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66화
66화. 노란색의 문양
집 안에서 소리를 지른 이는 이 집의 본래 주인이었다.
얼굴과 몸 곳곳에 피멍이 들었고 발엔 튼튼하기 짝이 없는 족쇄.
빛이 사라진 거무죽죽한 눈을 가진 그는 땅바닥에서 신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바깥의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이곳에 오다가 아이 하나를 찾아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재밌는 말을 하던데요?
초점 없던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을에선 들어본 적 없는 외부인의 목소리.
그 외부인이 마을 바깥에서 무슨 아이를 찾아서 데려왔다고 하지 않은가?
‘헬렌!’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마을의 근처에 있을 법한 아이라곤 촌장과 어른들이 필사적으로 숨겨 빼낸 그 아이뿐일 테니까.
“헬렌! 왜 돌아온 거냐! 빨리 도망가!”
남자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함께 있는 도적놈을 자극할 거란 사실을 알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새끼가!”
“누군진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랑 빨리- 아악!”
아니나 다를까 도적놈이 성큼 다가오더니 퍽, 배를 걷어찼다.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허리춤에 매고 있던 굽은 환도를 뽑아 들었다.
“너 하나쯤 본보기로 처형하는 건 일도 아냐!”
도적놈이 험악한 얼굴로 소리 지르더니 환도를 들어 올렸다.
날붙이가 번뜩이는 것을 보며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에라도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은 흉흉함에 남자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쌔애애애애액!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순간 환도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이상했다.
파공성은 더 멀리서, 정확히는 집의 바깥에서 들려왔으니까.
남자가 조심스럽게 눈을 드니.
“…….”
환도를 들고 있는 그대로 도적의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남자의 눈이 의아함에 물들어갈 때.
푸슈-!
도적의 상체에서 피가 터져 나갔다.
놈의 몸이 사선으로 그어져, 검을 들고 있는 상체가 붉은 핏물을 그리며 미끄러져 떨어졌다.
“헙!”
남자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한 박자 늦게.
끼익.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곤 이내, 쿠구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그대로 사선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깔끔한 절단면을 그리며 무너지는 집을 보며, 남자가 급히 탁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
* * *
“다, 당신 대체…….”
쿠구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집을 보곤 클레어가 입을 벌렸다.
그녀가 그 일을 행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면포로 가리고 있는 호위 무사.
유릭이었다.
“늦진 않았군.”
스릉.
유릭이 엑셀레아를 검집에 수납했다.
사실 녹시아를 뽑아 <화령격>을 사용하는 편이 집도 안 부수고 깔끔했을 테지만 클레어 앞에서 불의 마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엑셀레아를 뽑은 것이다.
집이 부서진 것은 미안하게 됐지만,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걸로 퉁 치는 걸로 하고.
“아저씨! 한스 아저씨!”
“헬렌!”
낙타에 타고 있던 아이가 냉큼 내려선 집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클레어는 아직도 방금 전의 일이 믿기지 않는지 놀란 채였다.
“유진, 당신이 한 일이 맞죠?”
“예.”
유진은 유릭이 가명으로 댄 이름이었다.
“새,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시네요.”
“검의 힘을 빌렸을 뿐입니다. 꽤 그럴듯한 보검이거든요.”
“일개 호위가 보검을?”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 가문에서 하사한 물건입니다.”
“아.”
적당히 둘러대는 변명이었지만 클레어에겐 진실처럼 들렸다.
땡땡땡땡땡!
그때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깨웠다.
-적습이다!
쾅!
마을에 있는 다른 집들의 문을 박차며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한 집마다 최소 3명씩은 튀어나오더니, 족히 백은 될 법한 인원이 유릭 일행을 순식간에 둘러쌌다.
그들 모두가 사막의 전사들이 사용하는 굽은 환도를 들고 있었다.
클레어 측의 한 화염술사가 분개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느냐! 대 아칸 가문의 일곱 번째 공녀이시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
“…….”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뿐.
“네놈들 이름은 알고 있다. 스콜피온이랬나? 사막에선 꽤 유명한 도적단이라지?”
“…….”
“그 알량한 이름을 믿고 이리도 나대는 것이냐? 당장에라도 무릎 꿇으면 카자르 왕가에 인도할 때 선처를 바라는 청원 정도는 내주마.”
“…….”
“어이!”
무슨 얘기를 해도 답이 없으니 화염술사의 얼굴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묘하다.
이쯤 되니 다른 일행들 역시 모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역시 뒷배가 있나 보네.”
클레어가 그리 중얼거렸다.
현재 사막화의 용의자로 가장 수상한 것은 이들 스콜피온.
그러나 아무리 힘 있는 도적단이라도 이 정도 규모의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 불가능 이전에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즉 놈들은 누군가의 손발로 움직이는 수하들.
뒷배는 따로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쳐라!”
그 순간 도적들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기 짝이 없었다.
“잡아요! 물어볼 게 많으니까 전부 죽이지 않게 주의하고!”
“예!”
이쪽에서도 클레어의 호령에 따라 화염술사들이 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클레어 역시 양손을 부딪치더니 허공에 불꽃을 흩뿌렸다.
그 불꽃이 공중에서 원형의 마법진을 그려가더니, 그 안에서 깃털 대신 불이 타오르는 괴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릭이 그 불새를 보았다.
‘전에 봤던 그 마법서인가?’
일전에 성인식 때 자신을 꼬드기기 위해 가져왔던 마법서.
분명 불의 새를 소환하는 마법인가 뭔가 그런 거라고 했었지.
“까악!”
아름다운 주홍빛 깃털과 안 어울리게 까마귀 같은 소리를 내며 불새가 도적단의 머리 위를 돌기 시작했다.
“쳇! 모래술사들은 위쪽을 맡아라! 전사들은 직접 놈들을 친다!”
불새의 등장으로 도적단이 둘로 갈렸다.
모래를 부리는 술사들은 불새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고, 환도를 든 이들은 이쪽으로 달려든다.
곳곳에서 터지고 흩날리는 불꽃에 안 그래도 뜨거운 사막이 더욱 가열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한창 바쁠 때.
“데릭, 글렌. 우리는 빠져나간다.”
유릭은 클레어 몰래 일행들과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다.
“빠져나가? 수상쩍은 놈들을 두고 왜?”
“여기 있는 놈들은 어차피 말단들이야.”
마을의 집들에서 튀어나온 도적들은 그냥 조금 강한 도적들 수준이었다.
일전에 보았던 호람 정도의 술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 증거로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놈들은 단 다섯의 화염술사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단들은 알고 있는 것도 없을 거야. 우리는 지하로 간다.”
“지하에 뭐가 있습니까?”
글렌의 질문에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웜의 둥지로 향하는 통로가 있어.”
그건 방금 메르에게 들은 정보였다.
지하 쪽에 어스웜의 둥지가 위치해 있다고.
* * *
마을에서 도적질이나 하고 있던 말단들.
스콜피온의 핵심인 어스웜의 조련술.
둘 중 어느 쪽이 핵심이냐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고로 후자를 캐내야지 더욱더 고급 정보가 들어올 것은 자명했다.
그 말에 데릭와 글렌 모두 납득했고, 두 사람은 도적들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릭은 바쁘게 불을 지르고 다니는 클레어에게 향했다.
“아가씨.”
“아, 유진! 무슨 일이죠? 그보다 빨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놈들 숫자가- 큭! 꺼져!”
퍽!
클레어가 끈덕지게 달라붙는 도적놈 하나를 발로 후려 차 떨쳐냈다.
그러나 한 놈을 떼어내면 두 놈이 달려든다.
두 놈을 떼어내면 네 놈이 달려들어 끝이 없는 와중.
“도련님과 저희는 지하 쪽을 보고 오겠습니다.”
“네!?”
유릭이 클레어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였다.
“땅이 수상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아마 어스웜이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콜피온 하면 어스웜의 조련술로 유명하니까요.”
“그건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여길 정리하고 같이 가면 되지 않나요?”
물론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게 맞지만, 두 가지 이유로 기각이다.
첫째로 위쪽의 소란으로 아래에 있을 핵심 인원들이 도주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만 정보를 독점하고 싶으니까.’
클레어와 아칸의 술사들의 발이 묶여 있을 때 자신들 쪽에서 사건의 핵심 정보를 가로채고 싶어서.
유릭은 단순히 사건의 해결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 이후.
사건이 무사히 해결된 후에 사건의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할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당연히 클레어보다 먼저 정보를 얻는 쪽이 유리하다.
“이쪽은 맡기겠다는 도련님의 전언입니다.”
끙끙거리는 클레어에게 유릭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아닛, 큭!”
그 목소리에 남은 웃음기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는지 클레어가 울컥했다.
하지만 쇄도하는 도적들을 상대하느라 유릭을 붙잡을 순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유진이란 호위에게 굉장히 호감이 있었는데 뭔가가 울컥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살살 긁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때쯤 이미 유릭은 클레어에게서 멀어진 후였다.
데릭과 글렌이 미리 뚫어놓은 길을 따라 빠져나가, 마을 어귀에 있던 지하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괜찮겠습니까?”
글렌이 슬쩍 마을 한가운데를 보며 물었다.
그곳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클레어나 아칸의 술사들이 대단하다곤 하나 고작 다섯.
백에 달하는 도적들을 상대하기는 꽤나 버거울 터였다.
그냥 도적도 아니고 뒷배가 있는 묘한 느낌의 도적들인데.
“아칸 놈들을 걱정할 의리가 어딨어? 우린 우리 임무나 하면 되지.”
“맞는 말이다.”
천연덕스러운 유릭의 말에 데릭 역시 끄덕였다.
본디 불의를 보고 그냥 넘기지 않는 데릭이었지만, 그런 그라도 적대 가문인 아칸에게까지 관용적이진 않았다.
‘거기다 따지자면 아래쪽이 훨씬 위험할 테고.’
아무리 수가 많아도 말단들을 상대하는 것보다야, 놈들의 핵심 시설에 침입하는 쪽이 훨씬 더 위험할 터.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글렌이 픽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가시죠.”
세 사람이 지하로 향하는 토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마도 어스웜이 지나다니던 통로로 생각되는 그곳으로.
* * *
‘이 통로를 따라가면 어스웜의 둥지가 있단 말이지?’
-네. 마을의 바로 아래 지하는 아니고 거리가 꽤 되는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리지?’
-뛰어가면 한두 시간 정도?
그들 일행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최소 5성 이상의 검사란 걸 생각하면 꽤 먼 거리였다.
“먼저 가서 정찰하고 올까?”
발터의 주법을 익힌 데릭이 그렇게 제안했다.
발이 빠른 자신이 먼저 가서 선발대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같이 움직이지.”
이 앞에는 어스웜의 둥지.
당연히 몇 마리나 되는 어스웜이 웅크리고 있을 테고, 거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배후와 직접 연결돼 있는 인원이 있을 수도 있어.’
더욱 위험한 것은 사람.
만약 배후가 카자르 왕국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아칸의 1공자나 2공자라면 방심할 수 없다.
아칸의 핵심 인력과 자본이 투입된 곳이란 얘기니까.
“일단 이거 입어.”
“이건?”
“그웬델의 수정개미굴에서 입으셨던 그 망토군요. 한 벌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몇 벌 있어.”
유릭이 데릭과 글렌에게 아티팩트인 위장 망토를 건네주었다.
어두운 토굴 안에서 그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가려졌다.
실력자가 본다면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대번에 들킬 테지만, 그래도 일순간 눈을 속일 정도는 될 터.
“가자. 우리 임무의 목적지가 바로 앞이다.”
사막화를 진행 중인 이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카자르 왕국의 수작인지 아칸의 공자의 음모인지.
진실이 목전에 있었다.
* * *
두근-
어두운 지하 속, 고기의 육벽 같은 것이 꿀렁이며 갈색의 알을 우수수 토해냈다.
모두가 어스웜의 알들.
이곳은 그 부화장이었다.
“어휴, 징그러.”
“보초 제대로 서. 만에 하나의 일이라도 벌어졌다간 우리 전원 모가지니까. 해고라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뜻인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란 게 있겠어? 누가 이 구석진 곳의, 거기서 더 구석진 이 지하까지 들어오겠어?”
그곳을 일단의 무리가 지키고 있었다.
모두 호람과 똑같이 황색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사내들.
정체를 숨긴 채 도적의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 모두 아칸 소속의 술사들이었다.
정확히는 일부는 아칸의 화염술사, 그리고 일부는 아칸에게 영입된 사막의 모래술사다.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려. 우리 임무는 이걸 지키는 거니까. 이게 없으면 카자르 왕국의 추적을 피해서 도적 흉내를 내면서 다니지도 못했어.”
술사 하나가 알을 토해내는 고기벽을 보며 얘기했다.
보기에는 저래도 어스웜의 여왕 개체다.
그런데 천적인 인간을 두고도 일절 흉포해지지 않고 오히려 고분고분하기만 하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 술사들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주군인 루카스가 협력자에게 받았다며 갑자기 보여준 것이었으니까.
한 가지 추측을 하자면, 머리 쪽에 있는 노란색의 문양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점뿐.
그건 머리가 일곱 개 달린 괴조가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감싸고 있는 문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