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97화 (97/230)

〈 97화 〉 5. 후계경쟁(21)

* * *

“없어….”

없다.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

비서들을 바깥에 두고 홀로 금고 안에 들어온 유선혁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던 데이터 칩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어떻게 그것의 존재를 알았지?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침입자들이 훔쳐간 물건. 그건 유선혁 자신의 정치 인생을 완전히 끝낼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그가 불법적으로 만든 자금원들에서 쏟아져 나온 자금의 흐름, 그것을 이용한 내역이 모조리 들어있는 장부.

그것은 그저 자금원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자금을 사용한 내역이 들어있는 물건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물건 안의 데이터에 그가 로비를 넣었던 수십 명의 고위 의원들과 수백은 될 유명인들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명색이 유성 그룹 회장의 장손인 만큼 아무리 시의원들이라고 해도 직접 목숨을 위협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세상에 퍼지는 순간 오히려 그 두렵고도 두려운 조부, 유진혁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제 핏줄보다 자신이 평생 일궈온 회사를 중히 여기는 냉혈한. 그 콧대 높은 시의원들조차 몇 수 접어주는 이 도시의 지배자 중 한 명이.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금고에서 나온 유선혁이 비서에게 물었다.

“그, 그 녀석들은? 그 녀석들은 어딨지?”

“한 분이 아래층에서 대기 중입니다.”

“한 명? 늦은 주제에, 심지어 한 명밖에 안 움직였다고?”

“……예.”

비서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로서도 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유선혁 사장이 고용한 놈들은 일개 비서가 감히 무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인물들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유성 그룹의 권력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살 달래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시간이 지체되고 결국엔 이렇게 사건이 터질 때에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돈을 처먹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아?”

그런 비서의 대답을 들은 유선혁은 이제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허망함 앞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차오른 분노를 느끼며 유선혁이 말했다.

“그 놈한테 안내해.”

* * *

“업무 끝?”

유성 미래전자의 사옥, 서령의 사무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애쉬가 서령에게 물었다. 그에 서류들을 정리하던 서령이 대답했다.

“네. 이제 정리하고 퇴근해야죠.”

“오늘 가는 거지?”

“네.”

“오케이.”

서령의 대답에 애쉬가 몸을 일으켜 쭉쭉 기지개를 켰다. 이제 따분한 업무 시간도 끝났으니 움직일 준비를 해야지.

애쉬와 서령은 함께 사무실을 정리했다.

빌헬름이 부탁한 잠입 임무를 끝낸 다음날.

빌헬름은 구해온 데이터 칩의 보안을 뚫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기에 당장은 할 일이 없던 애쉬가 간만에 서령을 밀착 경호했다.

그리고 그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서령은 업무에 집중하고, 베일라와 애쉬, 그리고 다른 경호원들이 그런 그녀를 지켰을 뿐.

서령의 형제자매들에게 포섭된 임원들이 임원 회의에서 그녀를 공격했다는 것 같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가라앉았다. 빌헬름의 조력으로 놈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됐다나.

정치적으론 관심이 없는 애쉬였기에 그저 잘 됐다는 말에 그렇구나, 하고 반응할 뿐이다.

아무튼 지난 몇 주 간 서령은 이리저리 뛰어다닌 애쉬 못지않게 바삐 움직였는데, 오늘은 그런 날들 중에서도 특별하다면 조금 더 특별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오늘도 업무 고생하셨습니다, 이사님.”

“고마워요, 베일라.”

“예. 그럼 오늘은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사격 훈련장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네.”

서령이 사격을 비롯한 호신술들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도 최소한의 호신은 가능해야 한다고 느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로 했다.

애쉬와 서령은 베일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2구역 외곽에 위치한 사격 훈련장으로 향했다.

“사격은 처음이야?”

“아뇨, 가끔 쏴보긴 했어요.”

차를 타고 가던 중, 애쉬의 물음에 서령이 답했다. 서령은 오늘이 아니더라도 가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격장에서 총을 쏘곤 했다.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기본 정도는 하는 수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마저도 충분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전,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가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았던가.

당시 서령의 몸을 지배하던 무력감의 잔재는 아직까지도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애쉬는 어때요?”

“나? 나는 뭐, 할 만큼은 하지.”

서령의 물음에 애쉬가 가볍게 답했다.

사실 애쉬는 이 세계에 와서 총에 손을 댄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파트너, 검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해결하기 충분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감만으로 총을 다루는 그는 어지간한 사격 선수 수준으로 사격을 잘했다.

지구의 군대에서 사격을 했던 경험도 있고, 몸의 성능도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니 말이다.

“확실히 총이라고 못 다룰 것 같진 않습니다.”

“음…. 애쉬 씨라면 몸을 쓰는 일은 다 잘할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해요.”

베일라의 말에 서령이 동의했다. 맨몸으로 총을 든 수십을 상대하는 사람인데, 뭘 못할까.

솔직한 말로 서령은 애쉬가 어떤 실력을 보여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얘기를 하며 차를 타고 가길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셋은 사격 훈련장이 위치한 2구역의 외곽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이사님.”

“아, 운전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애쉬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베일라가 몰던 차를 뒤따른 몇 대의 검은 차량에서 서령의 다른 경호원들이 내리는 게 보였다.

서령의 개인 경호원들과 레이라에게서 빌려온 녀석들이었다.

서령의 개인 경호원들은 더 이상 애쉬를 상대로 자존심 싸움을 걸어오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모두 베일라와 레이라의 부하들 덕이었다.

그들의 태업으로 인해 일어났던 일들이 있었을 뿐더러 베일라가 직접 보았던 애쉬의 실력과 서령이 보내준 영상 속의 모습들이 알려진 탓에 그 뒤로는 가벼운 기 싸움도 사라진 것이다.

아군이니만큼 겁을 먹은 것 같진 않았지만 저들도 눈이 있기에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쉬가 자신들보다 한참은 위에 있는 실력자라는 것을.

애쉬는 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을 쓱 훑어보곤 차에서 내리는 서령과 베일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사격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저기부터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딜요?”

“저쪽입니다.”

베일라가 훈련장 옆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Guns & Roses. 건물에 매달린 간판과 건물의 위치가 그곳이 무엇을 파는 곳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총포사(Gun Shop). 무슨 밴드의 이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격 훈련장 근처에 위치한 걸 보면 명백한 총포사였다.

“건 샵인가요?”

“예. 훈련보다 자신에게 맞는 총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그럼 먼저 가보죠.”

“예.”

서령과 베일라를 앞장서고, 애쉬가 뒤따라 총포사로 들어갔다. 애쉬는 총포사로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여기도 총, 저기도 총. 권총부터 시작해 샷건, 자동소총 등 온갖 총들이 벽면을 가득 매우고 있다. 게 중 몇몇은 과연 게임 속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신기하면서도 멋있는 외형을 뽐내고 있어, 애쉬는 그것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검도 물론 남자의 로망이지만 저런 총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어서 오쇼.”

셋이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성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런 곳이 처음인 서령을 대신해 베일라가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 여성분이 사용할 물건을 보고 싶습니다.”

“어떤 걸로 찾으시는지?”

“휴대하기 편한 권총 류로 보여주십시오.”

“흐음.”

베일라의 대답에 주인장이 서령과 베일라를 훑어봤다. 평생 고생 한번 안한 듯 하얀 피부,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는 여성용 정장.

서령 쪽은 척 봐도 총과는 인연이 멀 것 같은 회사원이다.

반면 베일라는 그녀와 대조되게 제법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정장이지만 서령과 달리 바지로 되어 있으며, 몸을 움직이기 편하도록 개량된 정장.

둘이 같이 있으면 누가 봐도 귀한 집 아가씨와 경호원으로 보였다. 주인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뒤편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바로 박스를 열어보였다.

“이걸로 한 번 보쇼.”

“잠시.”

주인장의 말에 베일라가 박스 안 틀에 들어가 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무게감을 조금 재는 듯 하더니 서령에게 들려준다.

“무게는 어떠십니까?”

“음…. 적당한 것 같아요.”

서령이 대답했다. 애쉬는 서령이 들고 있는 권총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권총이지만 조금 신기한 부분이 있다. 권총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작은 디스플레이. 지금은 불이 들어와 있지 않다.

애쉬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그건 전자 스코프입니다.”

대답한 베일라가 설명했다. 권총에 달린 작은 디스플레이는 전자 스코프로, 사격 초심자도 쉽게 조준하고 맞출 수 있도록 보조하는 물건이었다.

인간을 대신해 조준점을 맞춰주고, 시야의 배율을 늘리거나 줄이기도 하며 상대방과의 거리와 조준점으로 쏘았을 때 기타 영향에 의한 명중 확률까지 보여주는 물건.

인간은 말 그대로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도록 돕는 스코프다.

애쉬는 그런 베일라의 설명을 듣고 확실히 근미래 배경의 세계긴 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슬럼에서 나뒹굴던 총들은 저런 기능까지 달고 있지 않았는데, 확실히 도시의 중심으로 오니 저런 물건도 존재했다.

전자 권총이라….

저 스코프를 사용하면 조준부터 사격까지 걸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긴 할 것이다. 그만큼 실력은 늘지 않겠지만.

“근데 그거 잘 파손되지 않나? 위급한 상황에서 갑자가 파손되면 어쩌려고.”

그렇게 베일라가 좋은 점들을 잘 설명해줬지만 애쉬는 그래도 조금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에 주인장이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파손되는 물건은 아니오.”

“툭 건들면 깨질 것 같은데.”

“어지간한 힘으로 내려치지 않는 이상에야 안 깨지니 걱정마쇼.”

애쉬의 걱정처럼 잘 깨지는 물건이었다면 애초에 상용화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권총이라는 것이 실전에 사용될 때는 언제나 위급한 상황일 테니.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난 비추천.”

애쉬가 서령에게 말했다. 총탄에 깨진 돌 파편에라도 맞아 파손된다면 그 뒤는 어쩔 텐가. 저것만 믿고 있다가 낭패를 볼지 모른다.

주인장은 그런 애쉬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맞는 말이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도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령도 애쉬의 일리 있는 말에 들어봤던 총을 내려놨다.

“다른 걸로 보여주시죠.”

“흥. 그럼 이건 어떠쇼.”

주인장이 다른 총을 꺼내 놓았다. 이번엔 방금처럼 전자기기가 달려있지 않은 베이직한 물건이다.

“이건 뭔데 탄창에 여덟 발밖에 안 들어가? 요새도 이런 게 나오나?”

“그럼 이건?”

“이건 너무 거추장스러운데.”

“그럼 이건!”

“한번 들어봐. 무겁지? 척 봐도 그래 보였어.”

“그럼 이건!!”

………

……

*

“다신 오지 마쇼!!”

쾅! 애쉬와 서령, 베일라가 가게를 나서자 화난 주인장의 목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 닫는 소리가 울렸다.

서령이 손에 총기를 담은 박스 하나를 들고 어색하게 움직였고, 베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허, 장사한다는 늙은이가 접객을 저렇게 하나.”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너무했습니다.”

“…저도 애쉬가 너무했단 것 같아요.”

서령과 베일라는 그런 주인장이 이해된다는 듯 애쉬를 탓했다. 애쉬는 무려 30분 동안이나 주인장과 토론 아닌 토론을 벌이며 총기를 골랐는데, 워낙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지적하다보니 주인장이 뿔이 난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그런 가게 주인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무기라는 것은 무조건 까다롭게, 최고의 것만을 골라야한다.

특히 서령이 멋모르는 아가씨처럼 보이자 처음 보여줬던 전자 권총은 애쉬의 기준으로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최신예 제품이라고는 했는데 말도 안되게 비싸다뿐이지,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놀이용으로 보이는 물건이었기에.

애쉬가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가며 새로운 물건을 꺼내게 한 것은 그런 태도에 대한 복수기도 했다.

“됐어. 총도 골랐으니 가보자고.”

말한 애쉬가 눈앞에 보이는 사격 훈련장을 향해 앞장섰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의 베일라와 서령이 그런 그를 뒤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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