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60화
160화. 눈을 감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몸이 대지에서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감각.
물론 유릭의 발은 떠 있거나 하지 않고 단단히 땅을 밟고 있다.
그럼에도 신묘한 부유감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예전에 성역에서.’
루메나의 성역에서 이그네시아의 심장으로 환골탈태를 이뤘을 때.
상천의 문을 목도했던 그때,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이 처음으로 느꼈던…….
‘……아니.’
생각해 보니 달랐다.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도 훨씬 전. 숫자로 따지면 몇 년이나 이전의 일.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던 중, 호연이란 사신에게 살해를 당해 <외우주>로 가게 되었을 때.
예의 이름 모를 노인의 앞에 서 있을 때의 느낌이 바로 이것과 똑같았다.
그는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고, 어떤 존재들이 그곳에 있는지.
엘가이아의 언령이 떠오른 된 것은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상천에 발을 들인 적이 있다.
그건 대륙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는 위업이었다.
8성에 달한 마스터는 문 앞에 도달한 것이 전부이며, 9성이라 할지라도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들인 것이 전부이다.
대륙에 셋 있다는 10성의 반신들이나 그 너머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유릭이 네 번째.
현 대륙에서, 상천의 풍경을 제대로 알고 있는 단 넷뿐인 인물.
이 부유감을 깨닫고 나니 엘가이아의 언령이 보이게 되었다.
마치 위쪽에서,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조하듯 그가 보인 것이다.
‘다른 10성들도 다 이럴까?’
어머니 발렌티나 로스카, 아칸의 가주 라그룬 아칸, 그리고 마도성 알테라시아의 성주.
그들도 다른 마스터의 언령을 꿰뚫어 보고 모두 습득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전자는 얼추 맞을 테지만 후자는 아니다.
근거가 없음에도 유릭은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화령금안.
엘가이아의 그 붉은 금안이 자신의 안에서 깨어난 것은…….
‘내 언령과 관계된 거다.’
자신의 언령은 대체 무엇일까.
엘가이아의 언령이 세상을 구분하는 눈인 것처럼 자신은 타인의 언령을 보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엘가이아의 언령을 습득한 지금도 자신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아직 더 위가 있다.
……하지만 일단은.
“감사하지, 필리페 아칸.”
그의 검이 하늘로 치솟는다.
촤악!
솟아오르는 검격에 마인이 갈라졌다.
술법의 본체인 갑주는 멀쩡한데, 그 안에 있는 마인이 불을 토하며 터져 나갔다.
콰과과과광-!
마인이 증발하고 텅 빈 적화린이 쿵, 떨어진다.
마치 둘만의 경기장처럼 된 그 장소에서, 유릭은 눈이 충혈된 필리페와 마주쳤다.
“유, 유릭 로스카……!”
그의 눈에선 지금 당장에라도 핏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술법이 깨진 것으로 타격을 받은 것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서 있기만 하는 상태.
그 앞에 유릭이 서 있었다.
“역시 너와 싸우는 게 답이었어.”
감사한다.
깨달음의 반석이 되어주어서.
“큭……!”
필리페가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분노에 찬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툭.
그의 팔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축 늘어졌다.
적화린은 그의 전부나 다름없는 술법.
그것이 파훼된 지금 그에겐 더 이상 저항할 길이 없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유릭이 이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과연.”
그의 눈에 필리페의 모습이 비친다.
단순히 빛에 반사되는 가시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보다 깊은 내면의 일까지.
그리고 그곳엔.
“너, 정상적인 마스터가 아니구나?”
엘가이아의 것과 같은 완성된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얼기설기 조잡하게 엮은 것 같은, 간신히 그릇의 형태만을 띠고 있는 형상.
이런 비슷한 얘기를 유화에게, 정확히는 유화를 통한 천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마공 같은 걸 익혔군.’
필리페가 익힌 것은 정상적인 비전이 아니었다.
“!”
필리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들켜선 안 되는 것을 들켰을 때와 같은.
불안과 초조가 그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 * *
어렸을 때부터 그는 요령이 좋은 아이였다.
붙임성 없고 고지식한 형에 비해 처세술이 능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동생에 비해 신체 능력도 뛰어났다.
둘째로 태어난 그는 루카스와 샤니스의 장점을 모두 합친 듯한 아이였다.
-자, 골라보아라.
그래서 그의 아버지 라그룬이 아칸의 비전을 담은 비고로 데려갔을 때.
그는 수많은 비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을 요령 좋게 골라낼 수 있었다.
다른 어떤 비전보다도 익히기 쉽고, 빠르게 경지가 상승하는 최고의 비전을.
그때 고른 것이 적화린이다.
-정말 그걸로 되겠느냐?
-예!
그때의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히죽 웃으며 자신을 떠보는 듯한 표정.
처음에는 정답을 고른 것에 대한 기대의 표정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건 비웃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땐 아버지가 웃어주었단 것에 들떠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필리페는 다른 질문을 하였다.
-아버지, 형은 뭘 골랐나요?
-루카스는 말이다…….
형인 루카스가 선택한 비전의 이름을 듣고 필리페는 코웃음 쳤다.
그건 아칸의 비전들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비효율적이며, 그렇다고 확실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비전이었다.
잘 정립된 기술이라기보단 그냥 옛이야기를 대충 끄적여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보는 눈도 없다고 형을 비웃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걷다니,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조금만 둘러보면 이리도 간단하고 쉬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형은 왜 미련하게 눈앞의 험한 길만 보며 달릴까.
실제로 적화린을 익히기 시작한 필리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형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먼저 태어난 그보다도 앞서 마스터에 도달했다.
그땐 세상을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고, 자신의 앞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아니, 조금 다르다.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자신은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도 손쉽게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멍청하게 장애물을 뚫지 못하면 나아가지 못하는 미련한 형과는 다르게.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마치 꽉 막힌 것처럼, 경지가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왜! 왜!
어릴 때부터 요령이 좋았던 그는 수련을 할 때도 적은 시간에 최고의 효율을 추구했다.
그랬던 수련 시간을 억지로 늘렸다.
영약의 소식이 들려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퍼먹었다.
모든 시간과 재력을 쏟아부어 경지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에도 그의 경지는 막혀 있었고.
어느 날, 그는 루카스와의 대련에서 패배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그 덜떨어진 형한테 질 수가 있어!
굴욕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에도 형보다 뒤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문의 무인은 모두 형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먼저 마스터가 된 건 나인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식한 형과 다르게 자신은 가신들과의 친분에도 많은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늙은 장로들이나 가신들은 자기보다도 동생 샤니스를 제 손녀처럼 예뻐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에겐 미안하다 말하며 결국은 샤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신의 곁에는 얄팍한 자들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어릴 땐 이렇지 않았잖아?
약에 손을 댄 것은 그때부터였다.
온전한 영약을 찾는 건 아칸인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어렵게 구해 먹어도 별 효과도 없었다.
그래서 온전하지 않은 약이면 어떨까 싶었다.
이른바 독이나 마약 따위로 분류되는 것들.
물론 그것들도 별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시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크, 크하하하하하! ……! 쿨럭! 쿨럭!
하지만 그런 약이 몸에 좋을 리도 없었고.
오히려 그의 몸은 더욱 떠 빠르게 망가져 갔다.
이러다 언제 길바닥에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때, 하나의 소식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벨스 가주가 넥타르를 손에 넣었다고?
넥타르.
옛 요정들이 마시며 노닐었다는 신비한 꿀.
이미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약을 실험해 봤다.
이제 남은 것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그래, 넥타르 같은 그런 영약들뿐.
-가자.
이젠 시간도 없었다.
언제 죽어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 되었단 것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넥타르라면 살 수 있을지도.
어쩌면 오랫동안 멈춰 있던 경지조차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 * *
“쿨럭!”
필리페가 피를 토했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몸이, 마인이 터지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유릭의 눈에는 보였다.
그의 기혈은 이미 정상으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마공을 익힌 자들이 저렇다고 했었지.’
천마의 말에 따르면 마공은 정상적인 기혈을 꼬고 비틀어 억지로 지름길을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처음엔 익히기 쉽고 경지 상승이 빠르다.
하지만 경지가 높으면 높아질수록 그 폐해가 찾아온다.
억지로 꼬아 지름길을 만들어 놓은 기혈은 심기체의 밸런스를 급속도로 망가뜨리며, 어느 시점부턴 정순한 마나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으로 느끼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무너진다고.
망가진다도 아닌 무너진다는 천마의 표현은 듣는 유릭의 등골마저 서늘하게 하였다.
대체 어떤 몸이 되길래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오래 버티긴 힘들어 보이는구나.”
“네놈이…… 네놈이 뭘 안다고.”
필리페가 입술을 씹으며 유릭을 노려보았다.
어찌나 강하게 무는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날 정도였지만 이미 토혈을 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티도 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내가 앞당겨 버렸군.”
이미 필리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 일 없이 얌전히 요양했다면 몇 년은 더 살았을 것이다.
그 몇 년이 자신 때문에 앞당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뭐. 동정이라도 하겠다고?”
“아니.”
물론 그렇다고 동정하거나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필리페가 이렇게 된 것은 본인의 선택이며, 애초에 마약을 팔아 수많은 이의 인생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이제 와서 몇 년 더 일찍 죽는다고 동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마디만 해주자면.
“그렇게 쓰러진 채로 죽을 거냐?”
“……뭐?”
“일어나. 검을 들어라. 아, 너는 검이 아니라 권으로 싸우던가?”
주변을 둘러쌌던 적화린의 잔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두 사람의 모습은 경비대장과 다른 병사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딱.
유릭이 손가락을 튕겨 불을 질렀다.
불의 벽이 두 사람을 감싸며 밖에선 보이지 않는 투기장을 만들었다.
이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
“마지막만큼은 무인으로서 죽을 기회를 주마. 네 목을 가져가는 대가라고 해두지.”
“건방진 새끼…….”
으득, 필리페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올라가지 않는 팔을 들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분명한 전의를 가지고 그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걱!
한 줄기 선과 함께 그의 목이 떨어지며, 불의 장벽이 스르르 내려갔다.
아칸의 2공자 필리페 아칸.
스스로의 재능에 취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고,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 남자.
그가 이 땅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