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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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없는 아이는 태어난 지 열흘 정도 후에 사망한 경우가 제일 많았고, 대다수가 평민이었습니다. 장례를 위해 부모가 신전에 데려갔다가, 아이의 사망원인이 존속살인인지 조사를 하던 신관들에 의해 마력이 없었음이 밝혀진 거죠. 일반인인 부모가 마력을 나눠 줄 수 있을 리 만무한 데다, 간혹 무리해서 건네준 쪽이 고갈로 죽기도 했답니다.”
두 사람이 포라킨에게 ‘그리고?’ 하는 눈빛을 보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안 좋은 말을 먼저 하는 걸 보니 뒷말은 반전이 있을 거야. 한 주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귀족가에서 태어난 이는 상급마법사들이나 고위 신관에게 큰돈을 주며 마력을 받아 연명했는데, 역시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답니다. 사실 그 시절엔 그만한 마력을 나눠 줄 수 있는 이가 드물었거든요. 이방인들이 지금처럼 많았던 시절도 아니었고요. 제일 오래 산 사람은 아기 때부터 사원에 맡겨져서 2년 정도를 더 살다가 북부 전쟁이 발발한 후 고위 신관들이 치유 술사로 차출되자 곧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한 주임은 마치 남 얘기처럼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충격으로 낙담한 것처럼 보였는지 포라킨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쓰게 이야기했다.
“한 주임님은 그래도 운이 좋으신 겁니다. 넘치다 못해 몸까지 갉아 먹는 마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옆에 계시니까요. 오래 떨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한 주임은 이 남자에게서 떨어져서는 열흘도 못 가 죽는다는 말이 도저히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이걸 행운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멍했던 머릿속이 이내 곤죽처럼 흘러내렸다.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이었나.
“아, 황자님이 아니더라도 현자님이 계시니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한율 님 정도면 50년 정도는 나눠 받을 수 있을지도요. 두 분 다 미혼이시면 차라리 결혼하는 게 나을 수도….”
큰 의미 없이 중얼거리듯 한 말이었으나 한 주임은 이내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포라킨의 말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야닉 아니면 이한율 옆에 죽을 때까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야금야금 마력을 나눠 받으면서 기생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대에게는 다행인 일이군. 내가 아니더라도 죽을 걱정은 덜었으니.”
야닉의 위로에도 그녀는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망연하게 얼굴을 감쌌다.
“……연인 관계는 황자님보다 저한테 더 필요한 거였네요.”
“요새에 가면 한 주임님을 제가 좀 면밀히 살펴봐도 될는지.”
포라킨이 연구원 특유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한 주임을 쳐다봤다.
실험체를 보는 듯 눈을 번뜩이는 마법사에게 야닉이 표정으로 주의를 주자 그녀는 김샌 얼굴로 쩝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이 사실을 대주교이신 갈록 님이 모르실 리는 없을 거예요. 한 주임님의 마력을 측정하신 당사자니까요. 마법사로서도 저보다 조예도 훨씬 깊으실 테고요. 그분이 황자님의 힘을 눈치채기 전에 두 분은 지금처럼 충실하게 연인 행세를 하시는 게 좋겠네요.”
한 주임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추스르며 검을 들었다. 자기연민에 빠져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놔야 해.’
포라킨이 말한 것처럼 나라에 전쟁이라도 벌어져서 3황자나 현자 급이라는 이한율이 전방에 서게 된다면…….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언제 어디로 불려 갈지 짐작도 못 할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따라 위험한 곳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안전한 곳에서 몸을 사리다간 마력 고갈로 죽어 버릴 테고, 아무 힘도 없이 앞에 나섰다간 적들의 손에 죽을 테니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 본 적 없는 자립심이 도움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한 주임은 이젠 뿌듯한 마음마저 들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운이 좋은 편.’
포라킨이 했던 말을 재차 되뇌며 빠듯하게 목검을 그러쥐었다. 그러나 단단한 각오와는 달리 손은 미세하게 경련했다.
“한 주임!”
그때 식사를 마친 운영팀이 단체로 그녀가 있는 가제보로 다가왔다.
공 대리가 멀리서부터 손바닥 위에 탁구공만 한 물방울을 띄우고 제일 먼저 신나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것 봐! 이게 바로 공지욱표 워터볼이라는 건데 말이야, 이거를 저기다가 날리면…!”
“물장난하지 마요, 대리님.”
“아, 응.”
갑자기 김유정에게 꼬리를 싹 내리는 공 대리를 보고 한 주임이 영문 모를 얼굴을 하자 박 차장이 키득거렸다.
“공 대리 이제 유정 씨 말이라면 껌뻑 죽어, 아주 볼 만해.”
“차장님 몰아가지 마세요, 진짜! 저도 눈이라는 게 있거든요?”
“야, 나 정도면 평균 이상이지. 한 주임 남친까진 아니더라도….”
공 대리가 야닉을 힐끔거리며 물방울을 퐁 터뜨리자 이한율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믿기 힘든 표정으로 애써 웃었다.
“주임님, 아니죠? 두 분 이제 만난 지 사흘 정도밖에 안 됐는데…. 다른 사정이 있으신 거겠죠?”
애원하듯 재차 확인하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박 차장이 오더니 이한율의 등을 토닥였다.
“한율 씨, 재인이가 애도 아니고 생각이 다 있겠지. 나중에 다 말해 줄 거지, 재인 씨?”
“아, 네. 그럼요…….”
당연하게 사정이 있는 거로 몰아가는 듯한 말투에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 주임은 적당히 대꾸했다. 그제야 이한율이 한숨을 내쉬며 편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주임님.”
“든든한 동료가 있어서 다행이네.”
곧바로 야닉이 다가와 사람 홀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 주임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한율은 단박에 얼굴을 굳혔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한 주임에게 닿은 남자의 손이 단단하게 틀어박혔다.
야닉은 이어 운영팀을 향해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불과 바람, 그리고 물 이 세 가지가 모든 마법의 근간이 되는 마나 원소야. 물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바람은 벌써 끝난 듯하고. 이제 불만 남았나? 제일 까다로운 것이니 열심히들 해.”
황자의 응원에 운영팀은 제각각 뽐내듯이 손 위에 크고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이리저리 흔들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들처럼 난리였다.
제 머리통만 한 물을 공중에 띄우던 염 부장이 결국 끝까지 조절하지 못하고 공 대리 머리 위로 확 쏟아붓자 물이 튄 사람들이 역정을 내며 흩어졌다.
멀리서 포라킨 단장이 빨리 오라고 소리치자 엉거주춤 뛰어가는 모습들을 보자니 한 주임의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 * *
“주임님이 주기적으로 마력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꼭 황자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런 거라면 제가….”
훈련이 끝난 뒤에 자연스럽게 방으로 몰려든 사무실 사람들에게 ‘황자 남친’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사실 숨기기도 어려운 일이니 이들에겐 일찌감치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
한 주임은 야닉이 힘을 숨겨야 한다는 사정은 쏙 빼놓고 그가 제 상황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내용만 설명했다.
“한율 씨 마음은 고마운데, 황자님은 내가 여기서 차별당할까 봐 배려해 준 거야. 황족의 연인이면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진 못할 테니까.”
야닉이 먼저 제안해 주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이한율한테 달라붙어야 할 뻔했다.
왜인지 모를 안도감으로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부하 직원에게 부탁하기는 좀… 껄끄러웠을 테니까.
박 차장이 그런 한 주임을 걱정스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판단했어. 황자님이나 한율 씨 없어도 우리가 십시일반 나눠 주면 되지, 뭐. 나야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서도…. 근데 신체 접촉으로 받는다더니, 지금 나한테도 받고 있는 거야? 아무 느낌 안 드는데.”
박 차장이 한 주임의 손을 몇 번 더듬거리자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보니까 일정량을 받으면 어느 정도 소모될 때까진 더 안 받아지는 것 같아요, 오늘은 내내 손을 잡고 다녀서…….”
오후부터는 더는 마력이 흘러 들어오지 않았건만 저녁 식사를 하러 갈 때까지 손을 잡고 있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적어도 별궁 안에 있던 사용인들은 그녀가 야닉의 연인이라는데 이미 확신을 가진 듯했다.
아까도 방으로 오는 길에 복도 끝에서 처음 보는 하녀들이 소곤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갔더랬다.
걱정과 약간의 질투, 호기심과 귀찮음 등이 뒤섞인 운영팀의 심문은 취침 시간이 가까워진 후에야 모두 끝이 났다.
한 주임을 제외한 운영팀은 훈련 첫날, 송풍 수준의 바람을 일으키고 크고 작은 물방울과 불꽃까지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나름의 쾌거를 선보였다.
한 주임에게도, 운영팀에게도 고된 훈련의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크만 요새로 향하는 일정이 3일 앞으로 다가오자 운영팀은 어느새 중하급 마법사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공격 마법을 모두 익힌 그들에게 남은 숙제는 얼마나 정교하게, 정확하게 타격을 할 수 있는가 정도였다.
다만 허공에 실드를 치는 방어마법은 원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방인들 기준으로도 한 달 이상 소요되는 상급 마법인지라 그것까지 배울 시간은 없었다.
그마저도 혼자 중급 마물 정도를 막아내는 수준을 넘어서려면 필요한 마력의 양이 염 부장 정도는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실드는 항상 여러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전개하고 호흡을 맞추는 연습이 필요했다.
이한율이 30m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작은 크기의 나무토막을 불꽃으로 새까맣게 태우자 구경하던 어린 기사들의 환호성이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마력이 가장 적었던 박 차장마저 아주 작은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섬세함이 있다며 포라킨에게 칭찬을 들었다.
한 주임은 운영팀을 빙 둘러싸고 열띤 아우성을 보내는 어린 기사들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욱신거리는 오른쪽 팔목을 매만졌다. 도무지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한 번 더 부탁드려요.”
벌써 두 시간 째 그녀와 대련을 맞춰 주던 하랑이 곱슬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주임님, 저희 조금만 쉬었다 합시다. 주임님 다리 후들거려요. 보니까 손목도 삔 것 같은데 단장님한테 회복마법을 걸어 달라고 할 테니까 이제 좀 쉬세요.”
“저는 괜찮아요. 저쪽은 바쁜 것 같은데 나중에 치료받으면 돼요.”
본인이 모시는 주인보다도 지독하게 끈질기고 억척스러운 사람은 단연코 한 주임이 처음이었다. 하랑은 갑자기 야닉이 그리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