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5화
25화. 껍질을 깨다
1시간 전.
평소처럼 지정된 시간에 유릭에게 향하려던 아니스는 엘린에게 붙잡혔다.
엘린이 둘의 대련을 보고 싶다 말해온 것이다.
가문의 일을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력적으로 일하는 엘린이다.
그런 그녀가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 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걸 아니스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에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고.
“이곳에 수련장이 있다고?”
“예. 도련님께서는 매일 이 산에서 수련을 하십니다.”
“흐응. 별궁에 야외수련장이 있을 텐데 굳이 왜?”
“별궁에선 데릭 도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온전히 본인만의 수련장이 갖고 싶으셨던 거겠죠.”
“일리 있네.”
“아. 발밑이 험하니 조심해 주십시오.”
거친 산길을 두 사람이 막힘없이 올랐다.
가문의 가주 대행과 한 명의 기사.
다소 어색할 것 같은 조합이지만 둘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듯 편안하기만 했다.
둘 다 같은 25살인 데다, 심지어 어린 시절 전투1반에서 함께 수학한 동기이기 때문.
둘의 재능은 그때부터 독보적이어서 당시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선 엘린이 꽤나 앞서가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아니스를 좋은 친구이자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릭이 그렇게 칼솜씨가 좋다고?”
그런 친구가 동생의 검을 봐주고 있다는데 흥미가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예. 늦게 시작하신지라 아직 3성 수준이긴 하지만, 성장세만 보면 독보적입니다.”
“하긴, 확실히 토벌 대회에서도 또래들에 비해 독보적이었지.”
엘린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니스가, 그게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니야?”
“또래에 비해 독보적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봐온 그 누구보다 독보적이란 얘기였습니다.”
“……그건 너나 나나, 그리고 아이작 오라버니까지 포함한 소리니?”
“예.”
아니스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 이상의 고평가에 엘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고지식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유릭이 실력이 그냥 또래 중 제일 뛰어난 정도로 알고 있던 엘린은 인식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아무것도 몰랐구나.’
그녀는 자신이,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가 없진 않았다.
임무는 물론 발렌티나가 내팽개친 가문의 일, 거기에 개인 수련까지 병행하는 그녀는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쁘다.
일하는 걸 싫어하지 않고, 타고나길 활력이 넘치게 태어난 그녀로선 그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에게 쓸 시간이 없는 것만큼은 안타까웠다.
그렇기에, 그녀가 모르는 사이 동생이 훌쩍 변해버린 모습에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가장 어리고 중요한 그 시기에 자신은 함께해 주지 못한 것이다.
“응? 도련님이 안 보이는군요.”
수련장에 도착하자 둘을 맞이한 것은 텅 빈 공터였다.
누가 수련을 했던 흔적은 있지만 정작 그 누군가의 모습이 없다.
두 사람이 천막에 남겨진 유릭의 편지를 발견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1시간 후.
-콰과과과과광!
치솟아 오르는 불의 기둥을 발견하곤, 두 사람이 숲을 가로질렀다.
* * *
3중첩의 화룡검화.
아이스 골렘을 일격에 처치했던 그 태양의 불꽃이 다시금 녹시아에 깃들었다.
이번에 유릭이 노리는 것은 위가 아니라 아래쪽.
토템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마법진에 그가 검을 휘둘렀다.
카치치칭!
반발이 거세다.
마법진에 내장된 자체 방어를 위한 술식이 유릭의 검에 저항한다.
유릭이 이를 악물었다.
단단하다.
아니, 단단한 정도가 아니라 반발력에 자신이 튕겨 나갈 것만 같을 정도다.
그의 발이 살짝 뒤로 미끄러지며 흙바닥이 패였다.
“……!”
밀려나려는 몸을 다잡는다.
유릭이 검을 잡고, 더더욱 힘을 실어 휘둘렀다.
콰직!
땅이 깊게 파이며 마법진에도 금이 갔다.
그러나 부서지진 않았다.
‘젠장!’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마법진에 금을 낸 정도가 최선이라고?
열기가 강해진다.
토템이 서 있는 이곳을 중심으로 열기가 휘몰아치며 모여들었다.
당장에라도 불꽃의 폭풍이 일 것만 같았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어.’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토템은, 이제 곧바로 폭발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단 한 번 휘두를 수 있는 기회뿐.
그러나 같은 방식으론 금을 더 크게 만들고 끝날 뿐이다.
무언가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화룡검화의 화력을 넘을 무언가가.
‘고민할 시간 없어!’
그러나 천천히 생각할 시간은 없다.
유릭은 곧바로 양손으로 녹시아를 들어 역수를 취했다.
그러곤 온 힘을 다해 땅에 내리찍었다.
푹!
지금 유릭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파이어 볼트>.
땅에 박힌 녹시아의 검신에 고대의 룬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트의 술식.
근접해서 마법을 쓰는 것을, 주먹이 아닌 다른 도구로 해보려는 생각은 이전부터 해왔다.
지금처럼 검을 이용하는 것 또한 고려하던 방법 중 하나.
하지만.
화르르르륵!
그 룬어를, 평범한 기운이 아니라 3중첩의 화룡검화로 새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방법이었다.
‘3중첩만 해도 몸속이 타들어 갈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하겠냐고!’
화룡검화를 펼칠 땐 검뿐만 아니라 몸속의 기운도 미칠 듯이 날뛴다.
특히 3중첩쯤 하게 되면 전신 세맥을 모조리 태워 버리겠다는 듯 강하게 날뛰곤 했다.
그렇기에 아이스 골렘을 상대할 때도 최대한 빨리,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일격에 쓰러뜨린 것이다.
그런데 3중첩의 화룡검화를 펼치면서 그걸로 마법의 술식을 자아내고 발동하기까지?
도저히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방법은 이것뿐.’
지금의 유릭에게 더욱 높은 화력을 낼 수 있는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유릭이 남은 기운을 모조리 검화에 쏟아부었다.
한층 더 밝게 타오르는 불꽃이, 한층 더 선명한 룬어를 검면에 새긴다.
온몸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 자글거리기 시작했지만, 유릭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단전에 남은 단 한 톨의 기운조차 끌어올려 쏟아부었다.
녹시아의 검면을 따라 붉게 빛나는 불꽃의 룬어.
-키잉!
이윽고.
콰과과과과과과광!
땅속에서, 화룡검화를 자아낸 파이어 볼트가 터져 나갔다.
땅이 몇 번이나 요동치며 마치 폭풍우 속 파도처럼 흔들린다.
그리고 그 땅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은.
카지지지지직!
모조리 깨져 나갔다.
그 순간 유릭의 시야가 번쩍였다.
콰직!
텅 비어 있는 그의 단전이 쪼개졌다.
부서진 것이 아니다.
알껍질을 깨듯, 3성의 단전이 깨어지며 더욱 크고 강인해졌다.
‘……4성에 올랐다.’
그토록 바라던 4성의 경지에 올랐다.
문득 일전에 유화가 스치듯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천천히 해봐요. 때론 비워야 채워지는 것도 있다고 하니까.”]
“하.”
설마 그때 했던 얘기에 힌트가 있었을 줄이야.
마법진이 박살 나고 토템이 무너져내렸다.
다행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보던 유릭의 눈이, 다음 순간 갑작스레 커졌다.
토템도 마법진도 다 박살 났다.
하지만 모여 있던 방대한 불의 기운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릭 로스카!”
레오르가 소리쳤다.
그는, 방해하던 대령을 팽개치곤 유릭을 막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막대한 기운 탓에 접근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지금 유릭은 흡사 불로 된 태풍의 눈에 위치한 상태였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레오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릭을 비웃었다.
확실히 마법진은 깨졌다.
그러니 재해의 규모는 조금 줄어들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막대한 불의 마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한, 산불이 일어난다는 사실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미친 방화범 새끼가!”
유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르륵!
부서진 토템에서 솟아오른 불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포효하는 불꽃이 마치 지옥의 마수처럼 아가리를 벌리며 날뛰고 있었다.
유릭이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 너 같은 어린놈이 뭘 할 수 있을까! 그건 가주님께서 친히 담아주신 불꽃이란 말이다!”
불꽃 토템의 매개체인 예의 지팡이와 그곳에 새겨진 룬어는 아칸의 가주가 직접 만든 것이다.
스스로의 불꽃을 이용하여.
화염 명가 아칸, 모든 불꽃의 종주라 불리는 아칸 가주가 직접 담은 불꽃.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기 위해 유릭이 손을 펼쳤다.
‘풍령.’
그의 손에는 어느새 품에 넣어뒀던 녹색의 방울이 들려 있었다.
그곳에서 풀어 헤쳐진 바람이 날뛰는 화마(火魔)를 억누른다.
하지만 진압하는 건 무리였다.
‘불을 끌 수는 없어. 하지만 유도는 가능하다!’
마법진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사라진 불꽃은 그저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뛰고 있을 뿐이다.
그 힘이 거대하긴 했지만 흐름을 유도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풍령이 일으킨 바람이 휘몰아치는 불꽃을 제어했다.
유릭이 곧바로 그 불꽃들을 쏟아낼 곳을 찾았다.
‘아.’
하지만 이 산 한복판에 그런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사방팔방이 불에 잘 타는 건조한 풀과 나무밖에 없었으니까.
설령 허공에 쏟아낸다 하더라도 불의 비가 되어 이 산을 덮칠 뿐이다.
‘아니.’
한 군데.
딱 한 군데 있다.
불꽃을 모두 털어낼 곳.
유릭이 풍령의 바람을 이용해 통로를 만들었다.
아칸의 불꽃이 자연스레 유도되어 한 곳을 향하도록.
그리고 그 통로는, 유릭 자신을 향해 있었다.
“정신이 나갔구나!”
그것을 보고 레오르가 어처구니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입에서 한껏 비웃음과 독설이 쏟아졌다.
절대로 될 리가 없다는 둥, 숯덩이가 되어 죽어버릴 거라는 둥.
그러나 그 비웃음의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될 리가 없다. 가주님의 불꽃을 소화하겠다고? 가능할 리가 없지. 우리 아칸도 아닌, 로스카 따위의 꼬마한테 가능할 리가 없어!’
레오르는 자신이 초조해함을 느꼈다.
그러곤 그 감정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초조함이란 결국 무의식중에 유릭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단 뜻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칸도 아닌 로스카의, 그것도 15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어찌 아칸 가주의 불꽃을 집어삼키겠는가.
그런데 왜.
대체 왜 자신은 놈이 성공할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대령.’
유릭이 한곳을 곁눈질했다.
그곳엔 레오르에게 당한, 피투성이가 되어 힘없이 쓰러진 흰 호랑이의 모습이 있었다.
유릭의 속에서 강렬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마치 그것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이, 소용돌이치던 불꽃이 유릭에게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삼킨다.
이 불꽃을 모조리.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격통이 몸을 감쌌다.
화룡검화를 3번이나 중첩할 때보다, 그렇게 중첩한 기운으로 마법을 쓴다는 터무니없는 기행을 벌일 때보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콰직!
그때, 바로 방금 들었던 적이 있는 소리가 들렸다.
알이 깨지는 듯한 소리.
막 4성에 올랐던 염화신무가, 다시 한번 껍질을 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