먹은 거야.”

“평소에는 얼마나 적게 먹는 거예요?”

“글쎄… 아주머니가 꼭 많이 먹으라고 밥을 많이 퍼 주신단 말이야. 늘 반 그릇도 다 못 먹었는데.”

승현은 은우의 식성의 문제는 아마 약의 부작용이 있었으리라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맨날 그만큼씩 먹어?”

“당연하죠. 그만큼 먹어 줘야 힘을 쓰지…….”

마지막 말은 승현은 일부러 은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응? 너 뭐 힘쓰는 일 해?”

학생이 공부만 하면 되지, 무슨 힘쓰는 일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푸하핫-”

승현은 배를 잡고 어깨를 들썩이게 웃으며 말했다.

“형, 눈치도 빠르고 머리로 나보다 훨씬 좋으면서 이런 비유는 몰라요? 이과라서 그런가? 문과 감성이 없네.”

“뭐?”

“섹스요.”

“…….”

배부름을 만끽하고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은우는 보다 만 책을 집어 들었고, 승현은 방에 놓인 TV를 틀었다. 기어이 승현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여 이제 은우도 집에 가라고 말하기를 포기했다.

나른한 오후의 여름 햇살은 뜨거웠다. 여름을 불태우는 태양은 맹렬하게 타올랐다.

시험이 끝나 여름방학에 돌입한 대학생들은 백수나 다름없었다. 깜빡 책을 보며 꾸벅꾸벅 잠들어 버린 은우의 가는 손가락이 보던 책을 놓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툭.

은우가 책을 보기에 승현은 소리도 없이 축구 중계 화면을 보다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더니 은우가 소파에서 편안하게 기대 조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러니… 나한테 잡아먹히지.”

웃는 얼굴로 승현은 은우를 안아서 침대에 눕히려고 하다가 행여나 은우가 깰까 봐 포기했다. 대신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작은 모포가 있다면 덮어 주려고 방을 구석구석 찾아 포근한 담요를 꺼내 은우에게 덮어 주었다. 작은 은우의 머리가 소파에서 미끄러지며 기울어지기에 승현은 곁에 앉아 어깨를 내어주었다.

승현은 은우와 같은 모포를 덮고 잠든 숨소리를 들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며 포근하게 함께 모포를 덮고 승현도 이내 잠에 빠졌다.

두 사람은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을 지금 보충이라도 하듯 소파에 머리를 서로 기대며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환한 태양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사라지고 나서도 승현과 은우는 깨지 않았다.

✻  ✻  ✻

늦은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 되자 집 안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나기 시작했다. 발을 내딛는 쿵 소리 뒤로 다른 쿵 소리가 들려서 여러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정원과 집을 들락날락하는 웅성거림은 제법 커졌고, 제일 먼저 청각이 반응한 은우가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 눈꺼풀을 밀어 올린 은우는 눈을 깜박거리며 시계를 확인하자 몇 시간을 꿈쩍도 없이 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승현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 몇 시간을 잔 거야….”

갈라진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몸을 덮은 모포는 승현이 어디서 용케 찾은 거로 보였다. 웃음이 지어졌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잠들었다고 생각하며 은우는 곯아떨어져 있는 승현을 보았다. 넓은 방에서 커다란 침대를 두고 불편하게 이렇게 있었다는 것이 쿡쿡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손을 뻗어 헝클어진 승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려고 조심히 몸을 기댔다.

똑똑-

그 순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은우는 황급히 놀라 손을 거두고 소리를 냈다.

“…아, 네!”

방문을 빼꼼하게 열며 들어온 건 정윤이었다.

“나… 들어가도 되지?”

인기척도 없고, 불 꺼진 방을 들어가기가 애매한 정윤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아침까지도 승현과 은우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 탓에 문을 활짝 열기 애매해서 신중함이 있었다.

“어? 형… 벌써 퇴근했어?”

“벌써라니! 이제 퇴근했다.”

은우가 벌떡 일어나려 몸을 들썩했다. 그리고 앞으로 살짝 숙여 소파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삐빅, 소리와 함께 방안의 불이 은은하게 켜졌다. 은우는 승현이 아직 잠들어 있다는 걸 배려해 조도를 약하게 낮췄다.

정윤은 말끔했던 아침과 달리 피곤한 얼굴을 하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방안으로 들어와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잤어?”

“아, 응…. 책보다가 잠들었나 봐.”

은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승현이도 자는 거지?”

정윤은 턱짓으로 승현을 가리키자 은우도 승현을 힐끗거렸다.

“그러네…. 아빠도 지금 오셨어? 승현이한테 아무리 집에 가라고 해도 안 가….”

은우가 손을 앞으로 모아 꼼지락거리며 정윤에게 향했더니 정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승현이 깨워서 준비하고 내려와.”

“응?”

정윤은 느슨해진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당겨 풀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동생인 은우에게 말했다.

“승현이 부모님 집으로 오실 거야.”

“무… 뭐?”

“기자들 요즘 뭐가 없어서 눈에 불을 켜고 기삿거리 찾아다녀서… 피하느라고.”

“아아… 응. 준비하고 내려갈게.”

정윤은 푼 넥타이를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목까지 채워진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며 은우의 방을 나섰다. 은우가 나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다 긴장한 얼굴을 하며 승현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살며시 승현의 어깨를 흔들며 깨웠다.

“승현아, 일어나…. 승현아.”

“으…응?”

잠이 가득 묻어 있어 잠긴 승현의 목소리가 목에서 울렸다.

“빨리 일어나봐.”

은우는 점점 잠에서 깨기 시작한 승현을 더욱 흔들어 깨웠다. 흔들리는 승현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흐릿한 은우를 바라보며 초점을 맞췄다. 승현도 졸린 얼굴을 했지만, 어딘가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자마자 은우의 손을 잡고 품에 안으려 말했다.

“아, 아침에 일어났는데 형 얼굴이 보여서 기분 째진다.”

“아침 아니고, 지금 밤이야.”

“매일 이 얼굴 보고 살아야지. 나 매일 깨워 줘요.”

“내 말 안 들리지?”

뜬금없는 소리로 승현은 아랑곳없이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다음번부터 이왕 깨우는 거 키스로 깨워 주면 한 번에 일어날게요. 그건 공주님 깨워 주는 건가?”

“…내 말 들려?”

“뭐, 내가 공주 하지 뭐. 형이 왕자님 하고. 알았죠? 다음번에는 여기 입술에다가 진하게.”

“…야, 이런 근육질의 공주님을 보면 좀 무서울 거 같은데?”

은우는 결국 승현에게 말려들었다. 원래 말하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보다 형이 더 공주역에 어울리죠. 그냥 내가 왕자님하고 매일 형 내가 깨워 줄게요. 엄청 야하게.”

“머리에 든 게 야한 거밖에 없지?”

“어… 형, 어떻게 알았어요?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은우는 좀 당황하라고 말했는데 승현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알려 줬으니까, 이것도 나중에 꼭 써먹어야 해요.”

어째서 무논리인 승현을 이길 수 없는가. 은우는 진지하게 연구를 아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승현은 자신의 매끈한 턱을 잡고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가 떨어졌다.

“진짜, 너……!”

은우가 통통 튀는 반응을 보였다.

“알았어요, 그만할게. 이따가 야심한 밤에 마저 해요.”

싱글벙글한 승현을 두고 은우는 그에게 이제 더는 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빨리 준비해. 너희 부모님 오신대.”

“우리 엄마 아빠가 왜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방금 형이 와서 알려 줬어. 빨리 준비하고 내려오라고.”

이제 다시 3라운드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승현의 머릿속에 파고들자 얼굴에 진지한 긴장한 빛이 깃들었다.

더불어 승현을 바라보는 은우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크게 벌어질 일인가. 하지만 은우는 묘한 두근거림이 불길해서 가슴을 길게 쓸어내렸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는 일도 아닌데…. 그저 젊은 혈기로 사고라고 하기도 뭐한 사고를 좀 친 것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일이 비약하여 커질 줄은 전혀 둘 다 예상하지 못해서 말도 없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승현은 트레이닝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고 왔던 옷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완벽하게 다리미질까지 되어 은우의 옷장에 예쁘게 걸려 있었다.

은우도 격식을 차린다고 해서 슈트를 빼입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줄근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서, 면바지에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여름인데 불구하고 이상한… 한기가 들어 은우는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형, 걱정하지 마요.”

승현은 은우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응? 뭐라고?”

“겁먹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요.”

승현은 은우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제일 믿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한승현이라는 인물인데 이상하게, 의지가 되어 은우는 고분고분하게 따라갔다.

역시 승현은 제집인 양 성큼성큼 걸어 2층 복도를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갔다.

거실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부담스럽게 큰 로비에 이미 승현의 부모님과 A&C 그룹의 비서로 보이는 두세 명의 각이 잡힌 사람이 있었고, 그들과 마주 보고 앉은 은우의 부모님과 정윤이 있었다.

정윤 뒤로는 일품 그룹의 비서실장과 수행 비서인 수 명이 자리해 있었다. 넓은 거실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건 오랜만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계단을 여유 있게 내려오는 두 사람을 힐끗거렸다. 은우는 낯선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자 낯가림이 일어나 움칫하는데 승현은 단단하게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거실에 발을 디딘 주인공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승현은 당당했고, 은우는 수줍고 어색해서 고개를 숙였다.

달그락거리는 차기가 거실의 소파 테이블에 인원수에 맞춰 놓였다. 승현의 부모님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죄인 같은 분위기로 앉아 있었고. 은우의 아버지인 변 회장도 소파 중앙의 상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 회사의 비서들과 비서실장은 두 회사의 총수 뒤로 우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섰다.

엄숙하고 딱딱한 분위기에 움츠러드는 은우는 이쪽저쪽 눈치를 보다가 분위기를 읽어 승현의 손을 풀어내려 힘을 주었는데, 승현은 꿋꿋하게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변 회장은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승현과 은우를 보며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근엄한 눈빛을 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대표님, 승현 군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자한 웃는 얼굴을 연기하며 변 회장은 승현의 아버지인 한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한 대표는 식은땀이 날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연락을 받으셨겠지만, 보시는 것처럼… 승현 군이 사고를 좀 쳤더군요.”

한 대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였다가 멋쩍게 웃었다.

“예, 회장님…. 아침에 비서와 변호사를 통해 연락을… 전달받았습니다.”

변 회장이 근엄하게 한 대표와 마주 본 반대편 소파에 느릿하게 손짓으로 가리키며 승현과 은우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여기 앉아라.”

만약, 사형 선고를 받는다면 이런 것일까. 은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굳은 관절을 삐걱대며 승현과 함께 소파에 허리를 내렸다.

두 사람이 앉는 모습을 보던 변 회장은 다시 한 대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내며 말했다.

“실은, 어제 승현 군이 와서 책임을 지겠다는 통에…. 자택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이렇게…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회장님.”

한 대표가 다시 죄지은 어색한 미소로 변 회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한 대표는 아버지의 눈으로 승현을 곁눈질로 노려보며 예리한 눈빛으로 야단을 쳤다.

설마 몇 달 전에 승현이 서재로 와 리조트 개발을 운운하고, 은우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때 이런 일을 꾸밀 줄을 한 대표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승현은 반성 따위 개나 준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어제 그 변 회장의 사람을 찢을 듯한 압도적인 분위기에 비해 아버지인 한 대표의 눈빛은 하나도 무섭지도, 겁이 나지도 않는다는 듯이 은우의 손을 재차 꽉 잡았다.

은우와 승현을 보던 한 대표가 입을 열었다.

“오늘 급하게 임원 회의를 통해, 회장님께서 주신 자료와 협의 사항은 긴급하게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희도 리조트 개발에 발뺌할 수가 없겠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변 회장은 소파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 양손을 주물렀다.

변 회장은 은우를 그 기업 파티에 참석하게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비록 승현이 은우에게 반한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변 회장은 원하는 것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우리 일품은, 늘 한 대표가 함께하기를 바랐지요. 아시잖습니까.”

“예에… 회장님. 회장님께서 많이 양보해 주셨습니다.”

두 기업의 총수 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일었다. 한 대표의 말에 묘한 갑을 관계가 성립한 듯 보였지만, 노련하게 변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로 양보라니요.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요.”

변 회장은 웃음을 머금은 입술로 찻잔을 들어 후루룩 차를 마시고 분위기를 바꿨다.

“이쪽에, 특히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는 한 대표야말로 적임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일품은 이 리조트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호텔 사업을 기반으로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보려고 합니다.”

“예.”

이번에 한 대표가 차를 입술로 옮겼다. 시간을 벌이는 한 대표는 머릿속으로 수지타산을 재고 있었다.

이미 한 대표는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룹의 몇 배 규모의 자본이 들어가는 투자의 위험이 컸기에 줄곧 사업 제안서에 사인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로서는 그룹의 운명을 좌우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한 대표는 그런 속내를 감추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이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던 각 회사의 비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윤은 새로운 넥타이와 새로운 셔츠를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모습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몸을 앞으로 뺐다. 아까의 피곤한 기색은 어디로 사라지고 눈을 반짝거렸다.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사업이란 때가 있습니다. 이 리조트 개발 건은 지금이 그때입니다. 방증으로 해외여행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고 있는 시점입니다."

정윤은 비서실장에게 손을 내밀자,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비서실장은 팔 옆에 끼워둔 서류를 꺼내 정윤에게 건넸다. 정윤은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변 회장과 한 대표에게, 그리고 A&C 그룹의 비서실장에게 서류를 건네고 그것을 펼치며 말을 계속 이었다.

“여기 보시면 불과 이십 년 전에는 가족 단위의 해외여행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십 년 전부터 폭증하는 1인 가구의 비율은 매년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양하는 가족도, 아이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장 보시죠.”

말소리도 없는 와중에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이 사람들은 일명 그루밍, 자신을 가꾸는 데 투자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나 자신에게 돈을 쓰는 게 아깝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서류를 바라보는 변 회장과 한 대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승현은 궁금해서 큰 키를 활용해 힐끔힐끔 곁눈질로 살폈다.

“이렇게 매년 급증하는 1인 가구는 이제 해외여행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에 맞물려 항공업계도 모두 노선을 늘리고 있습니다.”

목이 말랐는지 정윤은 물로 입안과 목을 적셨다. 긴장할 법도 했지만 정윤은 술술 막힘이 없었다.

“젊은 층의 1인 가구는 남들이 하지 않는 체험을 하기 원합니다. 그들은 이색적인 체험에는 더더욱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관광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항공업계도 그렇기에 지금까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항공업계가 우리 일품의 리조트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가만히 승현과 은우는 말을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분위기가 말을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실상 1인 가구는… 비즈니스 모델이 되지 않네.”

설명을 듣던 한 대표는 말을 자르며 예리하게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변 회장도 매서운 눈으로 정윤을 향했다. 정윤은 위촉되지 않고 그것도 예상했다는 듯 회심의 미소로 천천히 설명했다.

“그래서 이번 리조트 개발이 중요한 것입니다. 확실한 볼거리와 흔히 말하는 사치 산업은 그들의 니즈를 충족할 것입니다. 이색적인 경험과 더불어 레포츠, 그리고 휴양이 있다면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활용은 더욱 폭발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겁니다.”

서류를 팔랑팔랑 넘겨서 살펴보는 한 대표의 얼굴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변 회장은 한 대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변 회장은 줄곧 이 리조트 개발에 한 대표를 끌어들이고 싶었다. 한 대표는 부동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리조트 사업을 같이하기로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우연한 계기였지만 가기 싫어하는 은우를 억지로 참석시켜 그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변 회장의 손에 걸려든 건… 승현이었다. 그런데 변 회장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바로 승현의 행동력이었다.

은우도, 승현도 이쯤 되니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렸다.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부풀린 변 회장을 두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한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어제의 일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은우가 벌어진 이 상황에 대해 눈치챘다.

“……그렇지요.”

한 대표는 변 회장의 말에 수긍했다.

“승현 군은 이제 스무 살인데…. 벌써… 그 쓴맛을 알아야 뭐가 좋겠습니까.”

변 회장은 아주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한 대표를 압박했다.

“그렇다면…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그게 열쇠가 되느냐, 아니면 못 쓰는 카드가 되느냐는… 한 끗 차이지요. 그 열쇠를 날카롭게 연마해 무기로 휘두르는 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한 대표 뒤로 비서실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였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던 한 대표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예, 회장님. 말씀하신 의견에 이의 없습니다.”

변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한 대표님, 비서실장을 통해 보도 자료는 우리 그룹 차원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시기가 언제가 좋겠습니까?”

“기한은 한 달 뒤로 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때까지면 충분히 한 대표님도 준비가 되실 것 같은데요.”

“좋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회장님.”

한 대표와 그의 비서실장은 잠깐 비밀스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변 회장과 비서실장도 속닥속닥 말을 주고받았고, 그건 정윤에게도 전해져 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과 은우는 자신들을 불러 놓고 된통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이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 엉겁결에 두 아버지의 회담을 경청하는 은우와 승현은 말 한마디 껴들지 못하고 힐끗 서로를 보았다.

이건 마치…….

은우는 정윤을 힐끗 바라봤다. 정윤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에서 제일 패기가 넘치던 승현도 지금 굴러가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답답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두 그룹 총수를 바라보다가 말을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두 아버지들은 전혀 승현에게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고, 서로 심각하게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심오하게 주고받았다. 아버지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금의 단위가 가볍게 억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던 두 아버지들은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와 정책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게 사업체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말로 협의하더니 말을 마쳤다.

바보처럼 승현은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며 움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마치…….

이야기를 주고받던 변 회장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모든 것이 해결된 표정으로 승현과 은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현 군, 후회하지 않는다 했지?”

승현은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그리고 느릿하게 확신에 찬 고갯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장님.”

분명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변 회장은 말했다.

“그럼 둘이 결혼해. 이미 한 대표와는 얘기 끝났다.”

두 사람은 사고를 친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냥 서로 좋아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너무 좋았는데…. 그 결과가 몇십조 원의 사고였다.

그래서 두 그룹의 총수는 두 사람을 불러다 놓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은우와 승현에게 달린 경제의 규모가 수십조 원이라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한 대표가 변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버지들은 철저하게, 어떤 일도 이용할 줄 아는 비즈니스 최적화된 인물들이었다.

한 대표는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라도 일품 그룹과 친인척으로 엮이면 리스크를 훨씬 뛰어넘는 과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다줄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바라는 건 더 큰 효과를 바라고 있었다. 이 또한 한 대표의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일이었다.

승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폭죽이 되어 터졌다.

과연 이게 얼마나 큰 파장이고 상상을 초월한 일인지를 알게 된 건 훗날, 두 사람의 결혼 발표가 기사로 발표가 나던 날에 실감하게 되었다.

조금은 애매하고 웃긴 정략결혼이 되어 버렸다.

“…아… 아빠!”

은우가 서서히 선명해지는 상황 속에서 굳었던 입술이 움직이면서 변 회장에게 향했다. 이건 만나라 말라, 라고 하는 차원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겨, 결혼이라니요!”

은우는 생각했던 범위가 아니었다. 정윤이 방에 들어와서 모호하게 했던 말들이 새로이 떠올랐다. 긴장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는 장르가 아니니 각오해야 한다. 은우는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 승현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일은 만나도 좋다, 아니면 헤어져라, 다시는 만나지 마라. 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행여 헤어지라고 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예상 문제를 뽑듯이 생각했는데…. 이건 그 모든 차원을 비약한 내용이었다.

“너네 둘이 멋대로 굴었으니, 그 대가로 이 정도는 생각 안 한 건 아니겠지?”

“…….”

어젯밤에 변 회장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이…. 은우는 곤혹스러움에 파리하게 떠는 안면 근육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말아 쥐었다. 힐끗 승현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 옆에 붙어 앉은 그를 올려다봤다.

“회장님.”

진지한 남자의 목소리로 승현은 입을 열었다. 은우는 아무렴 승현도 이렇게 될 줄 몰라, 싫을 것이라 은우도 납득했다. 승현의 온몸을 이용해 진동시킨 목소리가 낮은 파동을 일으키며 넓은 거실을 채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존재감을 뿜어내는 승현은 어린 나이답지 않았다.

승현은 말을 하고도 가슴이 떨려 길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위기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엄중하고 심각하다고 느꼈지만 억누르지 못하는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해 승현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만개하고 있었다. 무거웠던 목소리도 같이 들뜨기 시작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거실의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승현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승현의 변화를 감지한 변 회장과 한 대표의 눈빛이 움찔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저는 대찬성입니다.”

승현은 딱, 철딱서니가 없이 말했다.

“그래서 저희 결혼은 언제 합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내일 당장이라도 좋습니다.”

“야… 좀…….”

승현은 바보인 건지, 상황 파악을 못 한 건지 은우가 승현의 손을 잡아 말렸다. 승현의 말에 놀라서 은우는 턱이 빠질 듯한 충격을 받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지만, 한승현은 기쁜 듯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다시 한번 은우의 삶이 바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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