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61화
161화. 잿빛 피부
시야를 가리고 있던 불의 벽이 내려가고 좌중엔 정적이 일었다.
그 안쪽에 펼쳐져 있던 광경.
필리페의 목이 떨어져 있고 유릭이 일어서 있는 장면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 마스터를…….”
그들 중 누구도, 이 자리에서 필리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는 없었다.
시간만 끌고 있으면 된다고.
그러면 로스카 측의 마스터가 나타나 처리해 줄 것이라고.
그조차도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개 병사였고, 도주하는 마스터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돌진하는 오우거의 앞을 가로막는 정도의 재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결과는.
‘죽었다.’
필리페의 목이 떨어졌다.
당당히 서 있는 것은 유릭 로스카 쪽.
이제 21살인가 22살인가밖에 되지 않는 젊은 청년.
그들의 아들이나 조카뻘인 아이였다.
그 사실에, 방패를 쥔 손에 땀이 흘렀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뻤지만 지금은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지금 자신들은 역사의 한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먼 훗날 위대한 존재가 될 이의 첫 행보를 목격하는?
제법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세상천지 21살의 청년이 마스터를 꺾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우, 우오오오오!”
“우아아아아아!”
유릭의 승리는 그들의 꺼져가던 웅심(雄心)에 불을 붙였다.
비록 그들이 한 일은 없었지만, 이 현장을 직접 보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야깃거리였다.
한동안 술자리에서 얘깃거리가 떨어질 일은 없겠지.
“유릭 로스카 경! 축하드립니다! 어, 어디 다치시거나 한 곳은…….”
차오르는 함성 속 경비대장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유릭의 상세를 살폈다.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처세라는 것을 이 자리에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병사들은 굳이 눈살 찌푸리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기에.
“경비대장.”
“옙! 말씀하십쇼!”
“필리페 아칸은 벨파스트의 죄인이겠지?”
“그렇습니다!”
이토록 뜨거운 열기에도 유릭은 오히려 식어갔다.
그 어떤 열기도 방금 전투 때 느꼈던 열기만은 못했다.
뿌드득.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전투의 열기를 식혔다.
“필리페의 시체는 맡기지. 벨스 가주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옙!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필리페의 시체는 결국 아칸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다.
유릭이 한 일은 그저 귀찮은 일을 안토니에게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잘 모르는 경비대장은 적장의 시체를 인도한다는 말에 그저 좋아라 할 뿐이었다.
“후우…….”
유릭이 숨을 고르며 몸 상태를 살폈다.
외상은 상당하다. 마인에게 몇 차례나 얻어맞고 날아간 덕에 몸이 쑤시고 삐걱거렸다.
갈비뼈도 몇 대쯤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면은.
‘멀쩡해.’
아무렇지 않았다.
갑자기 눈을 뜬 엘가이아의 언령에 단전이 놀라는 기색도 없고 기운도 안정되어 있다.
붉게 타오르던 금안도 지금은 무사히 푸른 청안으로 돌아온 후였다.
‘폭심공을 익힐 때 실컷 데인 덕택에 어지간한 일론 꿈쩍도 안 하네.’
그때의 험한 경험 덕에 단전과 혈도가 훨씬 튼튼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덕분에 엘가이아의 언령이라는, 명백히 한 단계 위의 깨달음을 받아들였는데도 혈도가 멀쩡했으니까.
“야. 일어났냐?”
유릭이 쓰러진 데릭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툭툭 뺨을 쳐보며 물어봤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살핀 유릭이 데릭의 어깨 아래쪽 혈을 푹 찔렀다.
“으아아악!”
그러자 데릭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몸에 찌릿하는 통증이 달리며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뭐야, 어떻게 됐지?”
“다 끝났다.”
유릭이 필리페의 시체가 있는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걸 본 데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가…… 한 거냐?”
“그래.”
덤덤하게 대답하는 쌍둥이 형을 보며 데릭이 손을 가늘게 떨었다.
유릭이 가문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지?
1년하고 몇 개월? 2년?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그 정도이다.
결코 길다곤 볼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유릭은 마스터를 이길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차이가 더 벌어졌군.’
입가에 쓴맛이 올라왔다.
자신도 가문에서 놀고 있던 것은 아닌데, 하는 만큼 한다고는 하는데 그럼에도 차이는 좁혀질 기미가 없었다.
어릴 때 같은 열등감은 사라졌다지만 그렇다고 씁쓸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데릭! 유릭!”
뒤늦게 아칸의 술사들을 떨쳐낸 발터가 달려와 착지했다.
한눈에 두 조카의 모습을 담던 발터의 시선이, 이내 방금 데릭이 보고 있던 것과 같은 곳으로 향했다.
“필리페?”
놈의 시체를 보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유릭을 보곤 발터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하아.”
또 같은 설명을 할 생각에 유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극장 근처도 얼추 마무리되고 있었다.
아칸의 술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고 로스카의 기사들은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벨파스트에서 아칸을 쫓아내는 것이지 섬멸하는 것이 아니다.
필리페, 적장의 목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전공이었다.
“그런가요. 그가 죽었군요.”
“그래. 이걸로 너도 해방이다.”
유릭은 재스민에게 필리페의 죽음을 알렸다.
이번 사태로 오페라는 진작 중단되었고 재스민은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도망갈 곳이 있었지만 그녀만은 그런 곳이 없었다.
그녀의 집은 이곳이 아닌 클레어의 곁에 있었으니까.
어느 쪽이 승리하여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지, 그것만을 얌전히 기다릴 뿐.
“필리페는 죽었고 아칸의 술사들은 모두 도주했다. 잔당이 남아 있나 병사들이 뒤지고 있지만 아무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거의 다 도시를 떠났다고 봐도 될 테지.”
그리고 승전보를 가져온 것은, 필리페가 아닌 유릭이었다.
이것으로 그녀를 가두고 있던 필리페의 우리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자유의 몸이 되었단 얘긴 아니겠죠?”
“잘 아는군.”
재스민의 말에 유릭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필리페에게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이젠 유릭이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니까.
“네 정보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게 널 얌전히 놓아줄 이유는 되지 않아. 어쨌거나 넌 아칸의 정보원이고 난 로스카니까. 알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해가 빠른데.”
좀 더 현실 부정을 하거나 치근대며 봐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랐다.
“처음 당신에게 도움을 청할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뭐 크게 바라는 건 없고, 네가 아는 아칸의 정보를 모두 넘겨. 필리페의 정보도 포함해서.”
“아칸의 정보를요? 그렇게 고급 정보는 없는데…….”
“사소한 거라도 주워들은 건 있을 거 아냐.”
필리페의 마약 창고를 알고 있을 정도면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닌 정보일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본래 정보란 것이 사소한 정보를 모아 커다란 정보를 알아내는 작업이니까.
“알겠어요. 모두 말씀드릴게요.”
거부권 따윈 없는 명령이다.
필리페가 사라진 지금 이 벨파스트에서 가장 큰 무력을 가진 것은 로스카였다.
시장인 안토니도 로스카와 손을 잡았으며, 마약을 팔던 필리페와 같은 도덕적 결함도 없다.
어쩌면 늑대를 피하기 위해 호랑이 입속에 들어온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쪽 호랑이는 말이 통하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아 맞다.”
그때 문득 그녀가 한 가지 용건을 떠올렸다.
“뭐지?”
“공자의 최후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말해주는 건 상관없는데 그건 왜?”
유릭이 갸웃거렸다.
그녀가 필리페의 최후를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가씨의 오라버니시니까. 마지막 정도는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듣고 보니 당연한 이유였다.
모시는 사람의 친족이라면 그 최후는 들을 수 있을 때 들어두는 것이 좋겠지.
“어떻게 떠났는지 가감 없이 부탁드려요.”
“뭐 그러지.”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유릭은 놈의 최후에 대해 천천히 얘기해 주었다.
* * *
재스민은 그날 바로 도시를 떴다.
옛날부터 미리 짐도 싸놓고 교통편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유릭은 이런저런 뒤처리를 하며 잠시 요양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며칠 후.
“긴장되느냐?”
“그런 건 아니구요.”
유릭은 발터와 함께 골든 스케일에 참가했다.
어둑한 밤 은은한 조명이 밝혀진 곳에서, 앞쪽의 무대만이 환하게 빛이 내리고 있다.
일부러 관객석은 잘 보이지 않게끔 광량을 조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참가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게 로스카의 공자인가?”
“듣던 대로 정말 어리군.”
“21살이라던데 정말로 필리페 아칸을 죽인 것이 맞나? 믿기지가 않는데?”
소곤거리는 소리가 뜨문뜨문 이쪽까지 들려왔다.
유릭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가면이라도 쓰고 올 걸 그랬어요.”
“하하하, 뭐 어때서 그러냐. 너는 그만큼 대단한 일을 한 거다.”
발터가 대견한 표정으로 유릭을 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발터조차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유릭이 그 필리페를 이겼단 말인가?
그때, 필리페의 시체를 확인할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전율이 일었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필리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뿐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어린 조카 아이가 그걸 해낼 줄이야.
‘아칸에서 말이 좀 나오겠지만.’
그것이라면 그렇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른 평범한 가문이었다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을 일이지만, 아칸의 가풍과 라그룬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 일이 커지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없을 거란 건 아니지만.
‘뒷일은 나나 아버지한테 맡기거라.’
그 정도는 발터와 레오폴딘 선에서 대응할 수 있다.
아이가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주는, 이럴 때를 위해 어른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유릭이 한 것은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뛰어난 전공이었지만.
“기분 좋지 않더냐. 근래 벨파스트에서 네 명성이 하늘을 뚫을 것만 같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에서도 네 이름이 거론되겠지.”
“그렇게 좋지는 않은데요.”
“겸손할 필요 없어. 젊을 때는 이런 걸 좀 즐겨도 괜찮아, 괜찮아.”
발터가 강한 힘으로 유릭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겸손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어쨌든,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경매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장내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탐욕과 욕망에 번뜩이는 눈으로 무대에 올라오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뭐 앞에 건 다 넘기고.’
두 사람은 무슨 물건에도 입찰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경매의 가장 마지막에 있을 단 하나의 물품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모든 물품이 낙찰되고, 마지막 경매의 시간이 왔다.
“다음 물건은 그렇게 기다리시던 이것입니다!”
사회의 외침과 함께 걷어진 장막 속에는 아름다운 병에 담긴 에메랄드빛의 찬란한 물이 있었다.
넥타르.
병에 담겨 있음에도 청량한 숲과 같은 내음이 훅 풍겨왔다.
“오오…….”
“저것이…….”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그들 역시 알고 있다. 앞에 나온 모든 물건을 다 합쳐도 저 병 하나에 못하다는 것을.
하지만.
“…….”
“…….”
여러 입찰 경쟁이 오가던 앞과 달리 지금은 조용했다.
그들 모두, 대놓고 주목하진 않았지만 발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발터 로스카가 넥타르를 노리고 벨파스트에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발터를 이길 자가 없었다.
신분도, 가문도, 명성도, 동원할 수 있는 재력조차도.
몇몇 이들이 가만히 있는 발터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슬쩍 손을 들어보려 하였지만.
“입찰하겠소.”
때마침 손을 든 발터를 보곤 잽싸게 손을 내렸다.
발터가 제시한 금액은 첫 입찰치고는 굉장히 많은 금액이었다.
알아서 입찰하지 말라는 뜻도 있었고, 안토니와 사전에 협의한 최소한의 금액이기도 했다.
아칸과 렉사나의 뒤처리에 관해서 발터는 안토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넥타르에 대한 최소 입찰금이다.
대신 필리페의 죄상을 숨기지 않고 공표한다거나, 아칸과의 명분 다툼에서 손을 들어주겠다거나, 여러 편의를 봐준다거나, 그런 받은 것들도 많았다.
“그, 그럼 다음 입찰하실 분 안 계십니까?”
생각보다 큰 금액에 사회도 말을 더듬으며 진행을 이어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좌중은 조용했다.
그렇게 막 넥타르를 낙찰받기 직전.
“입찰하겠습니다.”
한쪽에서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렸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잿빛 후드에 복면까지 쓰고 있는 수상한 2인조.
경매 규정상 얼굴과 신분을 감추는 것도 인정되었기에 이 자리에서 그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으음?”
한 번 상회 입찰을 당했다고 포기할 리가 없다.
발터가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입찰을 하였다.
“이쪽도요.”
그러자 예의 2인조도 따라붙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발터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때.
-어?
메르가 귀를 쫑긋했다.
‘왜 그래, 메르?’
-잠시만요.
메르가 폴짝 뛰어내려 쫑쫑쫑 2인조가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자 등받이로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휙.
후드를 확 넘겨버렸다.
“앗!”
넘겨진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후드를 다시 눌러썼다.
어찌나 반응이 빨랐는지 이 자리의 누구도 후드 안쪽을 보지 못했다.
메르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던 유릭을 빼놓고는.
‘저거…….’
방금 본 것이 진짜인지 유릭은 두 눈을 의심했다.
어둑한 관객석에 녹아드는 잿빛 후드와 복면.
그런데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후드 안쪽의 맨피부도 그와 비슷한 잿빛이었다.
유릭이 아는 한 대륙의 어떤 인종도 저런 회색빛 피부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귀.’
귀가 길었다.
인간보다 2배 이상은.
-얘네 엘픈데요? 직접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인데~
느긋한 메르의 목소리가 유릭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