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10. 에리히 슈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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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사무실에 술자리를 만들었다.
안주라고는 대장간에서 간식 삼아 보관하던 육포와 합성 조미료로 범벅된 음식들 밖에 없었지만, 나름 구색이 갖춰지니 술은 제법 잘 넘어갔다.
무엇보다 최고의 술안주는 먹는 음식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이 아니던가.
“그때 내가 처음으로 이놈에게 직접 만들었던 칼을 넘겨줬지. 언젠가 사정이 된다면 최고의 검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오오, 그래서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입이 열리기 시작한 에리히 영감의 과거 회상에 게빌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과거를 얘기할 맛이 나게 하는 청자의 반응에 에리히 영감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랬더니 그 칼로 ‘폭군 오마르’는 물론 ‘오마르의 망치’ 전체를 결딴내버렸다고 하더구나. 솔직히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애쉬에게 ‘오마르의 망치’를 이 세상에서 지워 달라 부탁했으나 그것은 누가 봐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소속 인원만 네 자리 숫자에 달하는 슬럼 최대의 갱단, ‘오마르의 망치’와 칼 한 자루를 든 일개 개인.
겨우 한 명의 인간이 수천 명이 이룬 집단을 이겨낼 수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진짜였어. 불안에 떨던 내 도제들이 신이 나서 날뛰는 판에 나도 주책없이 끼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년 간 이어졌던 노예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에리히 슈만은 환갑이 한참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40대의 젊은 도제들 사이에 끼어들어 함께 요란을 떨 뻔했다.
그만큼이나 에리히 슈만과 그 도제들이 ‘폭군 오마르’에게 받아온 핍박은 끔찍할 정도로 지긋지긋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함께한 도제들은 대부분 이제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누워있지만….
에리히 영감은 그런 생각을 굳이 더 이어가지 않고 빈 잔에 게빌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얘기했다.
쪼르르륵.
“그리고 그 뒤로 계속해서 이놈과 아웅다웅하며 지내다보니 시간이 여기까지 흘러버렸어.”
이제는 여든이 넘은 나이.
몸은 여전히 어지간한 젊은이들보다 건장하고, 또 건강했지만 이제는 한없이 밑으로만 가라앉는 삶에 지쳐버린 것일까.
그런 에리히 슈만의 힘없는 중얼거림을 듣던 애쉬가 잔을 내려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영감, 그럼 이제 일은 완전히 그만두게?”
“…아직은 모르겠구나.”
애쉬의 물음에 에리히 슈만은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더 이상 대장간을 운영할 수 있는 인력은 없었고, 이제 와서 새롭게 도제를 구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의 나이가 나이였으니 말이다.
이제는 일에서 손을 놓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게 맞는 판단일 것이다.
“그럼 내 검은?”
애매하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거의 생각이 정해진 것 같은 에리히 슈만의 말에 애쉬가 물었다.
몇 년 전에 약속했던 최고의 검. 그것을 아직 받지도 못했는데 일을 그만둔다는 것 아닌가.
애쉬의 그런 물음에 에리히 슈만이 헛웃음을 지었다.
“설비를 운용하려면 사람이 있어야지. 지금은 사람도 못 구한다, 이놈아.”
이 슬럼 어디에서 그런 전문 인력을 구한단 말인가.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도제들이야 십여 년 이상 같이한 제자들이었기에, 그리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로 같이 시 정부에 밉보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떠밀려온 것이지, 지금 도시 안쪽에서 인력을 구한다고 한들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통이라고 불리는 슬럼까지 자진해서 내려오는 이들도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아직 시 정부에 밉보인 감정이 청산되지도 않았고.
하지만 애쉬는 그런 에리히 영감의 설명에도 진지한 눈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 사정은 됐고, 영감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정말 평생 동안 몸을 바쳐온 이 일에서 이런 식으로 손을 뗄 것인가.
그렇게 보기 힘든 애쉬의 무거운 태도에 에리히 슈만도 헛웃음 짓던 것을 지우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자신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은가.
다른 늙은이들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남은 생을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은가.
사실 그런 것은 물을 것도 없었다.
누가 포기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누가 평생 동안 이뤄왔던 모든 것을 잊고 의미 없이 살아가는 방향을 선택하고 싶겠느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좋아서 포기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에 못 이겨 강요당할 뿐.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억지로 버텨왔으나 이제는 에리히 슈만 자신에게도 끝이라는 게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진심을 이 녀석에게 말해도 될까?
진심을 말 했다가 애쉬가 무언가 무리해서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에리히 슈만은 찰나의 순간 계속해서 고뇌했고, 게빌은 에리히 슈만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느낀 듯 옆에서 조언했다.
“얘기라도 해보시죠, 영감님. 애쉬 저 녀석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뭐?”
진지한 분위기였던 애쉬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반응했지만, 뜻밖에도 에리히 슈만은 그런 게빌의 말이 들려온 직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더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아.”
여든이 넘은 나이.
누군가는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에리히 슈만의 진심이었다.
노인의 가슴속에는 아직 젊은이들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뜨거운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고, 아직은 그것을 꺾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지고 싶지 않았다.
“크흐.”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 않은 에리히 슈만이 술잔 가득 따라진 술을 단번에 넘기고는 호랑이 같은 기세로 외쳤다.
“나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이성적인 판단? 현실적인 요건? 그런 건 어디까지나 의지를 세우는 것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다.
“프흐. 좋아.”
그런 에리히 슈만의 외침을 들은 애쉬가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타오르는 열정을 되새긴 노익장의 눈동자에도 불이 붙은 것 같다.
방금 전까지 곧 죽을 것 같았던 눈동자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가 에리히 슈만에게서 느껴졌다.
그런 에리히 슈만을 보던 애쉬가 그에게 제안했다.
“영감. 아직 기업 쪽을 싫어하는 건 아는데 내가 아는 곳이랑 같이 일 해보는 건 어때?”
“기업이라?”
“어, ‘유성 그룹’.”
애쉬가 기업이라는 말에 일단 인상을 찌푸리고 보는 에리히 슈만에게 대답했다.
노익장의 의지가 살아난 것은 좋았지만, 그 다음은 현실적인 요건을 생각해야 할 때.
유성 그룹이라면 애쉬가 쉽게 연결해줄 수 있었으며, 에리히 슈만에게 부족하지 않은 지원을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설비나 기타 금전적인 것이든, 시 정부와 관계된 것이든.
그리고 마냥 이쪽에만 이득인 게 아니라 유성 그룹 측에서도 에리히 슈만에게서 그에 따른 기술적 도움을 받는 건전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슬럼에서 썩고 있지만 에리히 슈만은 연방에서 손에 꼽는 마스터 랭크의 장인.
이런 대장간에서 쇠나 두들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연방에서 지정한 마스터 랭크의 장인이라 함은 지구의 무형 문화재 같은 느낌이 아니라 최첨단을 달리는 기술 개발과 제작의 정점에 선 전문가를 말하는 것이다.
슬럼에서의 유배 생활로 인해 지식의 습득에서 몇 년 뒤처지긴 했으나 그것도 다시 습득을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을 터다.
“‘유성 그룹’이라면….”
에리히 슈만이 애쉬의 입에서 나온 기업의 명칭을 중얼거렸다.
워낙에 거대한 규모의 기업체다보니 에리히 슈만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슬럼에 유배당한 직후 기술 협력 제안을 해왔던 기업 중 하나기도 했고.
“허어.”
에리히 슈만은 여태껏 자존심과 과거의 후회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의 제안을 거절해왔지만 지금 애쉬 자신을 통해서 건네는 제안만큼은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제안자가 그와 절친한 애쉬였고, 또 그에게 내어진 마지막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기업은.’
대의 따위는 없이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거대한 괴물.
과거 몇 번 기업들을 겪었던 에리히 슈만은 그러한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애쉬의 제안이니만큼 다른 곳들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과거의 후회를 되짚어본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사실.
그렇게 에리히 슈만이 다시 고민에 빠지자 애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장인 정신이 가득한 에리히 슈만이라면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미끼를.
“이번에 유성 그룹에서 개발하고 있는 물건이 있어. 나노머신을 이용한 물건인데 우리 사무소에….”
“…잠깐, 이봐 애쉬! 그건 기밀 사항이야!”
게빌이 진지한 분위기에서 오가던 대화를 듣다가도 애쉬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기겁하며 그것을 막으려했다.
단번에 애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사무소, 그리고 나노머신으로 개발하고 있는 물건.
그것은 게빌이 애쉬의 사무소에 맡겨두고 있는 파워 슈트를 말하는 것이었고, 지금 애쉬는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금지된 기밀 사항 중 하나를 이 자리에서 외부인에게 밝히고 있었다.
애쉬는 게빌이 기겁하며 입을 막으려 들자 가볍게 대꾸했다.
“왜, 기밀 유지 계약서를 쓴 건 내가 아니라 너 혼잔데.”
“그건…!”
그리고 게빌은 그런 애쉬의 대꾸에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유성 그룹의 연구소에 들렀던 것은 애쉬와 게빌 두 명이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밀 유지 계약서를 쓴 것은 게빌 혼자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더 따지고 들 할 말은 없었지만, 거의 연인급으로 보이던 애쉬와 서령의 관계를 생각하면 도의적으로 비밀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게빌이 혹시나 자신에게 무언가 불이익이라도 떨어질까 눈빛으로 따지는 사이 애쉬는 그것을 싹 무시한 채 다시 한번 에리히 슈만의 눈앞에 먹음직스런 미끼를 내걸었다.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나노머신 개발.”
그리고 애쉬와 게빌의 대화를 듣던 에리히 슈만은 그것이 자신을 낚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탐스러운 먹잇감을 물 수밖에 없었다.
“…나노머신이 벌써 상용화 될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어. 그것도 나노머신으로 만들어진 파워 슈트가.”
그럼 그렇지.
에리히 영감이라면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에리히 슈만의 참지 못한 호기심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애쉬가 마지막으로 그 유혹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 우리 사무소에 있는데, 한번 보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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