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43화
43화. 좋은 밤 되세요
황색 지대는 다르게 황금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진짜 황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넓게 펼쳐진 노란빛의 오로라를 얼어붙은 땅이 반사하여 황금빛 세상처럼 보였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느낌과 다르게, 정작 환경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7성 수준이 아니라면 돌아다니기도 힘든 곳.’
칠색의 마경은 초중반까지는 완만하게 기온이 내려간다.
그러다 어느 선을 기점으로 급격히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하는데, 그 기점이 바로 황금의 땅부터였다.
7성 수준의 경지가 아니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대지.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냐.’
자신은 5성이었지만 돌아다니는 정도라면 수가 없지 않다.
최대한 내기를 활성화하고 아티팩트를 둘둘 말아 한파에서 몸을 지키면 된다.
그 한기를 차단해 줄 아티팩트를 빌려 달라는 것이 유릭의 요청이었다.
“음, 좋다! 아직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만 한 번쯤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무엇보다 언제나 너는 이르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곤 했으니 말이다.”
레오폴딘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간 유릭이 보여준 것들이 없었다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섀도우와 신경전을 하라고 보냈더니 하루 만에 굴복시키고, 토벌을 보냈더니 단신으로 아이스 골렘을 베어오고, 첫 임무를 보냈더니 대뜸 왕국의 최고 훈장을 받아오고.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허락을 한 것이다.
“딘. 필요한 물건들을 추려서 유릭의 궁에 보내도록.”
“2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2주? 뭐 그렇게 오래 걸려?”
“현재 황색 지대의 탐사를 위해 들어간 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귀환한 후에 장비의 점검도 하고 하려면 2주는 걸립니다. 더 수준 낮은 장비라면 잔여분이 있습니다만…….”
딘이 말끝을 흐렸다.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의 유릭에겐 등급이 낮은 장비로 황색 지대로 들어갈 만한 실력은 없다는 것이겠지.
“에잉, 어쩔 수 없구만. 유릭, 조금만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천천히 일 보라고 하세요.”
2주쯤 늦는다고 영약이 없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회귀 전 그 영약이 발견된 것은 유릭이 20살은 되었을 때였으니까.
“알겠다. 들었지, 딘?”
“관대한 말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2주간은 잠시 빈 시간이 되었다.
‘마침 잘됐어.’
오히려 시간이 비어서 잘됐다.
첫 임무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
소드 마스터의 검을 받으며 깨달았던 것.
그런 것들을 되새기며 보내기엔 딱 적절한 시간이다.
* * *
파티는 저녁까지 좀 더 이어졌다.
“하하하! 아, 사절분들도 어서 들게. 좋은 소식을 가져와 주었으니 좋은 술로 보답해야지.”
“감사합니다, 태상 가주.”
축하의 자리인 만큼 한바탕 먹고 마시는 분위기가 되었다.
무도회 같은 춤과 음악은 없었지만 맛 좋은 술과 음식, 그리고 유릭이라는 대화거리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슬슬 가고 싶은데.’
유릭은 적당히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주빈인 자리인 데다, 레오폴딘이 한사코 그를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파티 내내 레오폴딘의 옆에 딱 붙어서 포도주를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첫 임무부터 벌써 이렇게 두각을 드러내시니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네요.”
그때 그의 곁으로 웬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경은?”
“아, 죄송합니다. 4번대 기사단의 단장인 게오르그입니다.”
4번대 단장 게오르그.
그가 축하의 말을 건네며, 동시에 은근한 눈길로 제안했다.
“혹시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릭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기사단?”
“예. 저희 기사단이라면 앞으로 공자님이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조력해 드릴 수 있습니다.”
“글쎄. 별로 생각은 안 해봤는데.”
“발터 단장도 엘린 단장도 모두 하나씩 기사단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도 소싯적엔 기사단에서 동고동락하며 수련을 해왔던 겁니다. 공자님도 저희 기사단에 들어오신다면 후일 분명히 단장까지 오르실 겁니다.”
게오르그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유릭을 설득했다.
주로 기사단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은지를 어필하는 내용들.
그가 그런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곧 다른 이들도 찾아왔다.
“잠시만요, 공자님! 그런 일이라면 저희 9번대로 오시지요. 지루한 임무만 맡는 4번대에 비해 저희가 훨씬 재밌을 겁니다!”
“임무를 재미로 하나? 우리 10번대로 오시지요. 순수한 검술이라면 4번대나 9번대보다 훨씬 강한 정예들만 있습니다. 공자님도 검을 쓰신다면 우리와 함께 수련하는 게 가장 만족스러울 겁니다.”
4번대 단장인 게오르그와 9번대 단장인 파벨, 그리고 10번대 단장인 이자크까지.
셋 외에도 다른 기사단장들은 힐끔거리기만 할 뿐 오지 않았다.
유릭을 찾아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는 하나였다.
파벌의 차이.
유릭에게 오지 않은 이들은 유릭의 불의 마나를 좋지 않게 보는 강경파들이고, 찾아온 이들은.
‘게오르그, 파벨, 이자크는 모두 온건파군.’
비교적 온건적인 성향을 지닌 온건파였다.
아칸과 물어뜯고 싸우기보다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때문에 불의 마나에도 편견이 전혀 없는.
“좋게 봐주니 고맙군.”
유릭이 온건파 단장들에게 웃으며 얘기했다.
“하지만 아직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까지는 없어. 당분간은 혼자 임무를 맡아보려고.”
그리고 좋게 거절했다.
기사단에 묶이게 되면 운신의 폭이 극히 줄어든다.
기사단의 정식 스케줄에 따라야 하며 받는 임무의 종류도 기사단의 성향에 맞는 것으로 제한된다.
‘나중엔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벌써부터 발이 묶일 순 없지.’
유릭에겐 28살까지의 기억이 있다.
즉 그만큼의 미래의 지식이 있다는 것.
그러니 지금 기사단에 들어 행동에 제약을 줄 순 없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만약 생각이 바뀌게 되면 꼭 제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이 없더라도 검술을 수련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고마워, 다들.”
이렇게 호의를 보내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아쉽게 돌아서는 게오르그와 파벨, 그리고 이자크를 유릭이 겸손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멀어지는 그들의 등을 보며 유릭이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일단 용의자는 세 명인가.’
그리고 술잔에 비치는 그의 눈동자엔, 방금과 같은 겸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리샤와 비슷하게 아이작이 침투시켰을 부하들.
부르기 편하게 아이작 파라고 지칭한다면, 그 아이작 파는 온건파 쪽에 포진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강경파라고 결백하단 얘긴 아니지만, 일단은 온건파 쪽이 수상하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자신을 백안시하는 강경파 쪽이 오히려 믿음직한 이들이고, 호의를 보내는 온건파 쪽이 의심의 대상이라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것인지…….
‘내가 불의 마나를 익힌 탓도 있고, 아이작 형 때문이기도 하고.’
한 가지 원인의 탓이 아니라 여러 일이 복잡하게 얽힌 탓이다.
뭐 여하튼, 수여식이라니 귀찮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주요인물이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그들의 인간관계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누가 강경파고 누가 온건판지.
같은 파벌 내에서도 누가 누구와 친하고, 누가 누구와 어색한지.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고마워.”
계속해서 찾아오는 가신들의 축하에 화답하며, 유릭의 눈은 파티장 곳곳을 세밀히 살폈다.
그의 머릿속에는 차곡차곡 인물들의 관계도가 작성되는 중이었다.
오늘 작성한 이 관계도는 아이작 파를 색출해 내는 데는 물론, 다른 일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리라.
“오, 이 햄 꽤 맛있네요.”
“그렇지? 우리 요리사가 자랑거리로 삼는 햄이다. 나도 예전부터 즐겨 먹었지.”
겉으로는 할아버지 곁에서 희희낙락 음주 가무를 즐기는 한량처럼만 보이지만.
‘…….’
속으로는 오늘의 광경을 기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유릭이었다.
* * *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유릭은 간신히 해방되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휴우…….”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뺨에서 열기가 올라온다.
저녁 파티는 일찍 끝났으나 레오폴딘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2차에 가게 된 것이다.
흥청망청 마시는 레오폴딘과 조용히 홀짝이는 딘 사이에서 유릭은 몇 시간이나 강제로 술을 마셔야 했다.
“더워…….”
사시사철 추운 엘드가르드의 날씨임에도 열이 올라왔다.
목의 단추를 적당히 끌은 채 유릭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또르르르-
주전자에서 찬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니 그나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드니 흐렸던 초점도 다소는 맞춰진다.
유릭이 한 잔 더 들이켜기 위해 컵에 물을 따랐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누구지? 데릭은 아직 임무에서 안 돌아왔을 텐데?
“누구세요~”
“나다.”
“!”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유릭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머니?”
그곳에 있던 건 그의 어머니인 발렌티나였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들어오시죠.”
유릭의 안내를 받아 그녀가 테이블에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유릭이 불꽃을 일으켜 주전자를 데웠다.
그리고 상비해 둔 찻잎으로 간단히 차를 우려내 대접했다.
시녀들이 탄 것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영 못 마실 만한 것은 아니었다.
“너의 일로 한참 가문이 시끄럽지 않았더냐. 얘기나 들으러 왔지.”
“그렇습니까.”
이미 다른 사람이나 레오폴딘에게 열댓 번은 더 한 얘기였지만, 유릭은 질리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유릭이 간략히 그웬델에서의 일을 얘기했다.
발렌티나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그걸 들었다.
중간중간 질문을 던지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는 편이었다.
“의원에겐 가보았느냐?”
“물론이죠. 그웬델에서도 계속 진찰을 받았고 여기 와서도 방금 할아버지가 부른 의사와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제 보니 왜 이런 시간에 오셨나 했더니…….”
“?”
“할아버지가 불편하십니까, 어머니?”
발렌티나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은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유릭이 피식 웃었다.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지만 레오폴딘이 있는 자리는 불편하여 이런 새벽에 찾아오다니.
가문의 가주이자 초월의 경지에 이른 마도사면서도 인간미가 엿보였다.
“이거. 선물로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유릭이 벨벳 케이스를 꺼내 발렌티나에게 건넸다.
“이건?”
그 안의 물건을 보고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무리 그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비늘로 세공한 브로치입니다. 첫 임무를 기념하여 그곳의 장인을 찾아 부탁했죠.”
드래곤의 비늘.
이미 보고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웬델의 보물 지도는 진짜였던 것이다.
정말로 한때 드래곤이 거주했던 레어.
그러나 그 사실보다도 그녀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한테 주는 것이냐?”
“예.”
선물이라니.
그것도 검이나 지팡이나 비전서 따위의 물건이 아니라, 아름답게 치장된 악세사리의 선물.
과거 유릭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 이후론 받아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고맙구나.”
그녀가 얌전히 케이스를 품에 넣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 입매가 조금은 풀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릭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회귀 전의 유릭의 인생에서도, 그리고 정우로서의 인생에서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룬 것이다.
부모님에게 선물을 드린다는.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닌 자기만족에 불과했기에, 유릭은 무슨 보상 같은 것을 바라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황색 지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던데.”
“예. 경험 삼아서요.”
영약을 찾으러 간단 얘기는 당연히 숨겼다.
“모처럼이니 그곳에 대해 얘기해 주마. 황색 지대가 어떤 곳이냐면—”
발렌티나의 입에서 황금의 땅의 정보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얘기는 어디서 전해 들었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겪고 경험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회귀 전 들었던 소문만을 근거로 영약을 찾으러 들어가는 유릭에겐 더없이 귀중한 정보였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유릭과 발렌티나의 대화는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둘 모두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신기하게 대화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달이 저 머리 높이 떠오를 시간이 되었고.
“……너무 오래 있었구나. 그만 자거라.”
“어머니도, 좋은 밤 되세요.”
발렌티나는 새벽까지 수련을 하겠다 떠나가고, 유릭은 침대 속에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