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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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인 주임은 한송이 선수 시절 원정경기로 해외에 몇 번 나가 본 적이 있는 경험을 제외하고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눈 앞에 펼쳐진 한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에 내가 아직 꿈속이구나, 할 뿐이었다.
책상 아래 웅크리고 있던 기획운영팀 6명은 쪼그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리석 위에는 그들을 둘러싼 커다랗고 둥근 선들과 복잡한 기호 같은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한 주임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한기에 어느샌가 돌아온 양팔을 끌어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건 김유정이었다.
“이거 설마…….”
김유정은 뭔가를 확인하듯 사방을 둘러보더니 입을 크게 벌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든 이한율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한 주임은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시선이 높아지자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운영팀은 황당하게도 외국의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잿빛 성안, 드넓은 홀 한가운데에 있었다.
“……?”
양초 수백 개가 매달린 샹들리에로 온통 번쩍거리는 사위는 덩그러니 놓인 그들과는 확연하게 이질적이었다. 판금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기사들이 투구 끝에 달린 수술보다 높은 창을 들고 시위 진압을 하는 전경들처럼 자신들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자기 전에 해외드라마 채널에서 <왕자의 게임>을 본 것 같은데, 이런 장면이 있었나. 그녀는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아이고 허리야…. 뭐야, 여기는.”
염 부장이 박 차장에게 우악스럽게 꼬집혔던 옆구리를 쓱쓱 문지르며 일어나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박 차장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이 황당한 상황을 직시하느라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정면에 있던 근위대들 일부가 척척 발을 구르며 좌우로 갈라졌다.
운영팀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근위대가 비켜난 자리에는 사람 키보다 배는 등이 높은 의자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치렁치렁한 망토 자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커다란 보석 반지 여러 개가 끼워진 손으로 하얗게 센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희끗희끗한 머리 위에 씌워진 화려한 금관이 그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광채로 빛났다.
탁한 금색 홍채를 가진 노인의 눈이 메마르게 운영팀을 향했다.
그가 주름진 손가락을 까딱하자 지척에 서 있던 치마처럼 긴 옷을 입은 중년남성이 얼른 다가와서 귀를 가져다 댔다. 언뜻 수도복 차림새와 비슷하지만 과하게 자수가 많이 들어간 디자인이었다.
중년남성은 뭐라 소곤거리는 노인의 음성을 듣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 세 개를 내려와 운영팀 앞까지 걸어 나왔다. 곧바로 그의 곁에 좌우로 창병이 한 명씩 달라붙었다.
“레비탄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의 사자들이여. 내 이름은 갈록! 위대한 레비탄의 대주교이자 여러분을 소환한 마법사입니다.”
한 주임은 현실감 없는 풍경에 대주교가 하는 말에 집중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왕관을 쓴 노인의 뒤에는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떤 이는 왕관과 닮은 노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는 새까맣게 어두운색이었다. 다른 이들 또한 탁한 초록색 머리, 불타오르는 것 같은 빨간 머리, 연갈색 머리 등 오색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제각각인 모양새였지만 한 가지, 그들의 눈동자만은 모두 노인과 같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한 주임은 그들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왼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던 그는 칠흑같이 까만 머리와 꿰뚫는 듯한 금안을 가진, 한 주임이 봤던 남자 중 맹세코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선수 시절 공항 출국장에서 유명한 남자 연예인들을 몇 번 본 적도 있지만, 지금 보고 있는 남자에 비하면 그들은 전부 일반인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얗다 못해 뽀얀 옆 사람들과 비교하면 적당히 그을린 연갈색 피부 때문인지 남자는 유달리 눈에 띄었다.
흑발의 남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감청색 정복 같은 것을 입고도 가려지지 않는 넓고 탄탄해 보이는 가슴을 당당하게 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금안은 한 주임을 포함해 다른 직원들을 전부 빈틈없이 스쳐 갔으나, 감정이 내비치지 않는 눈에선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집중!”
대주교가 들고 있던 떡갈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리치자 머리 위로 커다란 목소리가 확성기처럼 울렸다.
한눈을 팔던 한 주임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막았다. 저 혼자만 들은 게 아니었는지 사무실 사람들 모두가 움찔거렸다.
마법사라던 대주교는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오신 여러분들이 혼란스러울 것을 압니다. 다들 그래 왔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부 이 축복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영광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미래입니다.”
“저희 말고도 더 있다고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대주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유정이 물었다. 한 주임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스물네 살의 김유정은 이한율보다 반년 일찍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온갖 신조어에 능수능란하고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않는, 성격이 급하고 손이 빠른 사원이기도 했다.
SNS 팔로워가 몇만이라는 그녀가 한 주임은 처음에는 매우 껄끄러웠다.
김유정이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으며 가볍게 소감을 말할 때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등줄기가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겨우 익숙해져서 가끔은 맞장구도 치지만, 김유정과 대화할 때면 그녀는 가급적 다른 화제로 돌리려 부단히도 애써야 했다.
그리고 김유정은 지금 환희에 찬 얼굴로 묻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주교의 기다랗게 찢어진 눈이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오, 아가씨도 ‘선구자’인 것 같군요. 간혹 이방인 중에는 아가씨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곳에 적응하는 자들이 있지요.”
“김 사원, 너 뭐야? 엉? 이게 지금 다 뭐야? 무슨 영화 촬영해?”
잠자코 듣고 있던 염 부장이 양손을 허리에 대고 대주교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당신이 여기 책임자야?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
“부장님!”
동시에 박 차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커다란 홀에 울려 퍼졌다.
염 부장은 목 앞에 들이밀어진 날카로운 두 개의 창에 곧바로 두 손을 번쩍 올려 항복 의사를 밝혔다. 뾰족한 창끝은 언제라도 꽂아 넣을 준비가 끝났다는 듯이 살을 파고들어 기어이 피를 내고 있었다.
“거 자, 자,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요.”
염 부장은 따끔거리는 목에서 무언가 주룩 흐르는 것을 느끼곤 사색이 되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대주교와 세 걸음 이상 떨어진 후에야 근위대의 창이 거두어졌다.
그는 한 손으로 뜨뜻한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누르며 뒤로 걷다가 박 차장의 손이 등에 닿자 곧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김유정이 느닷없이 버럭 성질을 냈다.
“부장님은 가만히 좀 있으세요, 진짜!”
사원인 그녀가 염 부장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 당연하게도 처음이었다.
염 부장은 맥없이 앉아서 딸뻘인 김유정이 소리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웬일로 조용히 있던 공 대리가 본능적으로 김유정에게 붙어 섰다.
“유, 유정 씨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는 거야?”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어깨에 손을 올린 그를 김유정이 민망할 정도로 거칠게 뿌리쳤다.
“대리님은 만화나 소설도 안 봐요? 이거 완전 이세계 소환물이잖아요! 차원 이동이요!”
공 대리가 마지막으로 본 만화는 <설레는 덩크>라는 옛날 농구 만화였고, 소설은 고등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꾸역꾸역 읽어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박경리의 <토지> 1부 1권이 전부였다.
“이 세계가… 뭐라고?”
공 대리가 이해를 못 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박 차장이 대신 대답했다.
“차원 이동. 들어 본 적은 있는데 난 빙의물만 몇 개 봐서…….”
“아, 진짜요? 차장님 아깝게! 찍먹이라도 해 보시지!”
한 주임과 이한율, 염 부장만 도통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김유정이 돌연 무언가 떠오른 듯 어! 하고는 ‘스테이터스, 상태창, 가방, 인벤토리, 스킬창.’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뜻 모를 소리를 뱉고는 허공에 손을 휙휙 젓더니 이내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자 대주교가 그런 김유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선구자’들 중에 아가씨와 비슷한 말을 했던 이들이 있었지요. 실망을 드린 것 같아 안타깝지만, 아가씨가 생각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손짓하자 구석에 있던 사제 한 명이 붉은 쿠션 위에 놓인 핸드볼 크기만 한 자수정을 들고 다가왔다. 수정의 내부는 일렁이는 물결 같은 잔잔한 파동을 품고 있었다.
“이것을 보시면 다들 똑같이 행동하시더군요.”
“……설마 마력 측정기?”
“맞습니다.”
김유정이 다시 입을 크게 벌리더니 어깨를 으쓱대며 사무실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한 자세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봐온 중에 가장 활기찬 얼굴이다.
“본인이 얼마큼의 마력을 가졌는지 측정할 수 있는 물건이에요. 저 구슬 위에 손을 얹으면 가지고 있는 마력이 클수록 저 수정구슬이 빛나거나 어두워지거나, 대충 그럴 거예요!”
“빛이 납니다.”
대주교가 얼른 덧붙였다.
염 부장이 손에 묻은 피를 넥타이에 벅벅 문지르며 한껏 얼굴을 구겼다.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가 어딘데?”
“부장님,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리면.”
박 차장이 난감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여기는 지구가 아닐지도 몰라요. 이세계(異世界)라는 차원이 다른 장소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한 주임과 이한율도 나란히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팔찌의 제왕> 같은 세계에 뚝 떨어진 거라고 보시면 돼요. 마법도 있고 막… 몬스터도 있고 그런 곳이요.”
심각한 얼굴로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박 차장을 보던 염 부장이 결국 푸학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