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데이트?(1)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 버린 요트 위의 사건이 결혼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난 뒤였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했던 승현은 만남을 허락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결혼이라는 허락을 받아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승현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순순히 집으로 돌아갈 인물이 아니었던 승현은 한바탕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것을 겨우 잡아끌어야 했다. 이제 결혼할 거니까 은우랑 여기서 살겠다고 난리 통을 피우는 탓에 은우와 한 대표만 난감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조련사 은우가 귓속말로 “얌전히 돌아가지 않으면 아빠한테 말에서 결혼은 없던 거로 할 거야.”라고 협박을 하니, 그제야 승현은 정색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을 떼었다. 그러면서 승현은 은우에게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소리를 남겼다.
그 모든 일이 거대한 파도처럼, 해일처럼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되어 은우를 집어삼켰다.
어느 때 영화 트레일러를 본 적이 있었다. 산처럼 높은 해일이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하는 영상이 떠올랐다. 지금 은우가 처한 기분과 상황을 딱 대변했다.
은우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큰 파도에 휩쓸리는 흐름은 헤엄쳐 벗어나지 못했다. 벗어나기에는 늦어 버렸다. 은우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끔 은우는 자리에서 서서 멍하게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해야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건데? 이게 아니잖아?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당혹스러운 건 은우 혼자만이었다. 정윤의 서재 문에 매달려 노크하며 은우가 정윤을 찾았다.
“형, 바빠?”
“아, 은우야.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정윤은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신경을 집중하다가 시선을 떼었다. 은우는 미끄러져 서재로 들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형, 어떡하지? 나…….”
“아아.”
모든 것이 당황스러운 은우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행동을 정윤은 알아차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정윤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책상에 팔을 올리고 깍지를 끼다가 말했다.
정윤은 은우에게는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덕분에 정윤은 회사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지는 초석이 되었다. 사업은 마치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세계에서 정략결혼은 흔한 거야. 그 어떤 계약서보다 강력하니까. 수백 년 동안 사라지기는커녕 지금까지도 이용해 왔던 거고…. 사실 아버지하고 어머니도 그렇잖아?”
“그런데 나는 좀 겁나, 형….”
“뭐가 그렇게 겁나?”
자신의 꿈을 잃어버릴까 그것도 겁이 났고, 한 번도 살면서 진지하게 결혼이라는 걸 고려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것도 겁이 났다.
은우의 대답이 없자 정윤은 큰일이 아니라고 하듯 말을 이어 계속했다.
“그런데 다행히, 너희 둘은 서로 좋아하는 거 맞잖아?”
“응, 그런데 형…. 나 대학원 갈 수 있을까? 나… 신약 개발 하고 싶은데….”
“당연하지. 은우 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해줄게.”
은우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정윤은 은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은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데 철딱서니가 없는 건지 승현은 하루가 멀다고 은우의 집 앞에서 어깨춤을 추며 벨을 눌렀다. 이제는 허락을 맡았으니, 승현은 감추지 않고 대놓고 은우와 만나기 시작했다.
결혼이 결정이 난 주말의 오후였다. 나른한 여름날은 더웠다.
은우는 겨우 진정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한적한 방학을 느끼며 평소와 다름없이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종이가 손가락에 만져지는 기분이 좋았다. 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는 평화였고, 기분이 좋았다.
채광이 좋은 창문에 쿠션은 끌어안고 가벼운 책을 들고 보는 것이 은우의 취미였다. 혼자서는 아무런 결정을 할 수 없었던 은우가 가질 수 있던, 그리고 할 수 있던 몇 가지 안 되는 취미 중의 하나였다.
똑똑. 은우의 여유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책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소리를 냈다.
“네.”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방문을 노크한 사람은 은우도 잘 아는 집사였다. 단정하고 입이 무거워 보이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승현 군이 찾아왔습니다.”
“…정말요? 휴- 네에, 지금 내려갈게요. 거실에서 기다리라고 해주세요.”
“예.”
집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은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책에 책갈피를 걸고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얇은 바지와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은우는 가느다란 팔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2층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사뿐히 내려오니 승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계단 앞에서 순수한 얼굴을 하고 미소 짓고 있었다.
“형!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처음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는 승현의 미소와 모습이었다. 잘 차려입은 승현은 한걸음 은우에게 다가갔다.
“어제도 봤잖아.”
심드렁하게 은우는 반응했다. 컴퓨터 자판이 있었다면 이모티콘으로 ‘-_-’을 찍어냈을 법한 표정이었다.
“어제보다 잘생겨지지 않았나? 오늘 나 머리에 힘 좀 줬는데.”
은우의 반응이 익숙한 승현은 개의치 않고 머리카락을 쓱 쓸어 넘기는 CF 속의 포즈를 취하며 으스댔다.
그 모습에 은우는 결국 무표정이 풀어지며 핏- 웃음을 지었다. 은우는 큰 승현의 손을 잡고 현관문 밖으로 향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이 닳도록 찾아오는 승현은 변하지 않았다. 승현의 태도를 보며 은우는 안심이 되었고 좋았다.
커다란 저택이라 부를 수 있는 집에 조성된 정원은 어느 공원 못지않았다. 여름의 햇살이 뜨거워 은우는 손바닥을 팔랑팔랑 부채질하며 함께 산책하며 걸었다.
“오늘도 진짜 덥다. 아직 초여름인데 이렇게 더워.”
“맞아요. 여름은 좋은데 싫어, 형은 언제가 제일 좋아요?”
“나? 딱히… 좋고 싫은 날 생각 안 해봤어. 넌 뭐 그런 거 생각해?”
“은우 형 너무 낭만이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로 낭만을 찾아?”
“보통은 그런 법이라고요. 기분 좋은 날 좋아하는 사람이랑 데이트도 하고. 그나저나 우리는 데이트 언제 해요?”
은우는 철부지 없는 소리에 대답도 없이 옅게 웃었다. 자박자박 모래알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잔디밭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었다. 은우의 발걸음에 맞춰서 승현은 걸었다. 말할 때 욕설이 섞이는 승현의 거친 입담과 달리 은우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맞다…. 너 이제 집에 찾아오지 마.”
은우가 승현을 앞질러 걸으며 말했다.
“왜 또, 그래요…….”
이번엔 승현이 은우의 앞을 가로막았더니 은우의 단호한 눈빛과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나 내일부터 다시 학교 갈 거야.”
승현은 의아한 얼굴로 큰 눈을 껌벅껌벅하며 되물었다.
“방학 아니에요?”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키 큰 승현을 올려다보는 탓에 여름의 햇빛이 아플 정도로 들어오자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응, 그런데… 이제 곧 졸업이고…. 졸업 논문 쓸 주제도 생각해야 하고, 대학원 준비도 해야 하니까.”
“아- 형 신약 개발 한다고 했죠?”
승현은 손을 들어 은우의 눈가에 손바닥을 펴서 차양막처럼 만들어 주었다. 은우는 한결 편안해진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표정이 풀어졌다. 승현은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예전처럼 싫다고, 꼴 보기 싫다고 하는 이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런 거라면 내가 매일 데려다줄게요.”
은우는 민망해서 몸을 살살 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뭐, 그때는 정말 싫었으니까……. 그랬지.”
대답하는 은우가 민망한지 입술을 부루퉁하게 오므리며 시선을 피했다. 승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야릇한 미소로 말했다.
“지금은 안 싫잖아요.”
“어……?”
바보처럼 은우는 승현을 응시했다. 은우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승현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승현이 만들어 주던 차양막이 사라지고 이제는 승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근데 형… 나 갑자기 너무 억울해졌어요.”
“뭐가?”
“형이랑 결혼하는 거…….”
은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하긴 승현은 이제 스무 살이었는데, 갑자기… 정략결혼이라니 억울할 법하겠다고 은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은우는 그를 배려해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금방 소심한 은우는 침울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아빠한테… 말해서… 파, 혼…하자고….”
“하기만 해!”
버럭 승현의 큰 눈이 무섭게 도끼눈을 하며 윽박을 낮게 내질렀다. 은우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혼을 낼 때마다 낮게 소리치는 것과 닮아 있어서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런 게 아니고 형, 우리 아직 못 해본 게 너무 많은데. 연애 말고 결혼이라서 억울해요.”
이제 웃는 얼굴로 승현은 음흉한 미소로 말했다. 알게 모르게 은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뭘 못 해봤는데?”
데이트, 라고 해도 해본 적이 없는 은우가 물었다.
“그럼 지금 해도 돼요? 못 해본 거, 나 지금 하고 싶은데.”
“뭘 할 건데?”
은우가 머리를 굴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거…. 눈을 굴렸다. 고민하는 은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승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 십 분 동안 데이트하면서 못했던 거.”
낮은 그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폐를 진동시킬 것 같은 울림을 받은 은우가 정신을 차리며 되물었다.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이제 고개만 끄덕이는 승현은 재빠르게 은우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과 입술의 거리가 1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속삭였다.
“키스요.”
“아……!”
너 너무 가까워. 은우가 말도 하기 전이었다. 승현은 은우의 볼을 가볍게 쥐고 입술을 부딪쳤다. 은우가 몸을 뒤로 뺐지만 승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순전히 키스가 하고 싶어서 승현은 온갖 말을 가져다 붙였다고 생각했다.
은우는 시야에 가까이 크게 잡힌 승현을 보다 스르륵 눈을 감았더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십 분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한 가지 빼고.」
「그게 뭔데?」
「키스요.」
사실 키스는… 안 한 건 아닌데, 순서가 안 맞잖아, 라고 은우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은우는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손을 살포시 들어 승현의 허리에 올렸다. 능구렁이를 백만 마리를 배 속에 기르는 한승현은 이상하게 뭐든 능숙하고, 이상하게 풋풋했고, 다정했다.
음흉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저질스러운 야한 말도 잘하고, 또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어 곤란했지만.
입술이 닿아 숨결을 주고받았다. 혀가 얽히며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다. 머리맡에서 내리쬐는 태양과 누가 더 뜨거운지 겨루기를 하는 승현은 은우의 입술을 뜨겁게 점령했다.
허리에 올린 자신의 팔을 살며시 잡더니 승현은 목 뒤로 두르게 했고, 자신은 그 손을 풀지 않았다. 은우의 얇은 팔뚝을 쓰다듬는 승현은 천천히 손을 내려 허리를 잡았다.
음흉한 야만인은 능구렁이를 삶아 먹고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은우의 상체를 매만졌다. 특히 밋밋하고 마른 가슴으로 향하던 손길은 그곳에 멈춰 마른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결국 그 손길에 은우는 손을 풀며 입술을 떼어내고 승현을 노려봤다.
“야… 무, 슨 짓이야…. 거길, 왜 만져! 거기다, 못 해봤던 거라며!”
“에이, 세세한 건 집어치우고요.”
승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은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 가슴은 말라서 만질 때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부드러울까요?”
“…손 좀 치워.”
“내가 만졌던 그 어떤 가슴…보다 부드러운 거 같아.”
일부러 저급하게 말을 내뱉으며 음흉하게 웃는 승현을 은우가 곤란해하며 피했다.
“그… 그만…….”
“형, 벌써 느끼는 거 아니요? 내가 가슴 주무르는 솜씨가 좀 있다지만….”
은우가 승현의 손을 잡으며 눈을 흘겼다.
“…좀 놔. 진짜 이럴 때 보면 밉상이야.”
승현의 입을 한 손으로 막고 승현을 가볍게 밀어냈다. 승현은 장난스럽게 액션을 취하며 뒤로 밀려나 주니 은우도 웃음이 번졌다.
“그럼 형 엉덩이 만져도 돼요?”
승현은 용수철처럼 되돌아와서 끈덕지게 말했다.
“되겠냐? 진짜, 좀!”
“될 줄 알고 허락 맡았는데,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만질걸.”
은우가 아연실색하며 승현을 피해 몸을 돌렸다.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져 보자. 형, 그러면 고추는 만져도 돼요?
창피한 줄 모르고 승현이 제법 큰소리를 내니 은우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승현을 응시했다.
“야, 미쳤…! 자꾸 그런 헛소리 하면 이제 안 만나 준다!”
은우가 빽 소리를 쳤다. 하지만 당당한 승현은 손을 뻗어 엉덩이를 조물조물거리며 말했다.
“나도 만지게 해줄게.”
은우는 양 귀를 손으로 막으며 승현을 노려봤다. 은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결혼할 상대를 잘못 고른 듯싶다고, 말이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