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65화
165화. 간만에 대련 한번
일행은 로스카가 남부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영지에 도착했다.
화려한 벨파스트와는 전혀 다른 목가적인 곳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오셨습니까, 발터 단장님. 연락은 받았습니다.”
일행이 찾아간 곳은 영지에 있는 큼지막한 농장.
밭일을 하던 밀짚모자의 농부들이 유릭 일행을 맞이했는데, 이렇게 보여도 모두 6성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참고로 벨파스트에서 따라오던 체르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뿔뿔이 흩어졌다.
이 거점에 온 것은 발터와 유릭, 데릭, 그리고 두 엘프 부녀뿐이었다.
‘기사 같은 고급 인력을 데리고 농사일이나 시키고 있다니.’
얼핏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보를 다루는 일이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 남부는 로스카에겐 반쯤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릭 공자님, 데릭 공자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말? 무슨 말?”
“가문의 두 쌍둥이가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더군요.”
“과장은.”
기사의 너스레에 유릭이 피식 웃었다.
데릭은 별 반응은 없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쓸데없는 아첨 같은 건 싫어하는 데릭이지만 아첨과 농담의 구분 정도는 할 수 있는 녀석이다.
“유릭. 나는 곧바로 누님께 서신을 보낼 테니 너는 저들에게 머물 곳을 안내해 주거라. 데릭은 짐을 풀고.”
“답장은 언제쯤 올까요?”
“글쎄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데만도 일주일은 걸릴 테니까 못해도 2~3주 정도는 봐야 할 거다.”
이 남부 거점에서 북방의 가문까지 연락이 닿으려면 상당히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통신 마법이 연결된 곳까지만 간다면 하루 만에 연락이 오고 갈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도 거리가 꽤 되었다.
훈련시킨 비둘기를 이용해도 일주일은 걸릴 거리.
2주는 말 그대로 전서가 오고 가는 시간만을 상정한 것이고, 아마 3주는 봐야 할 테지.
어머니가 얼마나 빨리 답장을 주실지조차 알지 못하니까.
“시간이 꽤 비는군요.”
“당분간은 정비 시간을 좀 가지자. 네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더냐.”
발터가 눈치 좋게도 유릭의 몸 상태를 챙겨주었다.
부상은 이미 나았지만 그런 종류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최근 유릭은 필리페를 쓰러뜨릴 정도의 급성장을 이뤘고, 그 과정을 거의 쉼 없이 달려왔다.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발터의 얘기는 아마 그런 것이겠지.
“배려 감사합니다.”
“뭘 그리 딱딱하게. 이 숙부 섭하다. 더 자연스럽게 있으렴.”
발터가 하하하 웃으며 농부 차림의 기사와 함께 일을 보러 떠났다.
유릭이 남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행이라고 해도 데릭과 엘프 부녀, 세 사람뿐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다시 원래 장소로 돌려보내는 능력은 없는 거냐?”
데릭이 물었다.
“그런 거 없다. 소환하는 능력뿐이야. 왜, 돌아가고 싶냐? 요정계 안 가보게?”
“그건 아니다만…… 그냥 뭔가 불합리한 거 같아서.”
“원래 동생은 그런 거다.”
“쯧.”
혀를 차는 데릭을 일별하며 유릭이 후드 차림으로 푹 숙이고 있는 엘프 부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당분간 머물 거처로 안내하지. 뭐 나도 다른 기사한테 안내받아야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앗, 네.”
“감사합니다, 성자님.”
두 부녀가 감사한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표정은 오히려 불안과도 닮아 있었다.
이유가 짐작이 가는 유릭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잃어버리게 보관하고만 있는 거라니까?”
“절대! 절대 함부로 쓰시면 안 돼요! 그게 없으면 저희 못 돌아간단 말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소중히 여겨주시길…….”
“걱정 마.”
잘 싸서 품에 보관 중인 세계수의 가지의 감촉을 느끼며 유릭이 대답했다.
그냥 주머니에 넣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메르가 가지고 있도록 얘기해 놓았다.
“이거보다 더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은 없을걸?”
세상에 드래곤이 껴안고 있는 물건을 노리는 강도 같은 건 없다.
유릭이 믿고만 있으라고 얘기하며 둘을 농장 건물로 안내했다.
* * *
당분간은 모두가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다이앤과 디올가는 오랜만에 느끼는 침상의 부드러움에 감격한 듯했다.
듣기로 벨파스트에서도 제대로 된 여관엔 묵지 못했다고 한다.
그야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꽁꽁 싸맨 수상한 인물을 받아줄 여관 같은 건 없겠지.
경매가 시작될 때까지 건물 사이나 뒷골목 같은 데서 웅크려 잤다고 하는데, 꽤나 고생을 한 듯 보였다.
참고로 둘의 정체에 대해선 농장의 기사들도 궁금해했지만, 따로 묻진 않았다.
상급자의 비밀 손님에 대해 묻는 것은 정보원의 소양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발터는 서신을 보내고 난 이후론 한가해져, 시간이 날 때마다 데릭의 단련을 봐주고 있었다.
“대단했습니다, 외숙. 숲을 뚫어서 그대로 길을 만들다니.”
“사실 그런 건 전혀 대단한 게 아니란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마나를 방출했을 뿐이니까. 뭐 그 정도 마나를 쌓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발터는 이전에 데릭에게 주법을 따로 가르쳐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나의 운용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진짜로 대단한 건 그렇게 거창하고 화려한 게 아니야. 아주 작은 것이지.”
“작은 것이요?”
“그때 내가 낸 힘을, 아니, 그 절반의 절반만이라도 이 손가락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떻겠니?”
“그건…….”
“하하, 사실 그건 나도 못 하긴 한단다. 그만한 재주는 가문에선 누님이나 아버님 정도나 가능하겠지. 아, 알프레도 경도 할 수 있겠군.”
그 셋의 공통점을 데릭은 잘 알고 있었다.
모두 9성 이상의 강자들이다.
“우선은 욕심내지 말고 검 한 자루에 집중하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보통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오러가 검 위에서 단단한 강철처럼 정련되는 경지.
흔히 얘기하는 오러 블레이드다.
마스터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기준점 중 하나이며, 보아하니 유릭은 이미 이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본인 말론 아직 마스터는 아니라고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미 마스터 같다.
“데릭, 너는 더 힘들걸. 평범한 검도 아니고 이솔렛을 가지고 단련하려면.”
평범한 보검 정도라면 마나의 운용이 더 쉬워진다거나 그런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솔렛은 다르다.
마검이라 불리는 그것은 스스로 가진 기운부터 방대하고 난폭하기에, 그곳에 자신의 기운을 응축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해낸다면 더 위를 볼 수 있겠죠.”
힘들 것이라는 말은 데릭을 기죽이긴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말에 불과했다.
안 그래도 유릭이 필리페를 쓰러뜨린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그이다.
이번 기회에 그 역시 더욱 집중해서 경지를 높여볼 생각이었다.
“그래. 열심히 하렴.”
기특한 데릭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발터가 계속 그의 강도 높은 단련을 봐주었다.
한편, 그 시각 유릭은.
“이게 그 마법진이야?”
해석을 마쳤다는 반시룡의 마법진을 메르에게 강의받고 있었다.
-맞아요. 보면 아시다시피 일반적인 사령마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내부 구조가…….
‘봐도 전혀 모르겠는데…….’
당연하지만 강의의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메르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의 절반, 아니, 절반이 뭔가, 90%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사령마법을 갑자기 익힌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마법진을 아무리 해석했다고 해도 유릭이 쓸 수는 없다.
그의 전공이 검이 아니라 마법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화염술 두어 개나 근근이 쓰고 있는 그에게 완전히 분야가 다른 사령마법은 무리였다.
“그래서 어때. 너는 쓸 수 있을 것 같아?”
-저요? 그야 당연하죠.
“그거면 됐다.”
하지만 메르라면 다르다.
드래곤이라면 처음 보는 마법 같은 것도 곧잘 사용할 수 있을 테지.
“일반 언데드 소환이랑 뭐가 다르다고 했지?”
-아, 예. 뼈를 일으키는 스켈레톤 계열과 다르게 시체를 직접 일으키는 계열인데요, 이건 개량이 많이 되어 있어요. 시체의 살아 있던 시절의 육체 능력을 상당히 재현할 수 있더라구요.
“살아 있던 시절의 육체라…….”
확실히 이야기만 들어도 범상치 않은 마법이었다.
마스터의 시체만 구할 수 있다면 말 잘 듣는 마스터 하나를 부리게 된다는 것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 반시룡처럼, 용의 시체를 구할 수 있다면 용까지 부린다는 뜻이다.
평범한 좀비 따위를 일으키는 마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으음~ 근데 그대로 쓰기엔 너무 제 취향이 아닌데. 좀 개량해도 될까요?
“개량? 상관이야 없는데 어떤 식으로?”
-일단 들어가는 기운이 말이죠. 전 못 쓰는 거라 좀 바꿔야겠어요.
반시룡의 마법진에 쓰인 기운은 메르에게 상처를 남긴 정체 모를 기운이다.
그 상처 때문에 수백 년을 동면했던 메르로선 사용할 수 없는 기운이기도 했다.
-기왕이면 평범한 기운보단 어르신의 기운으로 해볼까요?
“내 걸로?”
-어르신 기운은 특이하다고 여기저기 정평이 나 있잖아요. 저나 엘프도 그렇고 그 수염 노인네도 그렇고, 드렉키아도 눈여겨봤었고.
수염 노인이라는 건 라그룬 아칸을 말하는 것이겠지.
무슨 맛집 리뷰마냥 얘기하는 건 좀 그렇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
자신의 내기는 평범한 마나와는 다르니 그걸 접목시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
“나한테 부담은 없고?”
-처음 시체를 일으킬 때나 마나가 다 떨어졌을 때 불어넣어주시면 돼요. 그때 말고 부담은 전혀 없죠.
“충전식이라 이거군.”
-한 번에 필요한 마나는 시체마다 다를 거구요.
들어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해, 그럼.”
-알겠어요. 아 맞다, 외형도 좀 바꾸려구요. 반시룡도 그랬지만 이건 시체를 그대로 일으키는 것밖에 안 돼서 너무 흉측해요.
“외형? 그럴 필요까지 있나?”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유릭이 갸웃거렸다.
물건을 살 때나 게임 캐릭터를 키울 때도 외형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성능만 봤었던 그인지라, 사실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시체 외형이 정 보기 싫으면 대충 갑옷 같은 거라도 주워서 입히면 되는 거 아닌가.
“뭐 알아서 해. 잘하겠지.”
그래도 굳이 뜯어말릴 것까진 없었다.
어차피 마법을 쓰는 건 메르이니 본인 취향껏 개조하라 그러는 게 맞겠지.
-맡겨주세요!
그렇게 메르는 간만에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데릭과 발터도 단련으로 바쁘고 메르는 마법의 개조로 바쁘고, 엘프 부녀는 대접받는 생활에 좋아라 하면서도 마을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있고.
오직 유릭만이 그간 오른 경지를 가다듬으며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다.
그렇게 3주 후.
발렌티나의 답장이 도착했다.
“저 왔습니다, 도련님.”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그 답장을 가져온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이들, 글렌과 아니스였다.
* * *
성국에서 잠깐 올려보냈던 글렌과 폐관에 들어 얼굴 본 지가 오래인 아니스, 두 사람이 발렌티나의 답장을 가지고 왔다.
가문과 이곳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도저히 3주 만에 달려올 곳은 아니다.
아마 이미 남하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소식을 듣고 발렌티나의 답장을 받아 내려온 것이겠지.
시간상 따져보면 자신이 벨파스트로 가겠다고 했을 때 이미 둘은 가문을 출발했을 것이다.
“글렌이야 뭐 성수만 갖다 놓고 내려오라 했으니 그렇다 치고…… 아니스는 어쩐 일이야?”
“글렌이 도련님께 돌아간다고 하길래 같이 따라왔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잘 왔다. 좋은 타이밍에 왔네.”
유릭이 진심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야 그럴 만도 한 게.
“마스터가 되었단 얘기가 있던데 진짜야?”
“운이 좋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전에 듣기로 아니스는 이미 마스터에 올랐다고 하였으니.
아니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언제나 든든한 누이와 같던 그녀였으나 이전보다도 한층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정말로 무언가 하나에 통달한 느낌.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보다 도련님도 벌써 소문이 쫙 퍼졌던데요. 필리페를 처리하셨다구요?”
“아니, 뭐, 하하하.”
오랜만에 만나니 그만큼 근황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견하단 표정을 짓는 아니스를 보며 유릭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괜히 처음 검을 익힐 때가 떠오른다.
그때 매일같이 아니스가 대련에 어울려 줘서 실력이 많이 올랐었지.
정식 스승 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때의 은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을 보니, 글렌이 얼척없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주 서로 금칠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녀석의 얘기에 유릭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근황 토크는 이 정도로 할까.
“어머니는 뭐라셔?”
“자세한 건 서신에 담겨 있습니다. 짧게 말씀드리면 가보라고 하십니다. 세계수의 안쪽이라면 반드시 월하무녀의 단서가 있을 거라고.”
“그렇군.”
그럴 거란 예감은 들고 있었지만 역시 어머니의 대답은 그것이었다.
‘전력은 충분해.’
발터도 있고 아니스고 있고 자신도 있다.
데릭과 글렌 역시 아직 마스터는 아니지만 각각 마검과 신검을 들고 있고.
‘메르도 있고.’
거기에 메르까지 있으니 이 정도로 든든한 전력은 없었다.
마스터급이 셋, 마검 두 자루, 신검이 한 자루, 그리고 용 한 마리.
스카디의 마스터가 둘뿐인 걸 생각해 보면 이 정도 전력이면 작은 왕국보다도 강한 것이었다.
요정계로 가기엔 충분한 전력.
“좋아, 외숙한테 보고하고 빨리 출발하자.”
이미 필요한 물품은 모두 싸 놓았으니 출발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전에.
“아니스.”
“예?”
유릭이 아니스를 불렀다.
“간만에 대련 한번 하자. 진짜 죽일 기세로 부탁해.”
유릭이 히죽 웃으며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