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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99화 (99/230)

〈 99화 〉 5. 후계경쟁(23)

* * *

“그럼 다 모이셨으니 시작할게요.”

매주의 주말에 열리는 정기회의.

애쉬, 서령, 베일라, 에아임, 케인 등을 앞에 두고 일어선 빌헬름이 나름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애쉬는 또 무슨 귀찮은 걸 시키려고 분위기를 잡나 싶었지만, 일단 진지한 일행의 분위기에 편승해 빌헬름이 하는 것을 바라봤다.

“이번에 애쉬 씨와 케인 씨가 구해온 자료를 봤는데, 제가 알아봤던 것보다 훨씬 중요도가 높은 물건이었어요. 한번 보시겠어요?”

빌헬름은 테이블을 조작해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일행에게 하나의 홀로그램 화면을 띄워보였다. 그것은 앞서 일행에게 말한 대로 애쉬와 케인이 적진에 뛰어들어 구해온 데이터 칩 내부의 문서였다.

활자를 읽는 걸 즐기지 않는 애쉬는 ‘다른 녀석들이 설명하겠지’ 하며 대충 넘겼고, 케인이나 베일라는 그것을 읽고 있음에도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서령과 에아임만큼은 달랐다.

둘에게는 눈앞에 띄워진 문서의 내용을 이해할 배경지식이 충분히 쌓여 있었다.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둘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만약 둘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것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보여도 될 만한 물건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건 설마….”

“불법적으로 조성된 비자금과 그걸 이용한 로비 내역…인가요?”

에아임이 설마 하며 문서에 집중했고, 서령이 물었다.

빌헬름도 그 둘만큼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순히 비자금의 흐름과 로비 내역만이 아니라 그걸로 어떤 걸 원했고, 얼마나 해냈는지까지 기록했더라구요. 한 달 주기로 갱신하는지 이번 달의 기록은 없었지만, 저번 달까지의 기록만 있어도 충분히 치명적인 무기예요.”

애쉬가 구해온 데이터 칩은 빌헬름과 다른 일행이 알고 있던 정보처럼 단순히 후계경쟁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그 사업적, 정치적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대로 사회에 밝혀진다면 시 정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인들까지도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갈지 모를 물건.

아무리 유성 그룹의 힘이라도 그만한 태풍을 홀로 무마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큰일이네요.”

“네, 큰일이죠. 상상보다 훨씬 너무 중요한 데이터라 더욱.”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령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서령의 목소리에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애쉬가 의문을 표했다.

“뭐, 좋은 거 아닌가? 어차피 적인데.”

이쪽과 상대방은 경쟁중이다. 그럼 이쪽이 쥔 무기가 치명적이면 치명적일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유성 그룹 자체에 해가 될 만큼은 풀지 않고, 적당히 쓰면 무척이나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애쉬의 생각에 빌헬름이 반박했다.

“상대방의 성향을 봤을 때 오히려 이렇게 큰 약점을 잡아버리면 엇나갈 가능성이 있어요.”

“엇나갈 가능성?”

“네. 유선혁 사장은 권력을 쥐기 위해 후계경쟁이 시작되자마자 제 핏줄도 암살하려 한 인물이에요. 그런 인물이 진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어떨 것 같아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과연 얌전히 회장의 자리를 포기할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지만, 서령이나 에아임, 빌헬름이 생각하기엔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는 걸 안 순간 브레이크를 잃고 폭주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은 인물. 그게 유선혁 사장이었다.

이전까지야 자신이 제법 유력한 후보였기에 대놓고 무언가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의 심장과도 같은 물건을 빼앗긴 지금부터는 또 모를 일이다.

“그래서 방향을 조금 틀어야 할 것 같아요.”

“방향을 튼다?”

“네. 전에는 이곳저곳 서서히 조여가면서 상잔시키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너무 위험해요. 지금은 저희가 범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지만알게 된다면 유선혁 사장의 행동 양식을 봤을 때 저희의 주거지에 테러도 할 수 있을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건드리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또,저희도 조심할 때가 되긴 했잖아요.”

빌헬름은 불이 붙은 폭탄, 유선혁 사장 외에도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빨라진 공권력의 반응과 상대방의 준비 같은 것을 지적했다.

이미 몇 차례 반복된 습격 탓인지 적의 움직임 따위가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속된 것은 애쉬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빌헬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애쉬가 물었다.

“그럼 이제 뭘 하는 건데?”

“지금부터는 다른 경쟁자 쪽을 건드려볼 거예요. 제가 조금 알아봤는데, 지금 후계경쟁은 총 4개의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더라구요.”

“…네 개의 세력이요?”

“네.”

잠시 조용히 듣고 있던 서령의 물음에 빌헬름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후계경쟁의 현 세력 구도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첫 번째로, 유서령 이사님의 아버지인 유장혁 부회장부터 시작해서…….”

유진혁 회장의 장남이자 서령의 아버지, 그룹의 부회장의 자리에 있는 유장혁.

장남이자 유성중공업의 사장인 유선혁과 차남, 유성 증권의 부사장인 유상혁의 연합.

이란성 쌍둥이, 유성 제약의 부사장인 유선화와 유성 물산의 부사장인 유성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쉬와 빌헬름이 돕고 있는 유서령까지.

지금의 후계경쟁은 이렇게 네 개의 세력이 회장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물론, 다른 경쟁자들은 이쪽을 제대로 된 경쟁 상대로까지 보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내부자인 에아임이나 서령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던 세력 구도. 자신도 제대로 모르고 있던 세력 구도에 대한 설명을 들은 에아임이 의문을 나타냈다.

“다른 경쟁자들이 연합을 했단 말입니까? 그런 건 그룹 내부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저도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어떻게….”

“그야 이 좁은 유성그룹 서버 안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허.”

빌헬름이 서버에 접속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자금의 움직임 같은 데이터가 전부가 아니었다.

CCTV에 찍히는 영상은 물론이고, 사내 회선으로 오고가는 연락에 대한 도청까지.

내부에서 독립 서버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이 정도를 캐내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그런 빌헬름의 말에 에아임이 감탄했다.

애쉬가 추천할 때도 자신이 봐왔던 해커들 중에서는 최고라고 하더니, 단순한 해킹 실력뿐 아니라 얻어낸 정보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판단력까지 뛰어난 인물이 아닌가.

나이도 아직 어려 발전 가능성이 더 남아있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이번 후계경쟁 이전에 그룹 차원에서라도 고용하고 싶을 인재였다.

그렇게 에아임이 빌헬름을 탐냈지만 그것을 모르는 당사자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당연히 그룹의 부회장이신 이사님의 아버지에요. 그런데 그쪽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단 말이죠.”

유장혁 부회장은 이미 사내 이사진과 그 밑의 실무진으로부터 존경 받고 있는 상사였다. 그 자신의 실력 또한 무척이나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그룹 내에서 자신만의 것을 만들 시간이 가장 많았던 것이다.

그 세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 하면 솔직히 말해서 부회장인 그가 진작 움직였다면 경쟁자들 중 하나 둘 정도는 이미 정리가 된 상태였을 것이라 예상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 구도는 나오지 않았겠지. 못해도 세력이 하나는 줄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빌헬름이 알아본 결과 그쪽은 정말 후계경쟁 이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분명 후계경쟁의 당사자 중 하나임에도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그만큼 압도적인데 왜 움직이질 않고 있을까요? 혹시 이사님은 아시는 게 있으세요?”

“…그건 아마.”

“아마 부회장님은 후계경쟁에 관심이 없으신 걸 거예요. 그분은 정말 본인의 업무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신 분이거든요. 제 어머니이신 이한설 사장님도 마찬가지구요.”

빌헬름에게 설명하려던 에아임의 말을 끊고 서령이 끼어들었다. 평소에는 듣기 힘든, 조금 차가운 목소리였다.

본인의 부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변하는 태도. 그것은 얼마 전 유진혁 회장과 만나고 온 직후의 분위기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겠지. 애쉬는 순간적으로 이전에 들었던 서령의 삶에 대한 얘기를 떠올리곤 생각했다.

빌헬름도 뭔가를 느꼈는지 서령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짚고 갈 것은 확실히 짚고 가야 했다.

“그 말씀이 정말이라면 조금 편한 길로 가도 될 것 같긴 한데, 확실한 건가요?”

“…100%는 아니에요. 하지만 여태껏 평생을 그래오셨어요.”

서령이 아는 그녀의 아버지, 유장혁 부회장은 돈에도, 권력에도, 심지어는 제 자식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 남자였다.

지금이야 부회장의 자리에 있지만 그것은 본인의 야망을 펼친 결과라기보다는 그저 업무에 전념하던 중 부차적으로 얻게 된 자리.

그야말로 일에 미쳐서는 기계처럼 살아온 사람인 것이다.

자식들을 낳은 이유도 유진혁 회장, 그녀의 조부의 명령 때문일 거라는 생각까지 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거의 맞을 것이라는 서령의 말에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상정하고 있을게요.”

대비는 하고 있어야겠지만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알아서 떨어져준다면 정말로 일이 편해질 것이었다.

다른 두 경쟁 세력 중에서도 한 쪽은 거의 목숨 줄을 잡아놨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쌍둥이 쪽을 공략할 차례인데…….

일행을 앞에 두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빌헬름. 애쉬는 이대로 두면 자신의 시간만 잡아먹힐 것 같다는 생각에 먼저 물었다.

“그럼 이제 난 뭘 하면 되는 건데?”

“음…. 아, 사실 지금 당장은 애쉬 씨가 해주실 일은 없어요. 지금부터 한동안은 이사님이나 수석 비서님, 그리고 저 같은 사무직들이 해야 할 게 많아서.”

“그래? 그건 듣던 중 다행이네. 이제 좀 놀아야지.”

빌헬름의 대답에 애쉬가 고개를 소파 뒤로 툭 넘기며 말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바쁘게 움직인 건 레이라와 ‘뱀파이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사건도 벌써 두어 달 이상 지났으니 꽤나 오랜만인 셈이다.

애쉬의 귀찮음으로 늘어지는 목소리에 빌헬름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최근에는 정말 애쉬가 고생이 많았다. 운전수, 짐꾼 정도로 데리고 다니는 케인은 현장에서 크게 도움이 되질 않았을 테니 사실상 홀로 여섯, 일곱 곳의 보안을 뚫고 침입한 것이다.

조금 지나면 다시 일해야 할 테지만 현장에서 뛸 필요가 없는 지금만큼은 충분히 쉴 자격이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조금 쉬고 계세요.”

“오냐. 그럼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난 거지? 난 들어가본다.”

“아, 네. 물론 들으시면 좋기야 하겠지만 안 들으셔도 크게 상관없어요. 지금부터는 저희 쪽 얘기니까요.”

“아, 그럼 저희는 이제부터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수석비서님하고 이사님은…….”

애쉬에게 대답한 빌헬름은 곧 서령, 에아임이 얘기를 시작했다.

본인이 빠져도 될 때라는 것을 안 애쉬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한동안 놀고먹는 것이 일이었다.

서령의 호위 정도는 해야겠지만 그건 게임을 하면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방에 도착해 침대에 누운 채 게임을 계속 하려던 애쉬였지만, 그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나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이다.

‘괜히 찜찜하네.’

얼마 전, 유선혁 사장의 금고를 털고 나올 때 마주쳤던 남자. 그 남자는 누구이고 눈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각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런 감각을 느꼈던 거지?

최근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을 때면 자꾸만 떠오르는 주제.

그때 느꼈던 것은 스스로 사고를 가속시킬 때 느껴지는 감각과는 또 다른 무언가였다.

마주쳤을 때 몰래 얼굴을 찍어놓기라도 했다면 빌헬름에게 부탁해서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애쉬는 괜히 자꾸만 신경이 그쪽에 쏠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기곤 방에서 나갔다.

갑자기 찜찜해진 기분 때문에 게임을 즐길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 잠깐 밖에 나갔다온다.”

“네. 다녀오세요.”

“그러니까…….”

회의에 집중하던 서령이 나갔다온다 말하는 그에게 인사하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수십 분 동안은 게임을 붙잡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여서 회의 중이었다.

애쉬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그들을 잠깐 바라보고는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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