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5. 후계경쟁(19)
* * *
“준비 됐지.”
“아, 예. 잠시.”
이번으로 일고여덟 번째 정도 반복된 물음. 큰일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애쉬의 목소리에 남자, 케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빠뜨린 건 없는지 장비들을 꼼꼼히 체크한다.
그와 애쉬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복면을 뒤집어쓰고 총기 따위를 꺼내든 상태였다. 애쉬 또한 평소 사용하던 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는데, 당연히 정체를 숨겨야 하는 만큼 그런 특징적인 물건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차량에서 내린 케인이 애쉬에게 물었다.
“일단 준비는 끝났는데, 이번에도 다른 곳과 같은 방식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어. 진입할 때는 내가 전방, 네가 후방. 돌아갈 때는 반대로. 작업을 마치면 바로 재끼면 돼.”
“그치만 이번에는 다른 곳들처럼 허술해보이지가 않는데요…”
별다를 것도 없다는 듯 적당히 던져지는 애쉬의 목소리에 케인이 대꾸했다.
지금 그와 애쉬가 있는 곳은 어느 빌딩의 지하 주차장. 유성중공업의 유선혁 사장이 애용하며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자금원이기도 한,호화 시설이 가득 찬 건물이다.
누가 봐도 공장이 밀집한 산업 단지와는 보안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당장 이곳 지하 주차장에 보이는 CCTV만 몇 개인가.
‘하나, 둘, 셋, 넷…….’
케인은 보이는 CCTV들의 숫자를 헤아리다 결국 포기했다. 지금 주차장에 대충 보이는 것만 수십은 되어 보이는데, 건물 안은 어떨지 빈민가에서 자라온 그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애쉬는 그런 케인의 걱정을 단번에 일축했다.
“빌헬름이 알아서 해주겠지. 이미 저것들도 통제하고 있을 걸?”
맞아요. 건물 내 CCTV는 이미 장악했으니까 저만 믿으세요.
애쉬가 케인에게 던진 말에 빌헬름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케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빌헬름의 실력은 충분히 봐왔기에 충분한 신뢰를 갖고 있었지만, 앞서 생각했다시피 이곳은 공간이 널찍한 산업지대가 아니라 빌딩 내부였다. CCTV나 감시에 대한 걱정보다도 좁은 곳에서 벌어질 전투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
“들었지? 그럼 빨리 가자고. 돌아가서 게임해야 되니까.”
“…예.”
평소 들고 다니는 칼도 없이 소총 하나를 어깨에 대충 걸친 애쉬가 재촉했고, 케인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장비를 들고 걸었다. 그의 역할은 운전수, 그리고 외부 신호 송수신 장치를 운반하는 운반책이었다.
* * *
지금 진입하세요.
“오케이.”
타닷. 재빠른 움직임으로 최소한의 발소리만을 남기고 이동한다. 애쉬는 실시간으로 브리핑하는 빌헬름의 목소리에 따라 탑승중인 사람이 없는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가 몇 층이랬지?”
45층의 서버실이요. 다음은 71층의 금고실로 가야해요.
첫 번째는 45층, 그 다음은 71층이다. 애쉬가 층수가 적힌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움직였다. 버튼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곧장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어때, 오히려 이런 데가 쉽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빌헬름이 조작하고 있으니 다른 층에서 멈출 일도 없고.”
“하하….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그대로 위로 가기만 하면 이동 자체는 끝.
45층과 71층. 목적지가 되는 각 층에 도착한 뒤부터는 약간의 전투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살상병기들이 쫓아오던 산업지대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물건만 놓치지 않게 잘 관리해. 길은 내가 알아서 열 테니까.”
“알겠습니다.”
애쉬의 말에 케인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가 든 가방에 목숨이라도 걸 것 마냥.
애쉬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다가도 곧 들려오는 빌헬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45층에서 내리자마자 가드가 둘 있을 건데, 조회해보니 그 중 하나는 사이보그에요. 겉으로 보이는 무장은 없고, 좌측 복도에서 다른 가드 둘이 더 움직이고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시구요.
“어.”
35, 36, 37. 애쉬는 빌헬름의 브리핑에 대답하며 점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수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곧 도착이었다.
띵. 45층입니다.
스르르륵. 청명하게 울리는 알림음. 녹음된 목소리와 함께 서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바깥에서 곧장 보이지 않게 사이드 쪽 벽에 붙어있던 애쉬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어느 정도 열리자마자 그 틈새로 몸을 던졌다.
“어서 오, 읍…!”
“……!”
곧장 보이는 가드들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명치와 턱을 날린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애쉬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인사한답시고 고개를 숙이던 두 명의 가드는 찰나의 순간 들어온 일격에 반응도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애쉬는 그것을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는 케인에게 말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니까 어지간하면 총은 쓰지 마. 거기 그 놈들은 아마 한동안 못 일어날 테니까 걱정 말고.”
“예.”
애쉬의 말에 알겠다며 대답한 케인은 쓰러진 가드들을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대충 끌어다 넣었다. 쓰러진 놈들을 그대로 두고 갔다가 혹시라도 누가 와서 본다면 일이 골치 아파질 것이다.
지금 애쉬와 케인이 침입한 건물은 웨인 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3구역에 위치한 빌딩이었다. 작업 막바지도 아니고, 처음부터 소란이 일고 신고가 들어가게 된다면 23구역에 있던 산업지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난리가 날 것이다.
“처리 끝났으면 바로 가자.”
“아, 알겠습니다.”
“빌헬름, 서버실의 위치는?”
우측 복도를 따라서 가시다가 세 번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돈 다음 쭉 가시면 돼요. 건물 자체가 복잡한 구조는 아니네요. 아, 그리고 가시는 길에 순찰을 도는 놈들도 몇 있으니 조심하시구요.
“당연한 소릴.”
조심하라니. 이제와서그런 얘기는 굳이 필요 없었다.
애쉬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며 움직였고, 케인이 그런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계속해서 진행하던 중 빌헬름의 웃음기어린 목소리가 인이어를 통해 애쉬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런 일을 같이 하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네요. 옛날 생각나는데요?
“옛날?”
네, 예전에 애쉬 씨가 연결 단자를 이상한데다 억지로 쑤셔 박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었는데요.
“아, 그때. 웃기긴 했지.”
애쉬가 킥킥 웃으며 말하는 빌헬름에게 가볍게 답했다.
애쉬와 빌헬름은 이번 일뿐 아니라 전에도 비슷한 잠입 의뢰를 몇 차례 해온 적이 있었다. 애쉬는 현장에서 움직이고, 빌헬름은 외부에서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지금이야 손발이 잘 맞는 둘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못해서 괜한 일을 터뜨린 적도 많았다. 빌헬름이 얘기하는 건 그 중에서도 꽤나 초반에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이야 돌아보면 웃긴데, 그때는 진짜 어이가 없었다니까요. 안 들어가면 넣질 말아야지, 그걸 힘으로….
“네가 제대로 안 가르쳐준 게 잘못이지, 내 탓이냐?”
큭큭, 솔직히 애쉬 씨 잘못도 있잖아요.
터벅터벅, 애쉬는 인이어를 통해 빌헬름과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도 과감히 움직였고, 케인은 그런 애쉬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뒤따랐다.
항상 조심성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아보여도 그가 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모두 옳았으니까.
빌헬름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장난이나 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왜 그걸…….
“아,잠깐만.”
“…?”
빌헬름과 잡담하며 움직이던 애쉬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빌헬름과 얘기하던 중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그의 육감이 작게 경고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그래서 애쉬는 그대로 멈춰선 채 그대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번에 임시 배정 한다던…….”
“…무슨 일로…….”
두터운 남성용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들. 순찰을 돌고 있는 가드들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확인한 애쉬는 빌헬름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와, 옛날 얘기하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4521번 카메라 쪽에서 진짜 두 명이 오고 있네요. 직선상 거리는 한 30미터 정도? 이걸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어디까지나 직선상으로 따졌을 때 거리가 30미터라는 것이지, 복도를 따라가면 그 두 배는 되는 거리가 나오는데다 중간중간 커브를 생각하면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애쉬는 놀라는 빌헬름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저쪽에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따라와.”
“예? 아니, 왜 굳이 찾아가시려는…!”
먼저 움직이는 애쉬와 당황한 채 뒤따르는 케인.
애쉬는 자신의 조수가 당황하든 말든 발걸음을 움직였고, 곧 만난 두 명의 가드 또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걷다가 발견한 가드들을 재워주길 몇 번. 기절한 가드들을 일일이 숨기던 케인이 그것을 포기할 때쯤 둘은 목표했던 서버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입 임무라고 들어서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별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 빌헬름이 대부분 처리를 해뒀으니까.”
현실은 영화에서나 볼법한 잠입 액션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애쉬와 케인이 그런 얘기를 나눌 때, 둘이 서버실 앞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빌헬름이 통신을 걸어왔다.
그쪽 잠금 장치는 서버랑 관계없이 개별 분리된 타입이라 제 쪽에서 못 풀어드려요.
“그럼?”
거기 비밀번호를 입력할 수 있는 패널이 보이시죠?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거기에 그대로 입력하시면 돼요.
“아, 그래.”
NF6743ILLO.
“NF…뭐?”
N.F.6.7.4.3.I.L.L.O요.
“N…F…….”
애쉬는 빌헬름이 불러주는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역시나 빌헬름이 얻어온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띠릭, 올바른 비밀번호를 인식한 암호문이 알림음과 함께 열렸다. 내부를 본 케인이 신기하다는 듯 작게 감탄했다.
“오…. 여기가 서버실이군요.”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의 서버실 안에는 전원을 비롯해 온갖 불빛이 들어온 서버들과 거기서부터 이어진 연결선들이 숲처럼 펼쳐져 있었다.
서버들로 인해 실내 온도는 제법 높은 편.
케인은 신기하다는 듯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이미 이런 곳을 몇 번 봤던 애쉬는 주변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빌헬름, 준 건 어디에 연결하면 되지?”
일단 단말기 카메라로 내부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왠지 모르겠는데 서버실 내부에는 CCTV가 없어서 확인할 수가 없네요.
“알겠어.”
애쉬가 자신의 단말기를 들어 빌헬름에게 실시간으로 영상을 전송했다.
다 비슷하게 생긴 서버들이었는데, 과연 전문가라는 것일까. 빌헬름은 그 겉모습만 보고도 몇 분 지나지 않아 목표하던 서버를 찾아냈다.
뒤쪽에 보시면 연결할 수 있는 단자가 보일 거예요. 거기 꽂아주시면 돼요.
“그걸로 끝?”
네. 45층에서 할 건 그게 끝이에요. 꽂아주신 다음에는 바로 위로 이동하죠.
“그래. 가방 좀 가져와봐.”
“예.”
애쉬는 케인에게서 외부 신호 송수신 장치를 받아 서버 뒤편에 알맞은 단자를 찾아 꽂았다. 오면서 떠들었듯 이미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일이라 헷갈릴 것은 없었다.
장치의 연결을 마친 애쉬가 몸을 쭉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위층으로 올라갈 테니까 바로 준비해.”
넵!
애쉬의 말에 빌헬름이 힘차게 대답했고, 애쉬는 케인과 함께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