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44화
144화. 한 가지만은
설군악이 유릭을 놓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평온한 공간.
일전에 유릭을 만났을 때 찾아왔던 로스카의 ‘성역’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루메나의 성역.
유릭의 세계, 천신전의 중앙에 있는 성역의 편린 따위가 아닌 바깥 세계에 위치한 진정한 의미의 성역이었다.
로스카의 성역에 들렀을 때는 근처에 있던 웬 여신의 방해를 받아 금방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공간의 주인이 그를 초대한 상황.
그는 정식으로 자격을 받아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유릭을 살리기 위해.
“이 아이와는 무슨 관계인가?”
다만 알지 못하는 것은 이곳의 주인과 유릭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살리려 하냐는 것이었다.
-…….
설군악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그가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 별 관계는 없다는 거군.”
돌아온 답은 딱히 관련이 없다는 것.
유릭을 살리려는 이유도 평범한 인명 구조라는 얘기였다.
치유의 신으로서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는 말.
‘치유의 신인가. 과연.’
설군악은 성역에 충만한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그녀의 말에 납득했다.
이런 기운을 품고 있다면 그야말로 치유의 신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엔 자신이 아닌 그녀가 전문일진대, 왜 유릭의 치료에 자신을 부를 필요가 있었는가.
‘이것 때문이었군.’
그 이유는 방금 한 번의 촉진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유릭의 상태는 상처가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상처를 치유하고 기혈을 바로잡아 줘도 곧바로 그걸 파헤치는 광폭한 기운이 존재한다.
그 기운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치유를 퍼부어도 도저히 낫지 않으리라.
‘유화가 들은 소리가 이것이었군.’
이 초대가 있기 조금 전 유화가 다급히 그를 부르러 왔었다.
유릭 쪽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폭음이 들려온다고.
그래서 설군악은 유화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고, 덕분에 루메나가 그를 초대할 때 곧바로 응할 수 있던 것이었다.
‘쯧, 어째서 이런 위험한 기운을 품게 된 건지.’
자초지종이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큭…… 으…….”
-…….
유릭은 도저히 잘 말을 할 상태가 아니었고, 루메나는 침묵만 하고 있다.
치료하라고 불러놓고 설명 하나 없다며 그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감사해야겠지.’
이렇게 초청을 해준 것만 해도 사실 큰 배려였다.
다른 세계의 신격을 가진 자신을 성역에 초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렵다기보다는 적지 않은 대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 덕에 마음 놓고 유릭의 상세를 살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루메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리라.
“유릭. 일어나 앉을 수 있겠느냐?”
“으…….”
설군악의 말에 반응하여 유릭이 꿈틀거렸다.
다행히 말이 들리긴 하는 모양.
그러나 설군악은 손 하나 내밀지 않고 그저 유릭을 바라만 보았다.
부축도 일으켜 주려는 기색도 전혀 없다.
“매정하다 생각하느냐?”
유릭이 흘리는 피에 루메나의 샘은 이미 붉은 웅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샘솟는 청아한 물줄기보다 유릭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더욱 많을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도 설군악은 느긋하게 유릭을 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네게 그런 광오한 기운이 깃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너의 뜻으로 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
그렇지? 라고 물어봤자 유릭은 대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설군악은 그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유릭이 모두 듣고 있을 거라 믿으며.
“네 힘으로 일어나 앉거라. 우선은 그것부터 시작이다.”
그것은 유릭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요구였다.
일어나긴커녕 당장 몸을 추스르는 것도 힘들다.
루메나의 힘으로 지속적으로 치료는 되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그네시아의 기운은 그를 파먹고 있었다.
유릭은, 아니, 이 세상 누구라도 지금의 몸으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설군악이 쓰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유릭의 손 가까이, 유릭이 볼 수 있는 곳에 손을 내밀었다.
“만약 내가 너무 매정하다 생각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손을 잡거라. 내 친절히 일으켜 주마. 하지만 아직 그 의지가 남아 있다면…….”
스스로 일어나 앉아라.
설군악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얘기했다.
그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유릭은 손녀딸의 병을 고쳐준 은인이다.
유릭이 어느 쪽을 택하든 경의를 표하며 최선을 다해 도와줄 의리가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보여줬으면 하는 모습은 있었지만.
“크…… 윽…….”
유릭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초점 잃은 두 눈이 설군악의 손을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유릭의 손이 샘을 기어 움직이며, 설군악의 손으로 다가가는 듯했다.
그러나.
-탁.
그의 손은 설군악을 무시한 채, 샘의 바닥을 짚었다.
없는 힘을 끌어모아 바닥을 밀어내며 유릭이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의 몸이 천천히 일어난다.
두 발로 서는 것은 아직 무리였지만, 어떻게든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에는 성공했다.
“잘했다.”
설군악이 피식 웃으며 빈손을 거뒀다.
그래, 이래야지.
그가 흡족한 눈으로 유릭을 보았고, 그때 유릭은 이미 눈을 감고 운공에 빠져들고 있었다.
설군악은 발을 옮겨 유릭의 등 뒤로 향했다.
그가 손을 펼치자, 그 손으로 막대한 자연지기가 모여 복잡한 구성을 이루기 시작했다.
“내게 도움받는 것을 너무 개의치 말거라. 너는 이 대법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이미 무아의 경지에 빠져 있는 유릭이었지만 신기하게 설군악의 목소리는 귀에 박혀 들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자연의 물과 바람 소리와 같아, 조금도 유릭의 집중을 해치지 않았다.
“본래라면 절맥으로 고통스러워할 유화를 위해 준비했던 대법이니 말이다. 오랫동안 준비했건만 네 덕분에 전혀 쓸 일이 없어져 버렸지 뭐냐. 하하하.”
허허 웃으며 설군악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알다시피 무림에서 절맥은 완전히 극복된 체질이 아니고, 따라서 이 대법 역시 만능은 아니라고.
그저 너를 보조해 줄 뿐이고, 모든 것은 너 자신에게 달렸다고.
그런 주의사항과 함께.
“가마.”
쿠웅-!
그의 손바닥이 유릭의 등에 강하게 부딪혔다.
* * *
“유릭! 유릭 로스카!”
글렌이 물속에 누인 유릭을 붙잡곤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눈을 뜰 리가 없다.
글렌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죽었어?
정말로?
……이럴 가능성을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다.
불도마뱀의 심장을 삼키겠다고 할 때부터 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하지만 글렌은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루메나의 성역에서 복용하겠다는 계획이 그럴싸해 보여서?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그보단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유릭이 실패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다른 누군가가 불도마뱀의 심장을 먹겠다고 하면 자살 희망자라며 욕했을 그였지만, 유릭에 한해서만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지난 수년간 유릭이 보여준 것들은 컸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유릭이, 지금껏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던 녀석의 여정의 끝이 고작 이런 거라고?
‘침착…… 침착해, 병신아.’
글렌이 한 손으로 이마를 덮으며 심호흡을 거듭했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누구의 죽음을 보더라도 이렇게 흔들릴 자신이 아닌데.
그런데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던 유릭 로스카의 죽음을 목격하니 멘탈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앗, 조, 종자님! 장벽이!”
그때 앞쪽에서 자클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니 성기사들이 라엘라의 빛을 찢어발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유릭의 일로 글렌의 정신력이 크게 흔들리자 라엘라의 힘 역시 흔들린 것이다.
글렌이 다급히 다시 라엘라를 잡았지만 이미 찢어진 장벽을 수복하는 건 무리였다.
더욱이.
‘……막을 필요가 있나?’
이름 모를 탈력감에 팔에 힘조차 잘 들어가지 않았다.
“잡아! 끌어내라! 계시의 범인이다!”
뮬베인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성기사들을 재촉했다.
비단 그의 명령이 아니라도 성기사들은 유릭을 끌어내려 달려들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죄를 지은 그들에게 있어, 계시의 범인을 끌어낸다는 것은 유일한 속죄의 길처럼 보였다.
유릭의 변고로 크게 흔들리던 글렌의 눈이 다시 번뜩이기 시작했다.
유릭이 정말 죽었는지는 모른다.
더 자세히 확인해 보면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유릭을 놈들에게 건네줄 수는 없었다.
‘오기만 해봐라.’
그의 눈에 지금껏 본 적 없던 살기가 깃들며 라엘라가 빛을 뿜어냈다.
그 밝고 따스한 빛의 뒤쪽에는, 더없이 차갑고 냉철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때.
“멈추세요!”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자클린이었다.
“성녀님?”
“……비켜주십시오.”
성기사들이 위협적으로 자클린에게 으르렁거렸다.
평생을 검을 붙잡고 산 이들의 살벌한 눈빛이 가녀린 소녀에게 쏟아졌다.
성녀라곤 하지만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마을 사람이었던 소녀.
자클린은 덜덜 떨면서도, 그럼에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
“…….”
성기사들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성녀를 상처 입힐 생각은 없지만, 붙잡아 치워버리는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 정도도 불가능해서야 교황을 상대로 반기를 들 리가 없다.
저벅.
저벅.
그들이 점점 자클린에게 다가왔고.
눈이 흔들리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리 소리쳤다.
“이들은 계시의 범인이 아닙니다! 범인은……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뮬베인과 뮬베인이 끌어들인 마녀들이에요!”
자클린의 고함에 성기사들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 정도 반론이야 그들도 이미 생각했던 바이다.
아니, 오히려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유릭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으니.
“그건 성녀님의 추측 아닙니까?”
“계시의 내용은 이미 들었습니다. 괘씸한 자를 배제하라는 내용이었다죠? 제가 보기엔 성역을 더럽히는 저자보다 괘씸한 자는 없어 보입니다만.”
자클린의 필사적인 외침 따위 그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순간 자클린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 역시 성기사들이 이렇게 반응하리라 몰랐던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더욱 큰 결심으로 이곳에 선 것이었다.
“아뇨! 또 다른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루메나께서 말씀하신 자들은 검은 늪의 마녀들과 그 마녀들을 끌어들인 자입니다!”
“……!”
과연 그 말에는 일동 모두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의 발이 속박에라도 걸린 듯 그 자리에 묶였고, 뮬베인이 눈을 크게 뜨며 바르르 떨었다.
“거, 거짓말이야…… 거짓…….”
그가 그리 얘기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지, 진짜로?”
“성녀가 계시의 일로 거짓을 말할 리 없잖아!”
성녀의 입에서 나온 ‘계시’라는 단어는 남다른 파급력이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성흔이…….’
자클린의 손목 안쪽, 그곳에 새겨졌던 성흔이 사라지는 것을 오직 그녀만이 목격했다.
성녀란 계시를 받는 자.
즉 신의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
거짓을 고하는 이에게 신의 말을 전달할 자격 따윈 없다.
계시의 일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성녀로서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뜻.
‘아…….’
성흔을 중심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던 루메나의 신력이 사라져간다.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허탈하고…… 그리고 슬픈 일이었다.
따스히 감싸주던 어머니의 사랑이 멀어지는 것과 같은 감각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은 성녀로서 탈락이다.
루메나께선 그 성흔을 거두어가셨고, 그것을 발견한 교단은 자신을 내치겠지.
신의 이름으로 거짓을 고한 이에게 자비로운 처분이 내릴 리가 없었다.
내려질 처분은, 아마도 파문.
“아니,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많은 것을 짊어진 결단이었기에 누구도 자클린이 거짓 계시를 얘기했다 생각하지 못했다.
성기사들이 핼쑥한 얼굴로 웅성거린다.
어찌 됐건 그들이 들고일어났던 명분은 교단의 정상화였고, 그렇기에 신의 계시를 무시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교단이라면 계시를 무시하는 일 따위 절대 하지 못하니까.
한편, 그들과 반대로 자클린의 표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한층 차분했다.
“루메나께서 말씀하신 괘씸한 자들이란 마녀와 그 마녀를 끌어들인 이라 하였습니다. 즉 저기 있는 뮬베인 추기경 하나뿐이죠.”
“!”
“아직 당신들에게 신앙이 남아 있다면 신의 뜻을 집행하세요!”
“……예, 옛!”
“잠, 아니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다급한 뮬베인의 외침을 들으며 자클린이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두 손을 모았다.
신께 올리는 사죄의 기도.
‘당신의 이름을 사칭하여 거짓을 고한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루메나는 사람들에게 거짓을 고하지 말라 하였다.
그녀는 그 교리를 어긴 것이다.
신의 이름을 사칭한다는, 성녀로서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으며.
이젠 그 성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은 지킬 수 있었으니까.
-파앗!
그녀의 앞으로 다시금 빛의 장벽이 펼쳐진다.
정신을 차린 글렌이 땅을 그어 솟아 올린 것이었다.
피투성이의 유릭이 그의 품에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래도…….’
루메나는 이렇게도 얘기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