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9)
* * *
‘웃기는 일이야.’
뭐가 ‘뱀파이어’고, 뭐가 수천의 갱들을 밑에 둔 거대 갱단의 보스인가.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선 레이라가 생각했다.
현재 그녀의 부하들과 배신자들 또한 나름 치열하게 치고받고 있었지만, 그런 건 이 상황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레이라 그녀의 목숨과 ‘뱀파이어’의 향방은 ‘애쉬 론모어’와 ‘땅거미 부대’의 전투 결과에 달려있다는 것을.
“머저리 같은 놈들!!”
타앙! 타다당!!
빌레이가 소리치며 레이라 측의 갱들을 쓰러뜨렸다. 저쪽은 나름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무의미하다.
잠시 날뛰는 빌레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애쉬와 땅거미 부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의 아군이라고 볼 수 있는 애쉬 론모어가 이기길 비는 것밖에 없었다.
전에 없던 무기력함과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
“너희들. 어차피여기서 도망쳐도 '회사'인지 뭔지에서 가만두지 않겠지?그러니까 그냥 싸우고 여기서 죽어라.”
애쉬의 목소리에 레디엄의 얼굴 표정이 굳었다.
애쉬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
땅거미 부대는 대체로 특수 작전에 투입되는 부대였지만, ‘회사’에서 하나 둘씩 생겨나는 도망자들을 쫓는 사냥개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도망자들을 어찌나 끔찍하리만치 쫓는지, 그리고 그런 도망자들의 최후가 어떠한지.
자신들이 직접 명령받아 처리해왔기에 누구보다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시작을 했으면 무조건 끝을 봐야지.”
레디엄의 말에 애쉬가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끊어먹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애쉬의 거침없는 대답에 표정을 굳히고 있던 레디엄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직후 분위기가 급격히 가벼워졌다.
“하아…. 예, 뭐. 사실 제안을 하면서도 받으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상이 현실이 되니 씁쓸하네요, 하고 중얼거리듯 덧붙인다.
애쉬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그를 보며 생각했다.
‘곧 오겠군.’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뀔 때는 둘 중 하나였다. 완전히 포기했거나, 혹은 진짜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길 각오했거나.
그리고 저들이 지금까지 보인 모습을 감안했을 때 어느 쪽을 선택했을 지는 분명하다.
"그럼 아쉽게도."
투웅!
기습적으로 묵직한 발포음이 울렸다. 어느 새인가 레디엄이 들고 있던 권총의 총구는 애쉬를 겨누며 불을 뿜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느려졌다.
여타 권총들보다도 한참은 굵은 탄환이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여태껏 구경이나 하더니 이제야 제대로 할 생각이 든 건가.’
레디엄이 그를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굵은 총탄을 바라보던 애쉬는 ‘베이론’ 전에서 체득한 대구경 탄환 흘리기를 사용할 생각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대기를 꿰뚫으며 회전하는 탄환이 검날을 타고 흘렀다. 애쉬는 불똥을 튀기며 검날에 올라탄 탄환을 보며 생각했다.
손에 걸리는 감각. 마음만 먹으면 이 파괴력을 거의 죽이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어디로 보내는 게 좋을까.
애쉬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주변을 살폈다.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보내는 건 전처럼 힘으로 쳐내는 게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노리는 건 측방이다. 주위를 살피던 그의 눈에 오른편, 자신들의 대장인 레디엄이 발포하자 자신도 뒤따라 총을 들어 올리고 있는 놈이 들어왔다.
‘저쪽.’
목표를 특정한 그의 칼날이 현묘한 곡선을 그렸다. 따로 배운 적도 없는 기술이었지만, 그의 몸은 본능에 따라 무엇보다도 완벽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날을 타오르던 레디엄의 대구경 탄환이 칼날의 흐름을 따라 그 방향을 바꿨다.
다시 시간이 빨라진다.
퍼억!
“크아악!!”
둔탁한 소리. 비경과 함께 총을 꺼내들던 놈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어지간한 중기관총 탄환보다도 굵은 대구경 탄환의 위력은 제아무리 사이보그의 팔이라도 견뎌낼 수 없었다.
설령 이식된 기계 신체가 견뎌내더라도 그것을 고정하고 있는 몸는 견딜 수 없다.
애쉬의 손끝이 짜릿한 감각에 떨려왔다. 이전처럼 무식하게 힘으로 쳐냈다면 결코 있을 수 없었을 파괴력이다.
이전 ‘방화광 루이스’와의 전투에서 한 단계 성장한 것을 지금 다시 느낀 애쉬였으나 그는 기분 좋은 흥분감을 느끼면서도 아쉬움을 삼켰다.
“아쉽네. 팔이 아니라 머리를 노렸는데.”
그가 원하던 대로 머리 쪽을 향했다면 팔이 떨어진 고통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머리통이 터졌을 것이다.
“동시에 접근해서 노려! 그리고 아뎀! 이쪽으로 와라!!”
“넷!”
애쉬가 믿을 수 없는 기예를 선보였음에도 흔들림 없이 명령을 내리는 레디엄. 그리고 아뎀의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둘이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애쉬는 굳이 그들의 말에 다급히 굴지 않고 오히려 장난치듯 응원했다.
“뭔지는 몰라도 열심히 해보라고.”
그래야 더 재밌어질 테니까.
애쉬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땅거미 부대의 대원들이 달려들었다.
*
칼을 휘둘러 달려드는 한 놈의 상체를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토막 낸다. 머리 아래로는 완전히 기계화된 모양인지 칼을 타고 흐르는 전류의 따끔한 느낌만 들 뿐, 피 한 방울 쏟아지지 않았다.
목이나 머리를 잘라 한방에 끝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으나 당장 달려드는 상대들이 많았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애쉬는 소리치며 달려드는 놈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의 초인적인 악력에 놈의 팔목이 찌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애쉬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쥐고 있던 검은 단검을 떨군 땅거미 대원이었으나, 그는 웃고 있었다.
티딕.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소음. 애쉬는 그 소리의 진원지인 남자의 손바닥을 바라봤고, 곧장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에서 쏘아진 바늘을 피했다.
무려 손바닥이 총구처럼 열려 투사체를 쏘아낸 것이다!
“피했…!!”
쿠웅!
깜짝 놀란 애쉬는 남자가 경악의 외침을 다 내뱉기도 전에 머리를 잡아 바닥으로 처박았다.
기계가 아닌 머리통은 그의 힘에 수박처럼 쉽게 부서져나갔다.
“깜짝이야.”
팔에 위험한 장난감을 달고 있네.
턱 바로 밑에서 발사된 바늘은 아무리 애쉬라도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흐아앗!”
놀라서 힘 조절을 잘못한 탓인지 머리를 부수며 뇌까지 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물컹함을 피와 함께 털어낸다. 그리고 그는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뒤편에서 찔러 들어오는 단검을 피했다.
“…!!”
몸을 돌리며 찔러오는 단검을 피한 애쉬와 그를 찔러 들어온 대원의 눈이 마주쳤다. 애쉬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확장되는 동공을 보며 웃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칼날이 춤춘다.
이미 십여 명의 사이보그들을 베어낸 칼날은 여전히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채 단검을 쥐고 있는 어깨와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투욱. 달려들 때까지만 해도 하나였으나 찰나의 순간 세 개로 나뉜 몸이 피 분수를 뿜어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참혹한 광경에 달려들던 대원들이 움찔, 하고 멈춰 섰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만든 당사자, 애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너무 느릿느릿하잖아. 좀 더 빠르게는 못해?”
“그래, 이 개자식아! 빠른 걸 원한다면 내가 보여주마!”
"오, 멋진데."
한 대원이 입고 있던 바지의 아랫단을 찢어 던졌다. 드러난 다리를 본 애쉬가 눈을 빛냈다.
푸른색 패스가 피부 겉으로까지 드러난 신체.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땅거미 대원들과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다르다.
그들의 것도 분명 값비싼 돈이 들어간 신체 부품이었으나, 저것은 척 봐도 그보다 한층 더 위에 있는 물건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다리에 드러난 패스에 시퍼런 빛이 차올랐다.
“간다!!”
퍼엉!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일순간 남자의 몸이 사라졌다.
그 소음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언가 작게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를 드러낸 대원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한 것이다.
20미터도 더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눈 깜짝할 새 칼날이 면전에 닿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반응속도로 고개를 돌려 피한 애쉬의 눈이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놀라움에 커졌다.
“뭔…!”
“흐아압!”
퍼엉!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한번.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애쉬는 이번에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집중했다. 그러자 점차 사고 속도가 가속하며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세상 속에서도 남자는 빨랐다. 어쩌면 애쉬가 움직이는 속도와 비견될 정도로.
‘진짜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다고?’
애쉬는 단검에 스쳐 따끔한 뺨에서 흐르는 피를 느끼며 검을 들었다. 달린다기보다는 폭발력으로 날아들고 있는 남자도 애쉬를 보고 있었다.
12레벨로 설정한 신체능력은 그 누구도 애쉬와 같은 세상을 보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 하나가 그와 같은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애쉬가 짓고 있던 작은 미소가 더없이 커져갔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애쉬는 자신만이 살고 있는 세계에 침입한 침입자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도 전력으로 반길 것이다.
그리고 적이라면 목숨을 걸고 싸워 죽일 것이다. 그런 뒤의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거세게 뛰는 심장. 애쉬는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검을 내뻗었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은 단검을 쭉 내밀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양측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콰가가가각!
검은 단검이 잘려나간다. 그리고 그의 정수리가, 머리가, 목이, 가슴이, 배가, 사타구니가.
거센 금속음이 울리며 두 갈래로 갈라진 남자의 몸이 애쉬를 사이에 두고 날아갔다.
애쉬가 짓고 있던 찢어질 듯한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있을지도 모르는 상대를 위한 일검.
그러나 한 수에 끝이었다.
남자는 땅거미 부대 내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였는지, 그의 몸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날아가는 것을 본 다른 이들의 표정에 경악이 깃들었다.
애쉬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아, 착각이었구나.
남자와 가까워진 순간 애쉬는 알기 싫어도 알 수 있었다. 그의 감각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다리를 드러내고 폭발적으로 가속하던 남자는 빨랐다. 어쩌면 애쉬와 비슷할 정도로.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했고, 애쉬가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애쉬가 뒤늦게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애쉬의 숙련도와 감각은 기계 덩어리 몇 개 달았다고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멋대로 기대했던 애쉬는 멋대로 실망해버렸다.
재밌는 장난감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그게 전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