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1)
* * *
“놈을 왜 그냥 살려 보냈지? 너라면 분명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야 그게 재밌을 것 같으니까.
“…재미? 겨우 그딴 이유로 놈을 살려 보냈다고?”
맞아.
전등불을 받고 있는 것뿐인데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황금빛 머리칼과 눈동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남자의 눈에는 명확한 분노와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스크린 너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핏빛 악마는 그런 남자의 기세에도 아랑곳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의 부하들이라면 사소한 눈짓 한번, 불쾌한 기색 하나하나에 흔들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겠지만 그녀는 아니다.
루디악 벨파인, 그녀와 남자의 관계는 상사와 부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협력 관계.
상사와 부하 비슷한 관계였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일 따위는 없는 그녀가 저 남자의 기분을 살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딴 시답잖은 이유로 내게 그만한 피해를 줬던 놈을 살려 보냈다고…!”
그렇게 치워버리고 싶으면 당신이 직접 치워. 아, 지금은 그 잘난 집안싸움 때문에 바깥으로 눈을 돌리긴 힘든가?
“….”
웃으며 자신을 놀리고 있는 핏빛 악마의 목소리에 황금빛의 남자가 입을 다문 채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여기서 화에 못 이겨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은 천것들이나 할 행태다. 그러나 남자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자리에 앉을 존재.
그렇게 교육 받아왔고, 또 지금도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였기에 감정의 밑바닥을 내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 것과 별개로, 이것만큼은 경고해야 했다.
“너, 우리에게서 비롯되어 떨어져 나간 잡것아.”
…뭐라고?
자신을 부르는 멸칭에 루디악 벨파인이 표정을 굳혔지만, 남자 역시 저 핏빛 악마의 표정 변화 따위에 신경 쓸 위치는 아니었다.
그는 핏빛 악마가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입을 열어 경고했다.
“그 더러운 입은 주제를 알고 놀리도록 해라. 너 따위 천것의 쓸모를 알아준다는 것에 감사하란 말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감히 이 영역에 한 발짝조차 내딛지 못했을 테니까.
남자가 내뱉은 말은 네 쓸모가 다한다면 당장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저 핏빛 악마, 루디악 벨파인이 일개 개인으로서 정말로 과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황금빛의 남자도 잘 알았다.
남자는 스크린 너머의 저 여자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것을 부정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의 능력으로 펼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자의 가문이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것은 감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거대한 기둥이었으며, 일단 뜻을 모아 움직이기만 하면 저 핏빛 악마가 이뤄온 모든 것을 일순간에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었다.
지금이야 내분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 때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이 내분에도 결판이 날 것이었고, 그럼 그때가 돼서도 저 핏빛 악마는 지금과 같이 남자와 협력 관계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아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협력 관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는 상태에서나 유지되는 것.
그때가 되면 이미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일 터였다.
더 이상 루디악 벨파인의 ‘웃는 악마’와 남자의 ‘회사’는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 관계로 남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의 역린을 찔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핏빛 악마를 확인하니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리던 것에 복수를 성공한 통쾌함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그 황금빛 눈동자로 스크린 너머를 내려다보듯 바라보자 핏빛 악마, 루디악 벨파인은 이를 악물고 씹듯이 내뱉었다.
그쪽이야 말로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급사할 수도 있으니까.
“흥.”
남자가 웃기지도 않은 위협에 코웃음 치는 것과 함께 홀로그램 스크린이 뚝 사라진다.
남자 측에서 통신을 종료한 게 아니니 상대방 측에서 종료한 것이다.
‘꽤 열 받았나보군.’
홀로그램 스크린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면 직접적인 폭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이나 남자가 언급한 얘기는 그녀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부분을 찌른 것이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누가 그런 태생이라는 사실을 좋아하겠는가.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축복받아야 할 탄생이 아닌, 스스로조차 혐오할 수밖에 없는 생명.
‘웃는 악마’의 단장인 루디악 벨파인에 대한 문서를 찾아봤던 남자는 그 내용을 떠올리며 비웃음 지었다.
“나였다면 차라리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외부에서 핏빛 악마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된 존재가 다름 아닌 그들, ‘회사’에게서 비롯된 존재라니.
그 안타깝고도 하찮은 탄생을 비웃던 남자는 곧 생각을 다른 쪽으로 전환했다.
애쉬 론모어.
‘회사’와 ‘웃는 악마’의 일을 몇 번 씩이나 방해하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쓰레기를 향해.
‘나보고 직접 처리해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주마.
여태껏 놈을 놔뒀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 거슬리는 놈을 치워버리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전히 ‘회사’의 힘을 쓰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넘쳐나는 돈, 코너, 크레딧이 있다.
크레딧 카드 한 장만 있으면 그를 대신해 움직일 이들은 넘쳐났고, 투자하는 금액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뛰어난 실력의 하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이번에 그가 고용할 자는 암살, 첩보, 침입, 탈취 등 모든 분야에서 정점을 찍고 있는 존재.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외모도, 그 무엇도 알려지지 않은 사신이 놈을 찾아갈 것이었다.
‘사신’이라고도 불리는, ‘죽음과 함께하는 자’가.
‘이것마저 받아낸다면 그땐 인정해주마.’
그저 실력 있는 쓰레기가 아니라 자신들, ‘회사’와 ‘웃는 악마’의 적이라고 할 만한 존재라는 것을.
* * *
슬럼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같잖은 양아치들의 패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건 양반이고, 약에 취해 정신 나간 놈들의 총격음이 들리는 것조차 예삿일.
그 외에도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라던가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깨는 일도 많았으니 슬럼이 얼마나 소란스러운 곳인지 알만할 것이다.
그러나 애쉬는 오늘 평소에 겪던 소란과는 또 다른 소란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건 미안하다니까. 근데 결과적으로 다 좋게 끝났잖아.”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결과론을 떠드는 애쉬의 말. 서령은 그에 열불이 난다는 듯한 목소리로 머릿속을 울리는 것으로 답했다.
애쉬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구식 개인 단말을 귓가에서 멀리 떼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한숨 쉰 거예요? 지금 한숨을 쉬고 싶은 게 누구인데 정말…!
“아니, 잘못 들은 거야.”
‘그 영감은 왜 그걸 또 얘기해서.’
그 와중에 낮은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화내는 서령에게 대답한 애쉬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실의에 빠져 있던 에리히 영감을 유성 그룹과 연결해준 뒤 며칠이 지났다.
서령은 연방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의 마이스터를 영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애쉬에게 감사를 표했고 에리히 영감도 자신을 위해준 애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별다른 일 없이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그것은 애쉬의 바람일 뿐이었다.
에리히 영감이 유성 그룹에 합류하고 며칠이 지난 오늘, 아침 댓바람부터 서령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애쉬가 기밀 사항을 외부인에게 밝혔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덕분에 잠에서 제대로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은 애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령의 잔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무튼,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말아요.
“어….”
괜히 결과는 좋았으니 된 것 아니냐는 말을 꺼냈다가 30분 동안 잔소리를 듣던 애쉬는 기가 쭉 빨린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한참 동안 애쉬에게 불만을 쏟아내던 서령이 만족한 듯 잔소리를 끝냈다.
아, 그리고 저번에 깜빡하고 못 물어본 게 하나 있는데. 신분이 생기면 도시 안쪽으로 들어올 거죠?
“글쎄.”
애쉬가 서령의 물음에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딱히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아서 얼버무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을 뿐.
신분 때문에 슬럼에서 나가지 못할 때는 이 지긋지긋한 슬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정작 그것이 가능하게 된 지금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서령은 애쉬가 그렇게 미묘한 반응을 보이자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전에 얘기할 때는 되게 싫어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마냥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그럼 다음에 도시 쪽에 오고 싶으면 말해요. 사무소를 차릴 자리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알겠어.”
그럼 전 이만 업무를 보러 가볼게요. 조금 늦었네.
“수고해.”
네, 애쉬도 고생해요.
뚝.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친 서령이 통화를 끊었다.
그에 애쉬는 이제 통화가 끊긴 자신의 구식 개인 단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무슨….”
역시 유성 그룹만한 초거대 기업의 후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지 아침 일찍부터 잔소리를 쏟아내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일찍 깨어난 애쉬는 시간을 봤는데,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20분.
스스로 자고 깰 때는 밤을 새는 게 아니라면 거의 볼 수 없는 시간이다.
‘좀 더 잘까.’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잘까 고민한 애쉬였으나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시 잠들기에는 서령의 잔소리로 인해 정신이 너무 맑게 개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른 시간부터 시작하는 하루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