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61화
61화. 초대가 아니십니까?
떨릴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한다.
듣기로 천마라는 이름은 저쪽에서 마왕이나 마신과 같이 악명 높은 이름이라고 하니까.
자신이라고 해도 갑자기 사람이 와서 ‘당신은 마신의 손자이니 지금 당장 뵈러 가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터.
하지만 유릭이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대화밖에 통하지 않는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상담을 해주는 일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도망칠 수는 있어?’
[“절대 안 되죠! 마교의 추적자한테 저 같은 어린애 혼자서 어떻게 도망쳐요!”]
‘그럼 싸울 수는?’
[“…….”]
‘안 된다는 거지?’
대답이 없어도 알 수 있다.
유릭도 딱히 긍정적인 답변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둘 다 안 되면 결국 만날 수밖에 없네. 만나서 친해질 수밖에.’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그 길밖에 없다.
두려운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친해지거나.
[“친해져요?”]
‘도망치는 것도 싸우는 것도 안 되면 그것뿐이지.’
다행히 생판 남도 아니고 조부와 손녀 사이다.
당연히 친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맞겠지.
‘할아버지니까 손주 애교 한 방이면 뻑 가는 거 아냐? 오히려 엄청 간단할지도.’
[“애, 애교요? 저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아, 아이잉~ 뭐 이런 거 말하는 거죠?”]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고. 예를 들면 음…… 지금 그쪽 계절이 어떻게 되지?’
[“갑자기 계절은 왜요? 봄이긴 한데.”]
‘그러면 꽃이 핀 정원 같은 데서 차라도 한잔하자고 그래봐. 혹시 비가 오는 날씨라면 마당의 정자 같은 데서 빗소리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고 싶다고 한다든가, 아니면 평소에 먹고 싶은 게 있었는데 비싸서 못 먹었던 거. 그런 거 있으면 같이 먹으러 가고 싶다고 해보든가.’
[“-? 뭘 먹으면서 얘기하라는 말인가요?”]
‘꼭 먹는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요는 네 쪽에서 먼저 할아버지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걸 어필해 보라는 얘기지. 그쪽도 그럴 생각이 있다면 응해줄 테니 뒤는 자연스럽게 대화하면 되고.’
그쪽에 그럴 생각이 없는 경우가 문제이긴 하지만, 그건 고민해 봐야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알겠어요! 먹을 걸로 꼬시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니 엄마도 남자는 단순해서 맛있는 요리 같은 걸 해주면 한 방이랬어요!”]
‘…….’
그건 지금 경우랑은 다른 얘기 같은데…….
뭔가 핀트가 어긋나게 알아들은 것 같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본래 초면의 사람과 친해질 땐 같이 밥을 먹는 것만 한 게 없으니까.
[“아저씨가 있어서 살았어요. 저랑 3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어떻게 그렇게 어른 같아요?”]
‘어른 맞아. 올 초에 성인식을 올렸거든.’
[“아하하, 어른 중에선 가장 어린애네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은 것 같다.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남은 일은 천마란 노인과 대면하고 유화가 무사하길 바라는 일뿐.
‘잘하고 와. 너무 떨진 말고. 그쪽도 너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굳이 먼 길을 데리고 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겠죠? 할아버지도 할 말이 있으니까 부르신 거겠죠?”]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다음 일은 너 하기에 달렸어.’
사실 무서운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죽이려는 심산이라든가, 혹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친족을 잔인하게 참살하여 본보기로 삼을 심산이라든가 등등.
하지만 유릭은 그런 가능성은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이 옆에 있다면 모를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선 하등 쓸모가 없는 가정들이다.
[“알겠어요. 내일 아침에 문안 인사 겸 바로 뵙기로 했는데, 그 후에 연락드릴게요.”]
‘나도 일이 있어서 바로 연락은 못 받아. 내 쪽에서 할게.’
[“네. 바쁘신데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도 일 잘 보세요.”]
유화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곤 연락을 끊었다.
유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내일 유화에게서 연락이 올 수 있을지…….
‘내가 걱정해 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저쪽 세계의 일에 유릭은 힘을 보태줄 수 없었다.
그나마 <프로즌 로드>를 가르쳐 주긴 하였지만, 사실 천하제일인이라는 천마 앞에선 자기 위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극성으로 익힌 <프로즌 로드>라면 또 몰라도 유화는 이제 막 습득한 참이니까.
‘기도하는 수밖에.’
두 조손의 관계가 험악하게 틀어지지 않도록.
마침 눈앞에 있는 사막의 신 프라나에게 그런 기도를 올리며, 유릭이 다시 단약을 집었다.
걱정은 걱정이고 할 일은 해야지.
* * *
단약을 먹기에 앞서 유릭은 눈을 감고 몸속의 기운을 정돈했다.
먼저 단전에 자리 잡은 염화신무의 기운.
염화신무의 기운은 평소에는 무척 조용하다.
그러나 유릭이 조금만 의지를 담으면 금방 제어가 힘들 정도로 타오르곤 했다.
‘5중첩 때는 진짜 몸이 다 타버리는 줄 알았지.’
작은 불꽃일 땐 더없이 잠잠하지만 크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말 그대로 불과 같은 성질을 지닌 기운이었다.
‘화력은 더할 나위 없는데 섬세한 조절이 힘들단 말이지.’
그리고 그 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기운.
이쪽은 조절이고 뭐고 유릭은 제대로 사용할 수조차 없다.
‘빙하설월의 마나.’
이 혹한이 기운은 염화신무처럼 한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유릭의 몸속을 계속 순환하고 있었다.
차디찬 기운이 유릭의 열을 식혀준다.
여신상 바로 앞의, 이 작열하는 토굴에서도 유릭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빙하설월의 마나 덕택이었다.
‘내가 따로 쓸 수는 없지만.’
빙하설월의 마나는 유릭은 사용하진 못했다.
마나가 도는 경로에 의지를 담아 방향을 조금 조절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마나를 뭉치거나 쪼개거나, 몸 바깥에 방출하여 술식을 구성하거나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서리 마나의 재능이 얼마나 없는 건지.’
새삼 기가 찰 정도였다.
빙하설월이라는 천고의 영약으로 얻은 기운임에도 할 수 있는 게 살짝살짝 방향을 틀어주는 게 전부라니.
이딴 몸으로 서리 마법을 익히겠다고 폐인 생활을 하던 회귀 전의 자신이 불쌍해질 정도였다.
절대 안 되는 일을 도전하고 있었으니 참.
‘두 기운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단전에 웅크린 염화신무와 전신을 돌고 있는 빙하설월.
두 기운의 위치와 흐름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기곤.
‘먹자.’
유릭이 단약을 꿀꺽 삼켰다.
질끈 눈을 감고 단약을 털어 넣은 유릭이 잔뜩 긴장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예상외로 몸은 아무렇지 않았다.
‘……?’
뭐지 이건?
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흡!”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한 것만 같았다.
끓어오른 용암이 식도와 내장을 달구며 용솟음친다.
당장 입을 벌리면 뜨거운 쇳물이 역류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큽!’
그걸 유릭은 필사적으로 입을 막은 채 감내했다.
거칠게 폭발하는 화산을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는다.
-콰과과과과과광!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의식이 날아가 버릴 듯한 충격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덮쳤다.
그걸 참았다.
최대한 정신을 붙잡으며 몸속의 기운을 관조했다.
지금 유릭의 몸속에 존재하는 기운은 셋.
빙하설월의 기운, 염화신무의 기운, 그리고 지금 먹은 초대의 단약의 기운.
빙하설월의 기운은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도도하게 흐르고만 있었다.
사달이 난 것은 염화신무 쪽.
조용히 있던 염화신무가 날뛰는 단약의 기운과 만나더니, 자신 역시 급속도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단번에 기어를 10단은 올린 듯한 감각.
덕분에 단약의 기운에 더불어 염화신무의 기운까지, 유릭은 두 기운을 꼼꼼히 제어해야 했다.
‘젠장, 옆의 애가 우니까 따라 우는 유치원생이냐고!’
그나마 농담을 할 정신은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마구 울어 젖히는 두 아이를 두고 머리가 하얘져 현실 도피를 하는 모습과 같았다.
앞으로 얘네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막막해졌단 소리다.
쿠웅! 쾅! 쾅! 쾅!
두 기운이 충돌하며 몇 번이나 플레어가 휘몰아친다.
둘의 접점을 들여다보면, 서로 섞이는 부분도 있었으나 충돌하는 부분이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둘을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섞는 것.
그게 유릭의 과제였다.
‘한다. 하고 만다.’
단순히 진정시키는 정도가 아니다.
이 충돌을 완벽히 제어해 내지 못한다면 그만큼 약의 기운이 허공에 날아가고 만다.
노리는 건 100%의 흡수율.
모든 충돌을 완벽하게 진정시키고 약의 기운을 온전히 염화신무의 기운으로 받아들이는 것.
‘…….’
유릭의 의식이 깊이, 점점 더 깊이 침전했다.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외우주>에서 이 세계로 회귀할 때의 과정과 무척 닮은 감각이었다.
의식이 향하는 방향만 반대일 뿐.
* * *
“응?”
문득 눈을 뜬 유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찡그린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분명 토굴 안에서 초대가 남긴 단약을 먹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부지를 둘러싼 담장.
정원처럼 보이는 곳에 정자와 같은 건축물이 있었고, 푸른 잎사귀가 달린 나무와 돌이 둘린 연못도 보인다.
뒤를 돌아보니 그쪽엔 집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우리 쪽 양식은 아닌데…….”
담장도 그렇고 정자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유릭이 사는 세계의 건축 양식이 아니었다.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건축물.
그가 건축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와가 놓여 있는 지붕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잠시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집은 텅텅 비어 있어 생활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고, 연못엔 흔한 금붕어 한 마리 없었다.
정자 역시 그곳에 놓여만 있을 뿐.
묘한 물건을 발견한 것은 집의 뒤편이었다.
“이건…….”
집의 뒤쪽엔 생각보다도 넓은 뒷마당이 있었다.
정원과 같이 연못이나 정자 같은 건 없었지만, 그럭저럭 넓은 공간에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무척 눈에 익은 검이었다.
“이솔렛?”
빙화의 마검 이솔렛.
초대의 애검이고 로스카의 가보이며, 지금은 동생 데릭의 손에 들려 있는 그 검.
그가 무심코 검을 뽑아보려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쩌저적!
몇 개나 되는 고드름이 솟아나며 손바닥이 얼어붙었다.
“큿!”
손바닥이 타는 듯한 느낌.
동상으로 인한 화상의 감각을 느끼며 유릭이 대번에 손을 떼었다.
그러자 손바닥을 얼리던 얼음은 사라져 있었다.
화상 역시 사라져 있어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
강한 거절의 기색.
그러나 이 정도로 포기할 유릭이 아니다.
그가 괜스레 주변을 살펴보곤 다시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쩌적!
여지없이 얼어붙는 손가락.
일단 손가락을 떼고선 유릭이 눈을 번뜩였다.
“해보자 이거지?”
어차피 이 주위엔 아무것도 없다.
어딘지도 모르겠고 단서라고 있는 것은 눈앞에 꽂혀 있는 검 하나뿐.
유릭이 화룡검화를 끌어올려 손바닥을 감쌌다.
그 손으로 단숨에 이솔렛을 잡았다.
치이이이이이익!
얼려버리려는 이솔렛의 기운과 유릭의 화룡검화가 충돌한다.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여느 때와 같은 격통이 손바닥을 덮쳤다.
으득.
오래 끌어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유릭이 이를 악물곤 힘을 주어 검을 뽑으려 하였다.
힘줄이 돋아나며 그의 온 힘이 검을 뽑으려 하였지만, 이 기이한 검은 바위에 꽂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는 유릭을 비웃는 것처럼, 이솔렛은 그곳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큭!”
살갗이 까지고 손바닥이 피로 적셔진다.
더 힘을 줬다간 검을 뽑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뽑혀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
“무식하게 힘으로 해서 되겠느냐?”
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릭이 깜짝 놀라며 힘을 주는 것을 멈추었다.
이솔렛에게서 손을 떼고, 그리고 화룡검화의 기운도 가라앉혔다.
뒤를 돌아보니, 고풍스러운 의복을 걸친 흰 수염의 노인이 보였다.
“당신은…….”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추측이 가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초대가 남긴 단약을 먹고 들어온 공간.
그 공간에 꽂혀 있는 건 마찬가지로 초대가 남겼던 검.
그렇다면 눈앞의 사람은 바로 초…….
“흐음, 참으로 신기한 공간이로군.”
라고 생각하던 그때,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유릭이 처음 이 공간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유릭이 눈을 찌푸렸다.
“혹시…… 초대 로스카가 아니십니까?”
“로스카? 뭐냐 그건?”
노인이 처음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유릭은 알 수가 없어졌다.
초대가 아냐? 그럼 눈앞의 노인은 대체 누구고 여긴 어디란 말인가?
“직접 만나니 참으로 반갑구나, 꼬마야.”
노인이 유릭을 보며 얘기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것 같은, 오히려 가시가 돋친 듯한 말투.
“네가 내 손녀아이에게 들러붙어 있다던 유령이로구나.”
“…….”
그제야 유릭은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유화가 한창 만나러 간다고 걱정하던 그 노인.
‘……진짜?’
천마 설군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