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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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하면 다른 짓도 하게 해 준다는 건가? 짓궂은 마음이 슬쩍 피어올랐다.
야닉은 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젓고는 구석에 대충 던져둔 목검을 집어 들었다.
“검술은 진짜로 배워 두는 편이 좋겠어. 생각보다 자세가 잘 잡혀 있어. 어깨도 좋은 편이고… 몸 쓰기 좋은 체형이야.”
“어릴 때 운동을 조금 했거든요.”
나쁘지 않은 칭찬에 한 주임이 얼른 대꾸했다.
“어떤?”
“그냥… 이것저것 했어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니 검술을 배워 두면 마법을 못 해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의욕이 샘솟았다.
멀리서 우웩 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지만 이제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운영팀을 돌아보던 야닉이 목검을 어깨에 얹고 산뜻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점심은 우리끼리 먹어야겠어.”
그는 이제 꽤 성실하게 검을 휘두르는 모양새를 봐주기 시작했다.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이나 공격법에 따라 효과적으로 막는 자세 같은 무척 실용적인 가르침이었다. 한 주임은 한번 자세를 잡으면 혼자서 두어 번 몸을 움직여 반복적으로 익혀 나갔다.
생각보다 진지하게 임하는 모범적인 모습에 어느 순간부터는 야닉도 진심이 됐다.
무기는 어차피 전원 지급이니 방어구도 좀 맞춰 줄까, 따위의 편향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마물은 표피가 두껍거나 매우 질겨서 사람 피부와 같다고 생각하면 죽일 수 없어. 여성의 힘으로도 베기 쉬운 놈들은 고블린 정도니까, 좀 더 강하게.”
그는 휘두르는 검에 좀 더 힘을 실으라는 듯이 그녀의 목검을 꽉 쥐었다.
“베는 힘이 약하면 두 손으로 심장이나 목을 찔러 넣고 바로 뒤로 빠져야 해.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물어뜯기거나 둔기로 맞을 수 있으니.”
상체를 숙이며 찌르는 자세까지 손수 시범을 보인 그가 곧잘 따라 하는 한 주임을 잠시 물끄러미 주시했다.
‘반년 정도면 루 정도는 따라잡겠는데.’
“근력을 좀 더 키워 볼게요.”
한 주임은 어느새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해가 높이 떠서 정오 즈음이 됐을 무렵, 돌연 그가 한 주임에게서 검을 가져가 제 것과 함께 소파로 휙 던져 버렸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오후에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녀는 그제야 얼굴에 닿는 찬 공기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중하느라 훈련을 받던 견습 기사들이 전부 사라진 것도 몰랐다.
“우리도 식사하러 갈까?”
그가 내민 손을 잠시 고민하다 잡았다.
또 사무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을까 봐 고개를 돌렸는데, 그들은 가제보에서 등을 돌린 채로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동그랗게 서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뒷모습이라 그냥 두고 야닉을 따라 기사단이 사용하는 식당으로 걸었다.
“그런데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손잡고 가는 거죠?”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게 불편해서 물으니 그가 여상히 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손을 잡고 다닐 순 없으니. 그대가 마력이 없다는 소문이 벌써 퍼져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형편없는 취급을 당할지도 몰라. 불쾌하지만 않다면 당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거야.”
“황자 애인…으로요?”
그가 미소로 대꾸하자 민망함에 입을 다물었다.
한 주임으로선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할 수 있는 최선의 묘안인 데다, 연인행세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그가 힘을 분출할 수도 있으니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민망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지. 한 주임은 온기가 감도는 손을 어색하게 마주 잡았다.
기사단 전용의 넓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서 식사 중이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날아와 두 사람에게 꽂혔다.
배급을 받기 위해 줄 서 있던 기사들이 홍해 바다 갈라지듯이 앞길을 터 주면서 대놓고 구경하는 탓에 한 주임의 손가락 마디가 가늘게 떨려왔다.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녀는 호기심과 경멸이 담긴 눈빛만은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다.
기사들의 뼛속까지 훑는 듯한 시선은 과거 공항 입국장에 들어섰을 때 날아들었던 플래시 세례처럼 기어이 온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무슨 낯짝으로 귀국하셨나요?]
[엑스맨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뭐든 한마디만 해서 더 물어뜯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양궁팀에게 수없이 몰려들었던 마이크들은 전부 그런 질문들 따위로 점철된 것만 같았다.
야닉이 긴장을 넘어선 공포에 질린 한 주임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자 그녀가 흠칫 놀란 고개를 돌렸다.
“불편하면 둘이서만 먹을까?”
“네… 네?”
“다 나가.”
다정했던 얼굴이 허상처럼 사라진 싸늘한 한마디에, 일순 기사들이 빠른 동작으로 출입구를 향해 빠져나가는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배식 줄은 물론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먹던 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일어나 명령을 이행하자 커다란 식당 안에는 배급을 도와주던 사용인들과 야닉, 그리고 한 주임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저녁부터는 별궁에서 먹을 테니 지금만 참아 줘. 내 연인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인 걸 이제 알았군.”
남아 있던 사용인들을 의식한 듯한 낯간지러운 발언과 함께 그가 한 주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빈자리로 데려갔다.
부인만 한 명이지, 숨겨 놓은 애인은 한둘이 아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능숙하게 리드하는 모습에 허, 하는 웃음이 났다.
부인이 열셋이라던 시즈와 형제가 맞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한 주임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긴장감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앞에 하인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대령하기 시작했다.
버터 향이 물씬 풍기는 흰 빵과 홍차, 카다멈 오일을 듬뿍 뿌린 스테이크와 진득한 크림스튜가 척척 식탁 위에 올라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뭔가가 자꾸 줄줄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포도주까지 날랜 움직임으로 올려놓고 하인들이 물러나자 한 주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주변에 널브러진 주인 잃은 음식들도 커다란 접시에 같은 종류가 한꺼번에 올라가 있는 걸 보니 기사들이 평소에 먹는 메뉴인 듯했다.
“……매일 이렇게 많이 나오나 봐요.”
“황실기사단 식사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덕분에 살찐 거위 같은 놈들이 수두룩해.”
그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포도주를 따랐다.
한 주임은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던 몇몇 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스푼을 들었다.
종류별로 모든 음식을 한 번씩 먹어 보기만 했는데도 금방 배가 차는 느낌이 들어 식기를 내려놓는데, 눈앞에 불쑥 고기 조각 하나가 내밀어졌다.
이번에는 속지 말아야지.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대는 식사량을 좀 더 늘릴 필요가 있어. 근력을 키워야지?”
“……제가 먹을게요.”
아까처럼 아기 새같이 받아먹을 순 없어서 포크째 받아서 입에 넣었다.
조금이라도 배가 차는 기분이 들면 주저 없이 식사를 끝내곤 했는데 이 남자는 어느새 턱까지 괴고 앉아 더 먹으라는 눈짓을 한다. 할 수 없이 몇 번 더 고기를 집어 먹고 정말로 배가 불러 홍차를 마시자 그제야 만족한 듯 야닉이 마저 식사했다.
한 주임은 먹성 좋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는 남자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는 무척이나 깔끔하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 접시를 비워 나가고 있었다.
식사 중간중간 이를 후벼 파는 염 부장이나 쩝쩝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는 공 대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 같았다. 아, 진짜 다른 차원의 사람이지.
말끔하게 먹는 모습이 왠지 잘 먹는 손주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빵을 좀 뜯어 먹여 주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손 좀 몇 번 잡았다고 그새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았나 보다. 한 주임은 고개를 내둘렀다.
식사를 끝마칠 무렵 그가 금으로 만든 술잔을 내려놓자 문이 열리며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운영팀이 들어왔다.
제일 먼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코앞까지 달려온 사람은 예상대로 김유정이었다.
콧김을 아낌없이 뿜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다가오는 모습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다 봤어, 다 봤어! 둘이 아까 그거 뭐예요? 지금도 붙어 앉아 있고! 설마 사귀어요?”
다다다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김유정을 향해 야닉이 한 주임의 손을 잡아 올리며 확인하듯 입을 열었다.
“이방인들이 말하는 사귄다는 게 이런 뜻이지? 그렇다면 맞아. 행운의 여신이 내게 왔더군.”
어안이 벙벙한 운영팀이 곧바로 한 주임에게 해명하라는 듯한 눈빛들을 마구 쏴 대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듯한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잡혀 있는 손은 긍정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한 주임과 야닉을 번갈아 보다가, 염 부장이 밥이나 먹자고 심드렁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어버버 거리며 결국 멀어져 갔다.
뒤 돌아 걷던 김유정이 ‘미친. 주임님 손 개 빨라.’ 하는 소리에 한 주임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곤거렸다.
“저희 부서 사람들에게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이곳에 있는 동안은 함구하는 게 그대에게도 나아.”
“…….”
보는 눈이 많기도 하고 서로 필요에 의해 맺은 협정이라 그녀는 금방 수긍했다.
약점을 부러 드러내고 다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동료들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한 주임이 과거를 포함한 사생활을 시시콜콜 털어 대는 것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조용할지도 몰랐다.
그런 야닉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한 주임의 뒷모습을 이한율만 아로새기듯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 * *
마탑에 다녀온 포라킨은 연무장에 가만히 서서 야닉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르미네. 식사는 제때 해야지.”
“탑에서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중간 보고 드릴까요.”
포라킨이 슬쩍 한 주임을 쳐다보았다. 이방인 앞에서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지 묻는 모양새였다.
야닉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마력 보유량과 마나 이해도, 조절하는 능력만 봐도 한율 님은 머지않아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칠 겁니다. 현자 급은 저도 처음이라 가늠이 어렵네요. 어쩌면 황자님과 맞먹을지도 모르죠.”
“폐하가 신이 나시겠네.”
“부장님이라고 불리는 분은 잠재력은 좋으나 집중력과 이해도 부족. 유정 님은 본인이 가진 마력보다 더한 욕심을 부려 자제력 부족. 공 대리님은 총체적 난국이지만 그럭저럭이고요, 박 차장님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할까요.”
꽤 신랄한 평가에 한 주임이 마른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마력이 아예 없는 사람은 이제껏 저 말고 아무도 없었나요?”
그녀의 말에 포라킨은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황자님이 말씀하셔서 어제부터 밤새 황실도서관 자료를 뒤져 봤는데요, 많진 않아도 간혹 마력이 없는 이들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긴 했습니다. 다만….”
“다만?”
야닉이 답지 않게 망설이는 포라킨이 의아해서 되물었다. 포라킨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