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5. 후계경쟁(9)
* * *
쏴아아…. 무거울 정도로 가라앉은 분위기. 욕실에서 울리는 물소리만이 암울한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고 있다.
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며 혼자 있길 두려워하는 서령 탓에 베일라가 함께 욕실에 들어갔고, 애쉬는 검을 손질하며 둘을 기다렸다.
“….”
스윽, 슥. 기름 먹인 천으로 검을 닦는다.
애쉬와 서령, 베일라는 결국 도로와 숲의 재밍 지역에서 벗어나 호출한 경호팀과 돌아왔고, 중간에 떨어진 에아임은 탐색 중이었다.
잠시 에아임의 얼굴을 떠올려본 애쉬는 검을 닦다 침음을 흘렸다.
“흠….”
솔직히 이번 사건에서는 자신이 호위라는 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귀찮아지는 것을 싫어해 비슷한 의뢰조차 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일까. 뒤돌아 생각해보면 이번에 그가 내린 판단은 결코 최선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야 무사하긴 했지만, 잘못하면 호위 대상인 서령이 해코지를 당할 뻔 했지 않은가.
홀로 떨어진 그녀가 운 좋게 스스로의 몸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 순간 의뢰는 끝.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애쉬는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적을 죽이는 일이라면 몰라도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드물게도 자신의 한계를 느낀 애쉬가 다시 검날을 닦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고. 샤워를 마친 서령과 베일라가 욕실에서 나왔다.
“애쉬….”
조금은 감정이 수습된 것인지 서령이 미안하다는 듯 애쉬를 불렀다. 멀리 가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의해 기다리고 있던 애쉬는 아직 씻지도 못한 채 앉아있었다.
“나왔네.”
서령의 죄책감어린 표정에 애쉬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머리를 말리지 않은 탓에 물기에 젖어있는 머리칼. 아파보일 정도로 창백한 안색.
외모가 외모다보니 그런 초췌해 보이는 모습도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호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건 이쪽인데 왜 자기가 더 미안해하는지.
어지간히도 여린 여자다.
“씻고 오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어.”
오래 기다렸다는 듯 베일라가 말했고,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은 미리 챙겨왔고, 옷가지를 든 채 서령과 베일라가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욕실에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둘이 사용했던 탓에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애쉬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샤워기를 틀어 몸을 씻었다. 여성들에 비해 그의 샤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 씻으니까 좋네.”
“빠르군요.”
“난 그쪽이랑 다르게 머리칼이 짧잖아.”
한 10 분 정도 걸렸나? 대강 시간을 돌아보는 애쉬의 상체에는 수건 하나만이 걸쳐있다. 그는 원래 오래 씻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좀 괜찮아졌나보네.”
애쉬는 씻고 나오자마자 대충 분위기를 살폈는데, 여전히 서령은 어느 정도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직 정신의 회복이 덜 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베일라는 뺨에 밴드를 붙인 채 몸 여기저기의 크고 작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애쉬는 그런 그녀를 슬쩍 보고 서령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아 몸을 묻었다. 한동안 적막이 흐른다.
그렇게 베일라의 손이 움직이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던 가운데, 어두운 기색의 서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애쉬.”
“왜.”
“내일, 회장님을 뵈러 갈 생각이에요.”
“그래?”
“네.”
유진혁 회장은 주말에도 회사에 출근했다. 서령은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손녀였으니 그냥 유성그룹 본사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나서 어쩌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가. 그 목적이다. 애쉬가 그것을 물었다.
서령은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었지만 그건 단순히 슬픔과 공포로만 이뤄져 있는 게 아니었다. 애쉬는 알 수 있었다. 유서령, 그녀는 슬픔, 공포만큼이나 큰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어째서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는지, 오로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런 한심하고 잡스러운 분노가 아니였다.
여태껏 안일하게 행동했던 자신, 혈육끼리 죽고 죽이려 하는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회장, 그리고 아직까지 행방불명 상태로 발견되지 않은 에아임.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
불안, 공포, 슬픔, 분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그녀의 분위기를 무엇보다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애쉬는 그것이 조금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아임이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이, 그녀가 더없이 상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드디어 그녀에게도 무언가 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회장을 만나서 어쩔 것이냐 묻는 애쉬에게 서령이 대답했다.
“물어볼 거예요.”
어째서냐고.
무엇보다 깊게 침잠한 목소리. 온갖 의미를 내포한 한 마디의 말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주말임에도 일찍 일어나 잘 차려입은 서령과 애쉬, 베일라.
셋은 곧장 경호팀과 동행하여 유성 그룹 본사로 향했다.
자율주행은 불안하다며 운전은 베일라가 수동으로 직접 했는데, 예전에 면허를 따놨다는 모양이다. 애쉬는 어째서 에아임이 그렇게 수동 운전에 집착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
“…네.”
에아임에 대한 얘기를 묻는 애쉬에게 서령이 대답했다.
여전히 에아임을 발견했다는 연락은 없었다. 살아있다는 연락도,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도 말이다.
아직 에아임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서령의 가슴은 타들어만 갔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그룹 본사 주차장까지 차를 몰아온 베일라가 말했다. 유성 그룹의 본사는 요즘의 빌딩답지 않게 지상에도 거대한 주차장을 두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족히 천 대는 댈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 크기도 크기지만 본사가 위치한 1구역의 땅값을 생각하면 바깥사람은 그 규모와 위세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금전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애쉬도 마찬가지였다. 널찍한 주차장과 그 안에 가득 주차되어 있는 최고급 차량들의 향연.
지구의 한국으로 치면 서울 중심가에 이만한 주차장을 만든 것이다.
하나하나가 최소 수만 크레딧은 될 법한 차량이 당장 보이는 것만 수백 대다. 빈민가에서는 길가다 하나 구경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는데, 이곳엔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지하 주차장까지 생각하면 수천 대는 될 텐데, 누가 이곳에서 누가 사고를 터뜨리기라도 하면 돈이 얼마나 깨질지 상상하기만 해도 아찔했다.
내심 감탄하는 애쉬. 그가 탄 차량이 차량이 주차장에 진입하려 하자 입구를 지키는 경비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유서령 님. 차량은 맡겨주시면 주차를….”
“아뇨.”
따로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서령이 탄 차량임을 알아보는 경비. 그의 호의를 서령이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의 그녀는 경계심이 짙어 누군가에게 뭘 맡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눈치를 살핀 베일라가 그런 그녀를 대신해 경비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아, 예. 주차는 VIP존에 하시면 됩니다.”
“예.”
대답한 베일라가 창문을 올렸다. 서령은 자신이 답지 않게 굴었다는 걸 알았지만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폭주했던 차량. 그것도 이런 식으로 방심했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너무 날 세우지마, 서령 아가씨.”
다시 전날 저녁으로 빠져들려는 그녀의 정신을 애쉬의 목소리가 건져냈다.
“…애쉬.”
진정하라는 듯한 애쉬의 말에 그녀는 스스로 가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간밤에도 악몽을 꿔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일까.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여유가 없이 무언가에 쫓기는 것만 같다.
차라리 며칠 정도 쉬었다가 할아버지, 그러니까 조부인 유진혁 회장을 보는 게 나았을까….
잠깐 그런 생각까지 한 서령이었지만 이내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른다면 지금 그녀의 모든 것을 풀어내지 못하리라.
피곤과 불안증 따위는 무시해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에아임의 안위 확인과 후에 있을 회장과의 만남에만 집중하면 된다.
서령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짐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 반드시 오늘, 유진혁 회장과 담판을 보리라.
베일라는 회장의 직계와 그룹의 중요인사들을 위해 마련된 VIP존에 차량을 세웠고, 셋은 차량에서 내려 본사 건물로 들어갔다.
웅중한,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 드높은 빌딩 입구에 달린 스캐너가 셋의 인상착의 파악한다. 단말기에 떠오른 이름과 직위에 경비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유서령 상임이사님.”
“네.”
서령이 간단히 대답하고 지나가려 할 때였다.
삐이익!
스캐너의 작동과 함께 커다란 경고음이 울렸다. 경비와 서령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로 돌아갔다. 거기엔 애쉬가 서있었다.
“어? 이게 왜 울리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인가를 받지 않은 물건을 갖고 계십니까?”
“인가를 받지 않은 물건?”
애쉬가 처음 듣는다는 듯 물었다.
경비가 말하는 인가를 받지 않은 물건. 아마도 총이나 검 따위의 안보를 위협할 무기를 말하는 것일 터다.
감이 짚이는 곳이야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걸린 걸까. 유성 미래전자의 본사에도 같은 스캐너가 있었지만 이렇게 걸린 적은 없었는데.
스캐너의 단말기에 서령의 경호원이라는 정보가 떠오른 애쉬였기에 경비는 온건한 태도로 물음에 대답했다.
“예,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경호원 분들께서 무기 등록을 깜빡하셨는지 스캐너에 걸리는 경우가요.”
“아하.”
“잠시 맡겨주시면 돌아갈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어쩌지? 애쉬가 그런 눈빛을 담아 서령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검이 문제인 것 같았다.
유성 미래전자의 본사와 지사에서는 미리 에아임이 손을 써 뒀는지 신경 쓰지 않고도 그냥 다닐 수 있었지만, 다른 계열사와 그룹 본사는 처리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에아임이 있었다면 이쪽에도 미리 인가를 받아뒀을 텐데.
그가 행방불명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의 부재를 느낀다.
오늘은 에아임을 대신해 서령이 나섰다. 다만 그녀답지는 않은 방식으로.
“그냥 들여보내주세요.”
“…예? 하지만.”
“들여보내주세요.”
“이사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규정상…….”
“들여보내세요.”
“…….”
괜한 분노의 표출. 반복되며 짧아진 서령의 목소리에 경비가 말을 잃었다.
그로서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위에서 후계경쟁 기간이니 보안을 철저히 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그걸 어기려는 상대방이 회장님이 애지중지하는 직계 손녀, 유서령이다.
그냥 들여보낼 수도 없고, 유서령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
가끔 들를 때마다 미담을 남기는 그 유서령 아가씨였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화가 나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베일라가 곤란해 하는 경비를 위해 서령의 말에 첨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책임은 저희 측에서 지겠습니다. 그냥 들여보내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결국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꼬리를 내린 경비가 애쉬에게 임시 허가증을 등록했다.
셋은 작은 소란이 있던 후에야 그룹 본사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