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96화 (96/230)

〈 96화 〉 5. 후계경쟁(20)

* * *

­ 71층은 서버실이 위치한 45층보다 경계가 많이 빡빡해서 아마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들키기 전까지는 최대한 사려보고, 들키면 그때부터 정면 돌파하는 쪽으로 가죠.

“그래. 금고에서 목표한 물건 말고 더 빼올 건 없나?”

­ 그 물건 외에는 대부분 금전적인 것들이라 처분하기도 힘들 걸요? 크레딧 카드도 다 일련번호가 박혀있을 거고.

슬럼에서는 개별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식별 번호가 없는 크레딧 카드를 주로 사용하지만, 이런 곳에서 취급하는 크레딧 카드에는 모두 식별 번호가 부여돼있을 터였다.

그런 물건은 사용하는 즉시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한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냥 짐덩이에 불과했다.

물론, 일단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상대방이 지닌 세력과 거기서 나올 재력을 생각하면 그 피해는 그리 유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따로 짐꾼은 필요 없겠네. 넌 그냥 내려가.”

“예? 아, 옙!”

애쉬가 괜히 불안해하고 있는 케인에게 말하자 엘리베이터에 동승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닌 척 하려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좀 무서웠던 모양.

사실 저런 게 정상적인 반응이고, 멀쩡한 애쉬 쪽이 이상한 것이긴 했다.

그런 반응을 보고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 애쉬가 케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냥 대놓고 좋아해라. 괜히 아닌 척 하지 말고.”

“아,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에서 살았다 하는 게 보이는데.”

그의 말을 들은 케인은 뒤늦게 표정을 관리했지만, 이미 다 보인 상태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애쉬가 장난치고, 케인이 쩔쩔매길 잠시.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인 71층에 가까워졌다.

“그럼 가서 차에 시동이나 걸고 있어라. 금방 내려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띠링! 71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알림이 들리고 문이 열리기 직전. 팔과 몸을 한 차례 쭈욱 펴며 스트레칭을 한 애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스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따로 어느 분께서 오신다는 연락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쪽을 보고 있던 가드의 질문. 그러나 그런 질문은 복면을 쓴 채 소총으로 무장한 두 명의 괴한을 발견하며 뚝 끊어졌다.

애쉬는 가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발견한 즉시 발을 굴러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 뻐어억!

“커…!”

주먹을 내질러 복부에 한 방, 이어서 턱을 올려치는 것으로 상대방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완전히 침묵시킨다.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첫 번째는 관문은 완벽하게 처리. 그러나 하나를 완벽하게 처리한 애쉬의 감각에 다른 누군가가 잡혔다.

고개를 돌려 뒤늦게 다른 가드를 발견한 애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망할 타이밍.

양손에 마실 것을 들고 있는 다른 가드. 보아하니 먼저 제압한 한 명과 함께 근무를 서는 녀석 같았는데, 마실 것을 가지러 갔다 돌아오며 애쉬가 제 친구를 눕히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가드와 애쉬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스르륵.

애쉬가 등지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케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경보가 울렸다.

“침입자다!!”

*

“71층에 침입자 발견! 숫자는 하나지만 도저히 현재 전력으로 막을 수가 없다! 지원! 지원 바란다!”

이미 열 구 가까운 시체들이 쌓인 복도.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서 지원을 요청하는 가드들에 의해 병력은 계속 충원되고 있다.

­ 타앙! 탕! 타앙!

애쉬는 뒤편에서 쏘아진 총탄들을 피하며 총구를 향한 채 방아쇠를 당겼다.

­ 투다다다!

“억!”

연발로 드르륵 긁는 격발음과 함께 어김없이 또 하나의 가드가 달려오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미약한 반동의 손맛을 느끼며 그것을 바라본 애쉬가 생각했다.

‘이럴 땐 진짜 총이 편하긴 하단 말이지.’

실력은 없고 숫자만 많은 놈들을 상대하는 데는 정말 총만큼 좋은 게 없다. 일단 제대로 총구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면 끝이었으니까.

검을 쓸 때처럼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의 신체능력과 감각은 검을 쓸 때 뿐 아니라 총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얼마 해보지 않은 사격에서조차 어지간한 선수 이상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애쉬는 다시 총구를 정면으로 향하며 계속해서 정면으로 밀고 나갔다.

“막아!!”

“망할! 놈은 총알을 피하고 있다고!!”

­ 타다다당!

총구만 정면으로 향한 채 다시 한번 연발로 드르륵 긁는다. 정면을 막고 있던 세 명의 가드들이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그들을 뛰어넘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애쉬의 귓가에 빌헬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엘리베이터랑 비상계단 쪽 입구를 막아놔서 아마 병력 충원이 좀 뜸해질 거예요. 뚫리기 전에 빨리 처리하죠!

­ 퉁.

좋은 소음기를 꼈는지 급한 와중에는 신경도 쓰지 못할 작은 격발음과 함께 총탄이 쏘아졌지만, 애쉬는 몸을 옆으로 움직여 가볍게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건 좋은 소식이네.”

“…!”

그가 총탄을 피하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의 가드에게 보답으로 투두둥, 몇 발의 총탄을 선물해준다. 복도의 끝에 도달해 좌측으로 꺾자 그를 향해 양 팔로 머리를 지키고 있는 웬 덩치가 달려들었다.

“흐아압!”

­ 타다당!

이번에는 점사로 방아쇠를 한 차례 당긴다. 그리고 애쉬는 그렇게 날아간 총탄이 인간의 몸에 맞고 튕겨나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 팅, 티딩!

“흐흐. 그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한다!”

“…왜 이런 놈은 안 나오나 했네.”

애쉬가 쏜 총탄을 튕겨낸 덩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전신 사이보그, 그것도 장갑 특화형. 저렇게 대놓고 방어력에 중시한 타입의 사이보그는 머리만 잘 지키면 애쉬가 들고 있는 일반 소총으로는 뚫을 수가 없었다.

그 개조에 필요한 돈이 어마어마했기에 보기 힘든 부류긴 했지만 이런 곳이라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안 나오다 이제야 나온 것이다.

검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신감 넘치는 몸과 함께 토막을 내주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까지 쓴 상태.

그렇게 특징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애쉬는 그냥 달려드는 덩치의 정면으로 마주 덤볐고, 그것을 본 덩치도 애쉬를 그대로 날려버리려는 듯 오히려 더욱 가속했다.

장갑 특화형 사이보그의 특징은 그 방어력과 무게다.

수백 킬로그램에 달할 사이보그의 몸은 그저 약간의 가속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인간 하나 쯤은 가볍게 박살낼 수 있는 무기가 됐다.

“죽어라!”

애쉬가 끝까지 정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덩치는 자신과 애쉬가 부딪히기 직전 웃으며 외쳤다.

그러나.

­ 터억.

“…응?”

상대방과 부딪힌 몸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마치 수십 톤짜리 바위에 힘을 쏟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뭐하냐.”

애쉬는 덩치가 어떻게든 자신을 밀어내려 느끼며 물었다.

탄을 피한다는 걸 듣고 맨몸으로 어떻게든 해보려는 것 같았는데, 개조만 받았다 뿐이지 힘을 쓰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끙끙대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근력의 절대치 또한 애쉬 쪽이 우위에 있긴 했으나, 이 정도로 큰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역시 몸을 다루는 능력에 있었다.

애쉬가 그 처참한 수준에 한숨을 내쉬며 몸의 힘을 쭉 끌어올렸다. 덩치가 밀 때는 꿈쩍도 안하던 균형이 단번에 깨진다.

척 봐도 그의 두 배 이상은 되는 덩치의 몸이 그 절반도 되지 않는 애쉬의 힘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무, 무슨 힘이…!”

당황한 덩치가 팔을 내뻗어 애쉬의 몸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잡혀줄 그가 아니다.

자신을 붙잡기 위해 내뻗어진 팔을 잡은 애쉬는 그대로 놈의 몸을 뒤집으며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간단한 업어치기였다.

­ 터엉!

“어억!”

전신 개조 수술을 받은 쇳덩이가 바닥에 처박히며 금속 울리는 소리를 냈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렇게 바닥에 내쳐진 순간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방은 전신 개조를 받은 사이보그. 마무리까지 확실히 해야 했다.

­ 타앙!

애쉬는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쇳덩이의 머리에 탄환 하나를 선물해주고 빌헬름의 길 안내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쪽?”

­ 네, 그쪽 복도를 쭉 따라가신 다음 왼쪽으로 틀면 금고 문이 보일 거예요. 금고 문에 단말기를 연결해주시면 제가 바로 열어볼게요.

“어.”

총탄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통신하며 길을 뚫는다. 애쉬는 복도를 지나며 열댓 명의 가드들을 처리했고, 그러자 71층에 있던 가드들도 바닥이 났는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빌헬름의 말대로 복도를 쭉 지나쳐 좌측으로 꺾은 애쉬는 금고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이만 6미터는 되며 가로의 길이는 못해도 20미터 이상. 그냥 한쪽 벽면 전체가 금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강철로 만들어도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텐데, 그의 느낌상 그냥 강철도 아닌 것 같다.

그것을 확인한 애쉬가 중얼거렸다.

“이건 무슨, 대형 은행도 아니고.”

­ 돈이 썩어 넘치니까 가능한 짓이죠. 유성 회장의 손자인데다 본인부터가 계열사 사장이니까 뭘 못하겠어요.

평생 빈민가에서 살아온 빌헬름의 부정적인 목소리. 저 금고를 제작할 때 든 돈은 대체 얼마일까.

애쉬가 생각한 금고는 기껏해야 가로 세로 2~3미터에 달하는 좀 큰 개인용 금고였다. 그러나 이곳에 위치한 것은 숫제 벙커의 입구가 아닌가.

애쉬는 신기함과 감탄이 섞인 감정을 느끼며 그 입구에 다가갔다. 원형의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은 가까이서 보니 총은커녕 폭발물로도 뚫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 자신이라면 검으로 벨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검을 들고 오지 않은 지금은 실험해볼 수가 없다.

“여기 꽂으면 된다는 거지?”

­ 네. 그대로 꽂으시면 돼요.

총탄과 폭발물로도 뚫기 힘들 금고의 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손바닥만 한 단말기의 연결 단자 하나에 뚫렸다.

불과 일 분 남짓한 시간. 빌헬름이 보안을 뚫어낸 것이다.

­ 됐다! 확실히 보안업체에서 만든 물건이라 그런가 난이도가 있긴 한데, 그래봤자지!

해결했다는 빌헬름의 말과 함께 각종 보안 장치가 달린 인식 센서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보안이 풀린 것이다.

문 안쪽에서 무언가 복잡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그그긍.

엄청난 중량의 문이 움직이며 안쪽의 광경이 드러난다. 애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단말기의 카메라를 통해 금고 안쪽을 본 빌헬름이 감탄을 터뜨렸다.

­ 와….

겉모습만 대형 은행의 금고처럼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금괴와 책장의 책들처럼 배치된 크레딧 카드들.

다른 한 쪽에는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예술품이나 액세서리류가 진열돼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애쉬로서는 알 수 없는 금속들이 놓여 있었다. 무슨 희귀금속이나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온갖 값진 물건들이 가득한 금고 내에서도 애쉬와 빌헬름이 목표하는 건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좀 봐. 어떤 게 그 물건이야?”

­ 아, 자, 잠시만요.

하나만 챙겨도 한동안은 편히 먹고 살 수 있을 물건들의 향연에 군침을 흘리던 빌헬름이 애쉬의 말에 집중했다.

그들이 찾는 건 당장 보이는 것처럼 돈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 유선혁 사장이 직접 관리하는 데이터 칩이었다. 이곳을 비롯한 다른 자금원들의 장부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빌헬름이 유선혁 사장의 데이터 베이스를 털어보다 우연히 발견한 정보였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쪽은 유선혁 사장을 제대로 찌를 수 있는 검 하나를 더 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금원이라는 것들 중 대부분은 유선혁 사장이 사적으로 권력을 휘둘러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때였다면 벌금 좀 내고 온갖 인맥을 이용해 어떻게든 무마할 수도 있는 수준의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후계경쟁 중이다.

가족보다도 회사를 위한다는 유진혁 회장의 점수를 잃는다는 것은 직접적인 처벌을 받는 것보다도 무거운 일이 될 터였다.

­ 특별한 물건은 없는 것 같은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죠.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면 금고 안에서도 특별하게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가?”

빌헬름의 말을 들은 애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뚫고 들어오는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물건을 찾는데 시간이 끌리자 빌헬름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 어, 어떡하지? 가짜 정보였나? 지금 바깥에 경찰 측 부양기들이 뜨고 있다는 것 같은데, 빨리 빠져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애쉬는 유심히 주변을 둘러봤다.

­ 지, 진짜 큰일이라니까요? 빨리 도망가는 게…!

“아, 진짜. 그 새끼들은 이럴 때만 빠르다니까.”

슬럼에서는 그렇게 느릿느릿하더니, 여기서는 걸린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튀어왔다.

경찰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애쉬는 좀 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만약 여기서 걸린다면 단순 침입이 아니라 테러범이 된다. 그럼 귀찮은 수준을 넘어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다급히 주변을 마구 뒤집어보던 애쉬는 커다란 예술품 아래 깔려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가?”

­ 네?

“찾은 것 같은데?”

*

덜컥. 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케인은 갑자기 열린 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애쉬의 안부를 물었다.

“바로 걸린 것 같던데 괜찮으십니까?”

“어, 바로 출발하자. 벌써 경찰들 떴다니까.”

“예, 예.”

잘못하면 지하주차장에 갇힐 수도 있다. 애쉬의 말에 케인이 급히 차량을 출발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급했기 때문일까. 주차장에 들어오던 차량과 가볍게 부딪힐 뻔하고 말았다.

“아, 뭐야.”

“죄송합니다. 상대방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케인이 애쉬에게 사과하고 상대방이 지나갈 수 있도록 차량을 뒤로 뺐다.

길에서 비켜주며 한 순간 멈춘 차량.

복면 대신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 따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애쉬는 우연찮게 정면을 지나가는 상대 차량의 보조석에 앉은 남자와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서늘함을 넘어 싸늘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그런 상대방 또한 애쉬에게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케인이 예의상 상대 차량 운전자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며 상대방의 차량이 지나갈 동안 그 또한 애쉬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런 눈 맞춤은 서로의 차량이 완전히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됐다.

“왜 그러시는지…?”

상대방이 완전히 멀어지고 케인이 운전하는 차량이 출발한 뒤, 갑자기 조용해진 애쉬의 태도에 케인이 물었다.

그에 애쉬는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남은 상대방의 눈동자를 떠올리다가도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기나 하자.”

“…예.”

* * *

“방금 전은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 하도 재촉하는 하시는 바람에…. 불편하셨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애쉬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는 운전수의 사과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운전수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지레 겁을 먹어 사죄했지만, 남자의 분위기가 변한 이유는 ‘가벼운 사고가 날 뻔했다’라는 시답잖은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상대방, 사고가 날 뻔했던 차량의 보조석에 앉아있던 남자에게서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 문뜩 하나를 떠올렸지만, 워낙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 그것을 떨쳐버렸다.

‘잘못 느낀 거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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