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63화
163화. 나 남잔데?
“잠깐잠깐, 잠깐 기다리거라, 유릭!”
막 나찰 염환을 던지려던 유릭은 발터의 만류에 잠시 멈췄다.
“왜요?”
“뭘 하려는진 알겠는데 전부 태울 필욘 없잖니. 길은 내가 뚫도록 하마.”
유릭을 말리곤 발터가 스스로 나섰다.
어차피 일행이 통과할 만한 큼직한 길만 뚫으면 되는 일이다.
널찍한 대로만 있다면 숲에서의 기습은 거의 효용이 없어지니까.
‘안 그래도 벨파스트에선 별 활약도 못 했으니.’
필리페의 흑연에 묶여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마음에 걸리던 그였다.
발터가 단창을 꺼내 손으로 훑으니 쩌적, 소리와 함께 서릿빛 기운이 덮여 장창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창을 한 바퀴 휙 돌리며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쿠구구구구-
그 창에 발터의 서리 마나가 모이고 압축된다.
유릭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강기의 압축…… 검환에 이르기 위한 길과 비슷한데.’
나찰 염환을 막 익힌 참인 유릭에겐 이보다 흥미로울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방대한 마나를 창 한 자루에 응축하는 과정.
기운의 운용은 다를지언정 나찰 염환과 비슷한 기술이었다.
저것보다 더 많은 마나를, 더욱 작은 일점에 모을 수 있게 되면 그것이 곧 검환이다.
“흡!”
발터가 크게 숨을 참으며 쿵, 한 걸음 크게 앞을 밟았다.
그러곤 몸을 비틀어 쥐고 있는 창을 냅다 던졌다.
콰과과과과과!
숲으로 날아간 창이 응축된 서리 마나를 폭발시키며 닿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발터가 한계까지 응축시킨 냉기가 통제를 잃고 풀려 나간다.
거친 서리폭풍을 동반하며 창이 일직선으로 숲을 갈랐다.
콰과과과과광!
순식간에 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고, 지나간 길은 완전히 뒤집혀 나무도 바위도 파편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산사태라도 지나간 것 같았다.
“후우! 이 정도면 되겠지.”
발터가 일 한번 했다는 듯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숲 한가운데 커다랗게 대로가 뚫렸다.
투창 한 번으로 숲 일부를 아예 밀어버린 것이다.
‘과연…….’
같은 검환에 이르기 전이라곤 하지만, 경지도 경험도 발터 쪽이 유릭보다 위이다.
그 발터가 펼치는 강기의 운용을 보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공부가 되었다.
나찰 염환을 펼칠 때 응용할 부분도 있어 보였다.
‘이 정도면 기습도 문제없겠고.’
숲의 엘프가 무서운 것은 복잡한 숲에서의 기동력 때문.
갑옷을 입고 있고 검도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운 기사들에 비해, 숲의 엘프는 바닷속 물고기마냥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공격 방법에도 제한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땅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멀리서 화살이나 마법 정도는 쏠 수 있겠지만 도저히 앞을 막아설 정도는 되지 않는다.
“들어간다. 양옆에서 공격이 날아올 수 있으니 그것엔 주의하고, 설령 공격을 받더라도 멈추지 말고 돌파해라.”
“예!”
원거리 공격만 날아오는 정도라면 굳이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튕겨내는 정도는 로스카의 기사들에겐 쉬운 일이었다.
“가자, 얘들아.”
발터가 스스로 앞장서 숲의 대로에 진입했다.
방금 발터가 던진 투창의 기운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유릭이 그 뒤를 따랐다.
* * *
조금 전.
숲속에는 잿빛 후드를 눌러쓴 두 명의 존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로스카 일행의 정체와 이동 경로를 확인하곤, 앞질러 달려와 매복을 하고 있던 두 엘프였다.
“아빠, 저들이 정말 속을까요?”
“속아주면 좋겠구나. 정령들이 이렇게 힘써주고 있는데.”
아빠라 불린 엘프가 살짝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사실 숲에서 느껴지는 수십의 기척은 페이크였다.
이곳에 있는 엘프는 그들 두 사람뿐.
다른 기척들은 숲의 정령을 불러내 부탁한 것이다.
말하자면 허세.
복어는 위협을 느끼면 제 몸을 부풀려 천적을 쫓아낸다 하였다.
놈들이 아무리 대단한 기사더라도 수십의 엘프가 매복하고 있는 숲에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지.
실제로.
“고민한다!”
“성공이에요, 아빠!”
정령을 통해 감시하고 있던 입구에서 놈들이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부녀가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허세가 완벽히 먹혀들었다.
이제는 틈을 봐서 앞에 나가 협박을 하면 된다.
“준비되셨죠?”
“그럼! 완벽한 대본을 준비했지!”
아빠 엘프가 가슴을 탁탁 치며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놈들에게 제안할 얘기는 이미 모두 구상해 두었다.
그런데 그때.
-쿠구구구구구!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흠칫 몸을 떨더니 입구를 감시하던 정령에게 의념을 보냈다.
-삐이!
그러나 그 정령은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느라 의념에 답하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며 두 사람의 시선이 숲의 입구 방향으로 향했고.
콰과과과과광!
숲을 분쇄하며 맹렬히 날아오는 창 한 자루를 목격할 수 있었다.
“다이앤!”
아빠 엘프가 몸을 던져 딸을 감쌌다.
전력으로 땅을 박찬 그의 몸이 창의 경로에서 훌쩍 멀어졌다.
그럼에도 서리 마나를 모두 피하지 못해.
“큭!”
“아, 아빠!”
아빠 엘프의 등이 찢어지며 작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발터가 핏빛서리까진 쓰지 않았지만 차가운 냉기는 피부를 찢으며 얼어붙었다.
등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며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는 상처를 돌볼 틈도 없었다.
숲을 보며 그가 입을 떡 벌렸다.
“수, 숲이…….”
“이럴 수가…….”
숲 한가운데에 뻥 구멍이 뚫렸다.
아름답게 자라나던 나무와 바위가 모두 갈려 나가며 파도처럼 솟구친 흙더미에 파묻혔다.
근방에 대기시켜 놓은 숲의 정령은 모두 삐약대며 사방팔방 도망쳤다.
정령들의 반응은 물론이고, 숲의 상태 또한 이렇게 충격일 수 없었다.
죄 없는 숲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그들은 이 정도로 잔혹한 장면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크흑!”
아빠 엘프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공포를 삼켰다.
“다이앤. 놈들이 생각보다 더 강한 모양이구나.”
“그, 그런가 봐요. 어쩌죠?”
“……무슨 일이 있어도 넥타르는 포기할 수 없다. 그게 없으면 우리 마을은 끝이야.”
“하지만…….”
다이앤이 파괴된 숲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끔찍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핼쑥해져선 곧바로 홱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강하고, 또 잔혹한 이들에게서 어떻게 넥타르를 빼앗는단 말인가?
“어쩔 수 없지. 그 방법을 쓴다.”
아빠 엘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다이앤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방법이요? 정말로 쓰시게요?”
“우리한테 남은 건 그것뿐이야. 너도 각오를 다지거라.”
“……예.”
아빠 엘프의 단호한 말에 다이앤도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두두두두두!
말을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파괴된 숲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빠 엘프와 다이앤이 서로를 보며 말없이 끄덕이더니.
휙!
달리는 말 앞에 겁 없이 뛰어들었다.
발터 일행을 향해 그들의 손이 벼락처럼 올라간다.
그러곤.
“제발 잠시 멈춰주십시오!”
“저희 말 좀 들어주세요!”
망설임 하나 없이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 * *
발터가 눈을 크게 뜨며 급히 고삐를 들어 올렸다.
“멈춰라!”
히히히힝!
말이 앞다리를 들고 크게 울부짖으며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발터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몰아 난입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후드를 벗고 있어, 발터의 눈에도 기다란 귀가 눈에 띄었다.
“엘프인가?”
부하에게 다른 창을 받아 겨누며 발터가 물었다.
아빠 엘프가 크게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발터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왔던 엘프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그의 호기심 짙은 눈빛과는 반대로, 아빠 엘프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발터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방금 숲을 파괴한 그 창의 기운과 똑같았으니까.
‘너무 무서워하는 거 아냐?’
-아마 숲을 밀어버린 것 때문인 거 같은데요.
유릭은 메르와 대화하며 발터가 심문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를 쫓아왔느냐, 넥타르를 노리고 있는 것이냐, 등등.
발터의 질문에 아빠 엘프는 눈알을 굴리며 대답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전면 항복인 것처럼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뜻이다.
‘한번 당근과 채찍으로 가볼까.’
-어떻게 하시게요?
‘뭐 보고 있어봐.’
유릭이 말에서 내려 엘프에게 다가갔다.
“다쳤나 보군.”
“예?”
갑자기 끼어든 인물에 아빠 엘프가 당황할 때, 유릭이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아빠 엘프의 등엔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 상처엔 발터의 마나가 잔류해 얼어붙어 있었다.
유릭이 불꽃을 피어 올렸다.
불은 엘프가 가장 질색하는 원소 중 하나.
처음엔 유릭의 불을 보고 흠칫한 아빠 엘프였으나.
“아…….”
상처에 얼어붙은 냉기를 녹이는 불의 기운에 그가 입을 벌렸다.
평범한 불의 원소와 전혀 다르다.
거칠고 품위 없는, 숲의 기운을 파괴하기만 하는 일반적인 불과 다르게, 이 불꽃은 그들의 기운에 전혀 충돌하지 않았다.
엘프의 기운은 숲의 기운과 같다.
유릭의 불꽃은 그걸 더욱 북돋아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릭의 불꽃은 얼음을 녹였을 뿐이지 상처를 치료해 주진 않았지만, 아빠 엘프의 기운을 활성화시켜 자연 치유력을 높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간다.
“이, 이건…….”
아빠 엘프가 경악했다.
심지어 숲의 정령들조차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자신들도, 그리고 숲의 정령들도 멍하니 유릭의 불꽃을 쬐기 시작했다.
숲을 파괴하긴커녕 더욱 키워주는 불꽃.
그가 아는 한 그런 불꽃은 단 하나뿐이다.
“좋아. 너무 경계하지 말고 이제 말해봐. 왜 넥타르를…….”
“무녀님이시군요!”
“뭐?”
유릭이 눈을 깜빡였다.
당근과 채찍이라곤 했지만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바란 건 아닌데.
아니, 그보다…….
“무녀라니 뭔 소리야? 나 남자인 거 안 보여?”
“아아! 태양의 무녀님!”
-어르신, 설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뗀 거…….
‘그럴 리 없잖아!’
메르의 말을 당장에 일축한 후 그가 찡그린 눈으로 아빠 엘프를 보았다.
“태양의 무녀가 뭔데?”
“뭐긴요! 태양의 불꽃을 다루어 어린 세계수를 길러냈다는 무녀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게 뭐냐고.”
아빠 엘프가 침을 튀며 설명하는 것을 듣자 하니, 태양의 무녀란 엘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수천 년 전 세계수가 아직 작디작은 묘목일 때, 외적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고 무사히 길러낸 엘프가 있다 하였다.
그 엘프는 태양의 힘을 가지고 있어 그 힘으로 세계수를 기르고 숲을 지켜냈다고.
신빙성이 적은 설화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그 설화를 모르는 엘프는 없다고 한다.
엘프의 모든 설화와 역사를 뒤져봐도 불꽃을 쓰는 엘프의 존재는 그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 뭔 얘긴진 알겠는데 잘못 봤다. 난 인간이고, 그리고 남자야.”
“하지만 태양의 불꽃을 다루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데…….”
“역시 무녀님이시군요!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를 굽어살펴 이렇게 찾아와주시다니!”
찾아온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아니냐, 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굳이 하진 않았다.
어찌 됐든 당근 작전은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으니까.
‘이건 필요 없겠군.’
유릭이 몰래 피워 올린 손가락 끝의 마나의 바늘을 집어넣었다.
이만큼 따르고 있다면 분근착골까지는 필요 없겠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간신히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이앤!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구나! 넥타르를 가져간 것이 무녀님이었다니, 이건 하늘의 인도가 틀림없어!”
“정말이에요, 아빠! 어쩌면 이 모든 게 세계수의 뜻이 아닐까요? 저희에게 구원자를 보내준 거예요!”
두 엘프는 아무것도 모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기만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서로 손을 마주치는 것이 긴장감 따윈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유릭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른 동료도 없는 것 같고.’
아까까지 느껴지던 수십의 기척은 진작 사라진 후였다.
아마 정령이나 다른 모종의 방법으로 기척을 늘렸던 것이리라.
둘 정도라면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유릭이 살짝 고개를 돌려 발터를 보니.
‘뭔가 잘되는 듯하구나. 한번 정보를 캐보거라.’
발터가 눈짓으로 지시를 보낸다.
유릭이 끄덕인 후 두 엘프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