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5. 후계경쟁(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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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그룹의 본사, 유성 타워는 엄청나게 크고 넓다. 정말로 엄청나게.
층수만 무려 160 층에 달하고, 각 층의 넓이는 주차장의 넓이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상시 근무 인원만 수천은 되는 건축물.
‘역시 유성그룹의 본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대한 빌딩이었다.
애쉬는 서령, 베일라와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안내용 시설표를 확인했다.
유성그룹의 본사라고 할 수 있는 이 빌딩에는 온갖 시설들이 가득했다. 호텔, 레스토랑, 백화점, 기술 연구소, 일반 사무실 등등.
외부 브랜드를 입점해야하는 백화점을 제외하곤 모두 유성그룹이 관리하는 곳들이다.
애쉬와 서령, 베일라가 가야할 곳은 그 중에서도 최상층에 위치한 유성그룹 최고위 임원 사무실. 유진혁 회장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셋은 곧장 로비의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는 층 중 가장 높은 곳, 120층으로 향했다.
띠링. 120층입니다.
층에 도착함과 동시에 안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는데, 서령이 엘리베이터의 패스에 사원증을 대자 그제야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애쉬가 그것을 조금 신기하게 바라봤다.
지구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이런 시설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비밀기지에 들어가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셋이 발걸음을 내딛자 각 엘리베이터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서령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유서령 상임이사님.”
“네.”
서령은 짧은 대답과 함께 그들을 지나쳤다. 뒤따르며 경비들을 훑어본 애쉬가 눈을 빛냈다.
확실히 유성 본사, 그것도 최상층 중요 보안시설의 경비라 그런지 수준이 좀 있어 보인다.
일전에 손봐줬던 용병들이나 전날의 검은 양복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 몸가짐, 발걸음, 호흡만 봐도 차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이렇게 느껴지는 것보다 더한 차이가 있겠지. 저 녀석들은 모두 유성에서 특별히 손을 쓴 강화인간이거나 사이보그일 테니.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재밌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묘한 감상을 떠올리는 애쉬와 다른 둘은 경비들을 지나 복도를 가로질렀다. 왼쪽으로 한 번 꺾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그리고 몇 분 걷다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꺾는다.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더럽게 복잡하네.”
120층은 워낙에 넓고 복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깔려있어 길을 모르면 한참을 헤매야 할 구조였다. 서령은 익숙한 지 잘 걷고 있었지만 과할 정도로 복잡한 모습에 애쉬가 중얼거렸다.
그에 베일라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위에 뭐가 있는지 알면 아마 당신이라도 제법 놀랄 겁니다.”
복잡한 건 복도뿐이 아니었다. 이 건물의 120층 위로는 그 아래층의 엘리베이터로 갈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 위층이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연구실과 회장, 그리고 부회장급 최고위 임원들의 사무실이었기 때문이다.
베일라는 120층까지 와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125층에서 다시 한 번 갈아타야 그 위층까지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그런 게 몇 층마다 다시 반복돼서 회장이 있는 곳까지는 엘리베이터를 두 번은 더 갈아타야 한다니, 얼마나 중요한 걸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애쉬에겐 그저 귀찮은 일이었다.
셋은 걸음을 계속해 다음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복도를 돌아보니 확실히 최고층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사람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1층에는 일반인도 많았는데, 여긴 남자고 여자고 정장을 잘 차려입은 이들만 가득했다. 애쉬가 입은 코트와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이 눈에 띌 정도.
심지어 서령과 베일라마저도 깨끗한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라 더욱 그랬다.
애쉬는 서령에게 인사하려다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슬쩍 물러나 피하는 남자를 보곤 자연스럽게 이곳을 거니는 베일라에게 물었다.
“그쪽은 여기 좀 와봤나 봐?”
“예, 가끔 연구소의 실험에 협력하고 있었으니까요.”
베일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서령을 통해 연구소에 줄을 댔고, 그로인해 바깥에 드러나지 않은 기술 수준의 파츠를 이식받을 수 있었다.
가끔 그들의 테스트에 따라 움직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지만 그녀가 장착한 파츠의 가치는 그런 번거로움 쯤은 가볍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아마 바깥의 용병들이나 군사 기업들이 베일라의 몸에 심어진 파츠들의 기술력을 안다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뭐, 인체실험 같은 것도 하나?”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필터 없이 바깥으로 나온 애쉬의 목소리에 베일라가 단호히 대답했다.
“유성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의를 위해 연구할 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실험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불법적인 건 잘만 만드는 것 같던데.”
애쉬는 아직도 자신이 팔에 차고 있는 물건을 생각하며 말했다. 에아임이 유성의 실험실에서 어떻게든 구해왔다던 물건.
시정부에서 설치한 AI의 인식 자체를 혼란시키는 물건은 절대로 적법한 물건은 아니었다.
“…확실히 불법적인 실험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어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 왜 난 아닐 것 같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베일라. 애쉬는 거기에 대고 가볍게 대꾸했다.
어디 게임 속에서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라는 놈들 중 멀쩡한 녀석이 있던가. 하나같이 다 정신이 나간 놈들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도 지금은 현실이지만 원래는 게임이었던 곳. 이곳에서도 음습한 무언가가 이뤄지고 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타죠.”
“예.”
베일라와 애쉬가 작은 목소리로 그런 대화를 나누던 중 서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상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는지 멈춰선 서령이 사원증을 패스에 대고 있었다.
삑. 어서 오십시오. 유서령 상임이사님.
스르륵. 부드럽게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언제 잡담을 나눴냐는 곧 입을 다문 애쉬와 베일라가 따라 타자 서령이 버튼을 눌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길 몇 초. 베일라가 서령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베일라는 지난 몇 년간 서령과 함께하며 유진혁 회장을 봤던 적이 있다.
그녀가 아는 유진혁 회장은 막둥이 손녀를 무척이나 아끼지만, 막상 진지하게 깊은 얘기를 나누려 한다면 여태껏 보여 왔던 따뜻함 이상으로 차가운 일면을 드러낼 사람이었다.
서령이 이번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회장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룹 내에서 일어지는 대소사는 모두 유진혁 회장과 그 비서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아침, 서령이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안부 연락 한 번 없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회장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부터 실행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유난히 아끼는 손녀에게도 일정 이상의 도움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손녀를 반기는 유서령의 조부, 유진혁이 아닌 차가운 피가 흐르는 기업가, 유진혁 회장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었으나 베일라의 눈에 지금의 서령은 다소 불안정해보였다.
“후우….”
그런 베일라의 걱정에 서령은 숨을 깊게 한번 내쉬고는 대답했다. 숨을 내쉬며 억지로 힘을 넣어 세웠던 발걸음과 어깨에서도 딱딱함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한 차례 몸을 릴렉스시킨 서령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금은.”
베일라의 걱정과 달리 서령은 생각보다 더 침착한 상태였다.
다소 감정이 가라앉은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이성에 날이 선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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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령은 전날 베일라가 손에 감아준 밴드를 바라봤다. 한 번 쥐었다 펴보니 아직 약한 통증이 감돌았다.
어제 서령은 처음으로 목숨에 위협을 받았고,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평생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그녀가.
애쉬가 빌려준 코트 위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척 누워있다 다가온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찔렀다.
그리고 이성을 잃고 쓰러진 남자의 몸에 단검을 계속해서 박아 넣었다.
쉴 새 없이.
자신의 손이 베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비록 그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행동이었으나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끝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지난밤에는 악몽으로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녀는 약간의 떨림과 두려움 정도로 그것을 기억했다.
직후에는 그 떨림과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고 자신을 찾아온 애쉬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지금도 시시각각 그 두려움은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이라는 것일까?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그녀는 정신적인 상처에 대한 회복이 빠른 편인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피가 이어진 가족을 둘이나 묻고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할아버지의 손녀딸이라서 그런 걸지도.
그런 농담 같지도 않은 생각을 한 서령이었지만, 그녀는 곧 애쉬와 베일라를 작게 입 꼬리를 끌어올려보였다. 자신은 정말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 미소는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침착한 상태예요.”
“…그래, 뭐. 아가씨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 서령을 본 애쉬가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지난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안색은 다소 초췌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베일라는 그런 서령의 미소를 보자 더 걱정되는 것 같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굳이 얘기를 길게 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셋은 엘리베이터를 갈아타며 계속 회장의 사무실을 향해 올랐다.
*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바로 안내해주세요.”
“예.”
“먼저 다른 두 분께서 지참하신 물건을 맡겨주시면 휴게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서령을 한 명의 가드가 안으로 안내하고, 다른 한 명의 가드가 애쉬와 베일라를 향해 말했다.
지참한 물건은 애쉬와 베일라, 경호원들이 갖고 있는 무기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서는 인가를 받은 물건도 들고 진입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까, 하고 애쉬가 자신을 바라보자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령을 한 명의 남자가 안으로 안내하고, 애쉬와 베일라를 향해 말한다. 지침한 물건은 애쉬와 베일라, 경호원들이 갖고 있는 무기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서는 인가를 받은 물건도 들고 진입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애쉬가 어쩔까, 하고 자신을 바라보자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괜찮아요, 애쉬. 휴게실에서 쉬고 계세요.”
“흐음…. 그래.”
어디 유성그룹 회장님이 이용하시는 층의 휴게실은 어떤지 구경이나 할까. 너스레 떤 애쉬가 정말 오랜만에 검을 몸에서 떨어뜨려 놨다.
그가 가드에게 검을 맡기고, 베일라도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를 하나를 꺼내 넘겼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쫓겨날 지도 모릅니다.”
“그쪽이나 소란피우지 말지, 아줌마.”
“그놈의 아줌마는…!”
“그럼.”
“아, 네.”
티격태격하는 애쉬와 베일라를 보며 살풋 미소 지은 서령이 둘을 두고 가드를 따라 걸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작게 걸려있던 미소는 희미해지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의 조부를 보러 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굳은 표정의 서령과 안내한 가드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검은 광택이 흐르는 원목 문.
가드가 문에 설치된 보안 장치의 버튼을 누르고 안에 기별을 보냈다.
“유서령 상임이사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들어오세요.
“예.”
달칵. 가드가 대답함과 동시에 문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다. 가드가 문을 연 채 바깥에서 기다렸고, 서령은 홀로 유진혁 회장의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사무실은 어느 임원들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당장 회장의 비서들이 사용하기 위한 사무용 책상만 무려 열 개가 넘어간다. 개인 사무실이라기보다는 한 팀이 사용해도 모자람 없을 넓이와 구조.
그 외에도 각종 사치스런 그림들과 장식품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이미 몇 번 와봤던 서령은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고 정면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그러자 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왔구나, 서령아.”
“…네, 회장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깔끔하게 정리했고, 진한 회색의 정장을 입은 채 사무용 책상 앞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성.
도저히 여든이 넘은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해 보이는 저 남성이야말로 이 거대한 도시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체, 유성그룹을 손에 쥔 거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